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35화 (135/155)

#135

하지만 이어진 유리의 말이.

“왜 남고 싶어 하는지 알겠어. 너무…. 네가 행복해하는 게 보여.”

무언가 삼킨 말과 얼핏 보인 부러움, 그리고 포기하듯 땅을 내려다보는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런 부탁은 정말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서호는 천천히 벌어지는 스스로의 입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손보다 말이 빨랐다.

“유리야.”

그리고 결국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런 걸 다 제외하고서. 윤이나 나를 다 무시하고 너만 생각하고 말해줄래? 돌아가고 싶니?”

“…….”

답을 듣고 나면 마냥 모른 척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애써 담담한 척하던 유리의 가면이 순식간에 깨졌다. 서호가 답을 원하는 마음 반, 듣고 싶지 않은 마음 반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물었다.

“말해줘. 돌아가고 싶어?”

“나는….”

어떻게든 간신히 막고 있던 둑이 터지듯, 유리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토해냈다.

“내가 너무 약한가 봐. 나는 정말 돌아가고 싶어.”

숨김없는,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답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나를 다독여주던 손이 그리워. 아빠가 장난스럽게 나를 놀리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싸우고 나면 못이기는 척 먼저 말을 걸어주던 동생이 그리워.”

그리고 서호는 벌써 후회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무서워. 아들을 보면서 그 사람을 떠올리는 내가 무서워.”

역시 물어봐선 안 됐다.

“언젠가 그 애를 보고 정말 돌이킬 수 없을 말을 하게 될 내가 두려워.”

멍청하게 이렇게 될 줄 알면서 순간의 감정에 이기지 못했다.

“나도 알아. 나만 생각을 바꾸면 된다는 거. 나만 그 사람을 받아들이면 지금보다 모든 게 나아질 거라는 것도 알아.”

돌아올 답을 알면서 도대체 왜 물은 걸까?

“그런데 그게 안 돼. 소름이 끼쳐. 그 눈빛이, 목소리가, 손길이. 그리고 그 사람을 닮은 아들이. 그러면서도 하나도 닮지 않은 내 아들이 무서워.”

어쩌면 유리가 거짓말로라도 이곳에 남아 있겠다고 답해주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나를 너무 닮아서 내 행동에 상처받을 그 애를 알아. 지금도 계속해서 상처를 받고 있겠지. 그런데 그 상처가 더 커지면?”

정말 다 털어내고 싶어서, 조그만 죄책감도 지고 가고 싶지 않아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러다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결국 돌아온 답은 이랬다. 그리고 이 말들은 영원히 가슴에 짐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엉망으로 치닫기 전에, 그래도 좋은 감정이 남았을 때 떠나고 싶어. 적어도 지금 떠나면, 그러면 그 애는 나를 미워하기보다는 그리워하거나 안타까워할 테니까.”

하지만 아마 자신은 이 답을 실제로 듣지 않았어도 이 모든 답을 상상하고 제멋대로 추가하며 죄책감을 짊어졌을 테다.

“서로를 완전히 미워하게 되기 전에 벗어나고 싶어.”

그러니 어차피 죄책감을 얻게 될 거라면 상상보다는 실제를 겪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혼자만의 자기 위로일지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그 애를 끊어내는 게 맞다는 걸 알아. 그래. 그걸 알아. 아프다고, 문제가 있다고 티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냉정하게 돌아가는 게 어쩌면 제일 좋은 선택지일지도 모르지.”

유리의 답이 시작된 이상 후회는 소용없다고. 그러니 이 감정을 그냥 받아들이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런데 나는 그게 무서워. 그렇게 했다가 정말로 그 애가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을까 봐. 내 아들의 머리에서 내가 지워질까 봐.”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그만하고 싶었다

“너무 못됐지? 그런데 내가 지금 그래.”

이런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너를 도와주지 못하는 스스로를 그냥 받아들이자고.

“미안해, 서호야. 지금도 너한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나 정말 돌아가고 싶어.”

착한 척은 정말 그만하자고. 서호는 고개를 푹 숙이는 유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나, 로제타. 유리. 윤. 그리고 거울.

참 복잡하게도 엮여 있었다.

반드시 한 사람 이상은 불행해지고 마는 최악의 관계. 서호가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유리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때 귓가에 끼기기긱-,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호는 본능적으로 이 소리가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역시….’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거울 안에서 하얀 손이 자신의 존재감을 밝히듯 다시 한번 거울을 손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다.

기긱, 하는 기괴한 소리였지만 서호는 거울 속 손이 두렵지 않았다. 그냥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로제타 덕분이겠지.’

로제타가 같은 방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평소보다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심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손이 거울을 긁던 행동을 멈추더니 다시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새벽.’

여기서 말하는 새벽이 단순한 의미의 새벽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서호가 눈을 찌푸리자 또다시 손이 꼼지락거리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글자가 아닌 선이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색을 가진.

붉은색의 선이 무한을 그리며 점점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얇았던 선이 겹치고 겹쳐져 단단하나 못해 하나의 뭉치로 보일 때까지.

‘저건….’

서호는 지금 스스로가 느끼는 이 확신을 얼마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있었다. 신력에 의한 무조건적인 확신.

‘이 확신이 정말 신력에 의한 것이 맞다면….’

서호는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바라봤다. 때마침 윤이 이쪽을 바라보고 로제타 역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호는 로제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일부러 묻지 않았던 사실을 물었다.

“로제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아리스는 괜찮나요?”

혹여 그가 잘못됐을까 싶어 묻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서호의 예상, 아니 확신과 같았다.

“그는 멀쩡해. 그대 덕이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 확신 역시 신력에 의한 것이 맞을 것이다. 서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역시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냥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유리와 윤을 위해서. 그리고 서호 그 자신을 위해서도.

‘이대로 모른 척하면 분명 평생 신경을 쓸 거야.’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새벽’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자 모든 게 괜찮을 것 같았다. 서호는 자신이 충분히 이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 될 것 같아.’

신력이 자신에게 주는 자신감. 서호는 결국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해야 했다.

“방금 거울에서 손이 또 나타났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요.”

“…손이 또 나타났다고?”

서호는 윤이나 유리보다는 로제타에게 집중했다.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로제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무언가 알려줬는데 그것과 관련해서 로제타와 할 말이 있어요.”

그 말에 얼굴이 흐려진 로제타가 다급하게 서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서호.”

짧은 부름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서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들어줄래요? 다 듣고 이야기해 줘요.”

“하지만….”

결국 로제타는 입을 다물었다. 서호의 뜻에 따라 준 것이다. 서호는 고개를 돌려 윤을 쳐다봤다. 그러자 윤이 알겠다는 듯 유리와 다이앤을 데리고 멀어졌다. 서호는 그들 주위를 감싸는 마법을 느끼며 다시 로제타를 바라봤다.

애처로운 얼굴의 로제타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거울이 새벽이라는 단어와 붉은 선을 그렸어요.”

“붉은 선?”

서호가 로제타의 손을 쥐어 손바닥에 무한을 그렸다.

“이렇게 끊임없이 선을 그렸어요. 얇은 선이 하나의 모양이 될 때까지 계속요.”

로제타가 손바닥을 오므려 서호의 손을 붙들었다. 서호가 그 손을 떨쳐내지 않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게 힌트라고 생각해요. 내가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요.”

이쪽의 일에 꽤 관심이 많은 그 손이 타이밍 좋게 나타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가 싫다니 다른 대안을 주겠다는 듯 건넨 무언가. 그때 로제타가 다시 한번 서호를 불렀다.

“서호.”

서호는 로제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상대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분명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서호는 기묘한 확신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불확실하죠. 하지만 나는 자신하고 있어요. 아리스를 치료했을 때도 느꼈던 그 감각이에요.”

자신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 모를 확신.

“그를 치료하면 나는 이대로 잠들 테지만 그래도 지금 그를 살리지 않으면 그는 죽는다는 예감, 그를 치료하고 난 뒤 그는 무조건 살 거라는 그 믿음요.”

서호가 당신도 알지 않냐는 듯 말했다.

“신력이 알려주고 있어요.”

서호는 침묵하는 로제타의 손을 꽉 붙들며 말했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본능적으로 뭐가 제일 좋고 좋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다고요.”

그러자 로제타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것과 달라. 그건 생명과 관련된 일이었잖아. 이건….”

“네. 다르죠. 하지만 가능할 거 같아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서호가 로제타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가슴팍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달라요. 이 힘과….”

그리고 과거의 이방인들과 자신들은 다른 관계.

“우리의 연대.”

서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우리가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요. 우리가 이 붉은 실을 볼 수는 없지만….”

그때 로제타가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말했다.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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