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가장 효율적으로 제국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면 이게 제일 좋지.’
로제타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을 왕자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서호를 설득한다면….”
로제타가 코웃음을 쳤다.
“어떻게? 서호는 꽤 단호하던데.”
그렇게 냉정하게 선을 긋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 뻔했다. 잠시 침묵하던 왕자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서호와 폐하는 여태까지의 사람들과는 관계가 다르지 않습니까? 운명의 실이 끊어질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도 않고 오히려 돈독하시죠.”
로제타는 바로 눈을 바꿔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봤다. 실시간으로 단단하게 크기를 키워가는 붉은 실이 생생하게 보였다. 절대 풀어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단단한 연결. 그리고 얼핏 보이는 저 여자의 발목에는….
“저는 그 실을 보지 못하지만 분명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로제타는 여자의 발목에 감긴 미련의 흔적에서 눈을 떼어내며 왕자의 말을 잘라냈다.
“물론 서호와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지. 하지만 나는 그런 불확실한 가능성에 모든 걸 맡길 생각이 없는데.”
붉은 실을 보고 만족한 것과 별개였다. 그러자 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거울을 깨트리면 이방인은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게 제가 거울을 훔친 이유고요.”
이건 로제타도 모르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별로 중요치 않은 정보이기도 했다. 서호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을 한 지금은 더더욱.
“어머니는 이곳에 24년을 붙잡혀 계셨죠. 그 말은 반대로 거울이 있다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능성일 뿐이군. 나를 설득할 만한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로제타가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그 웃음을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바라보던 왕자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돌연 태도를 바꿨다.
“폐하가 아닌 서호를 설득할 방법이겠죠.”
본래도 그리 곱지 않던 눈매가 매섭게 치솟았다. 왕자가 로제타를 노려보다가 샐쭉하니 눈을 찢고 웃었다.
“폐하께서는 서호를 이기지 못하실 테니까요.”
비열한 웃음이었다. 로제타가 반박하듯 말했다.
“서호를 설득하지 못할 거야. 서호는 나를 선택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 윤이 눈을 더욱 접어 웃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렇죠. 하지만 동시에 서호는 너무 착한 사람입니다. 힘든 친구를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저쪽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바로 코앞에 있는 로제타만 들을 수 있도록 아주 작게.
“특히 폐하께서 등장해 안정을 되찾은 지금은 더욱요.”
“뭐?”
왕자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폐하 덕에 저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될 겁니다. 서호에게 폐하가 이리 큰 의미가 있는 분이라 참 다행입니다.”
그리고는 어느새 차갑게 굳은 로제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저와 함께 어떻게 서호를 다시 데려올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너.”
왕자가 기괴한 웃음을 지워내며 서호를 눈짓했다.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귓가로 왕자의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바라본, 거울을 응시하는 서호의 얼굴은 아주 단단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로제타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 들이닥쳤다는 걸 강제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서호는 로제타가 윤과 함께 멀어지자 유리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와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 개인적으로 대화할 자리를 만들긴 했지만 막상 단둘이 남게 되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방금 로제타와의 그런 모습까지 보여주지 않았던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민망했다. 그렇게 서호가 말을 고르고 있는데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덤덤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서호가 유리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와 저 사람은 나랑은 달랐구나. 직접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
그렇게 말하는 유리는 조금 슬퍼 보였다. 유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사람을 완전히 믿고 있구나.”
유리가 입꼬리를 떨며 말했다.
“미안해. 내 경우만 생각했나 봐.”
정말 미안하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한 유리가 말을 이었다.
“네가 납치당했다는 걸 들었는데도. 네가 사라지고 난 뒤에 부모님이 어떻게 되셨는지도 들었었는데. 당연히 너도 돌아가고 싶을 거라고 여겼어. …그리고 고마워.”
유리가 옅게 웃었다.
“알려주지 않을 수 있었는데 알려준 것 말이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내게 선택지를 주려고 했던 거지?”
웃고는 있지만 그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유리의 입가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내 생각을 했던 것처럼 나도 네 생각을 하고 싶어. 이번에는 네 이야기를 해줄래?”
“…….”
서호는 침묵했다. 지금 유리가 어떤 마음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쉽게 입을 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이야기는 대충 들었지? 그러니까 네게 저런 사람이 있는데도 나한테 그 이야기를 해준 걸 테고. 그러니까 알려 줘.”
서호가 고개를 젓는데 유리가 조금 더 뚜렷해진 눈으로 물었다.
“어떤 사람이야? 나는 알고 싶어. 그래야 내가….”
뒤에 이어질 말을 알았다. 서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네가 돌아간다는 생각을 포기해 주기를 바랐다. 조금이나마 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게 더 나쁜 걸지도 모르지.’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네게 직접적으로 거절의 의사를 표하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호는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유리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다정한 사람이야.”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세심하고 늘 나를 배려해 줘.”
그리고 내가 떠나면 그가 얼마나 슬퍼할지도 말해주고 싶었다.
“눈물이 많은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이곳을 떠날 수가 없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그 말이 의외였는지 유리가 로제타를 훔쳐보듯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눈물이 많은 건 의외네.”
서호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화려하지만 차가워 보이는 저 얼굴을 보면 눈물이 많다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기는 했다.
‘그래도 정말 울보잖아.’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물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서호는 성인이 그렇게 많이 우는 걸 처음 봤다. 하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숨김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그게 더 좋았다. 서호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기 감정에 정말 솔직한 사람이야.”
“…그게 부담이 되지는 않고?”
망설이듯 던져진 물음에 서호가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묻는 의미가 뭔지 알았다. 그게 그녀의 경험에 빗대어 던져진 질문이라는 것도.
서호는 부러 그 속의 뜻은 모르는 척 답했다.
“내가 외로워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너무 잘생겨서 그랬던 건지 나는 좋았어.”
그러자 유리가 피식 웃었다.
“그래, 정말 잘생기긴 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조금 장난 섞인 답이었다. 하지만 서호는 그런 유리를 따라 웃어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얇은 바늘이 가슴 한쪽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서호가 작게 숨을 내쉬는데 유리가 질문을 이었다.
“여기에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니?”
서호는 다시 한번 죄책감을 모른 척하며 답했다.
“…잘 모르겠어. 그런데 저 사람이 계속 도와줄 것 같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서호가 유리의 얼굴을 외면하듯 로제타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거기나 여기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똑같으니까.”
유리에게서 작게 동의를 뜻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서호가 유리를 다시 돌아보는데 그녀가 망설이듯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이건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혹시 황제한테 그러니까,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거나 결혼할 사람이 있니?”
“아.”
서호는 순간 멍해졌다. 이런 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동시에 다이앤의 말이 떠올랐다. 부인이 있는 남자라는 걸 알면서 받아들일 정도로 왕을 좋아했다던 유리.
다시 한번 유리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이 비교됐다. 서호가 콱, 막히는 심장을 느끼며 답했다.
“일단 내가 알기로는 없어. 실제로도 없을 테고.”
유리의 상황을 알면서, 이 답이 유리에게 상처가 되는 답일 수도 있다는 걸 짐작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여기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대기 위해서 기어이 이 말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돌아온 답.
“다행이다.”
정말 안심했다는 듯한 그 표정.
“정말 다행이야, 서호야.”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없는 그 말이 기어이 자신을 무너지게 했다.
“그것만 있으면 돼. 그렇지. 둘만으로 온전한 관계 말이야.”
유리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서로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그런 사이. 불안해하고 의심할 필요 없는….”
서호는 유리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때 서호와 눈이 마주친 유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 미안해. 네 이야기를 듣기로 한 건데.”
“…괜찮아.”
흘러나온 목소리가 조금 막혀 있었다. 다행히 유리는 그런 자신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서호는 얼른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지금과 같은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가는 자신이 어떻게 나올지 스스로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