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친구라고 하면서 결국에는 조건부로 도와주겠다는,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걸면서도 서호는 그리 말했다.
“그대는 너무 착해.”
누군가는 이기적이라고 할 이야기였으나 로제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아량 넓은 그대 덕에 몰염치한 인간이 득을 보는군.”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무는 것을 보아하니 뭔가 더 안 좋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유리가 자신의 친구라는 소리에 결국 입을 다문 것 같았다. 서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신뿐일 거예요.”
“그대의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쪽이 문제가 있는 거지.”
로제타의 칼날 같은 시선이 윤에게로 향했다. 서호가 그런 로제타의 시선을 붙잡듯 손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래서, 로제타. 내가 그래도 될까요?”
로제타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말없이 서호를 바라봤다. 보석 같은 푸른 눈이 서호를 가득 담고 깊게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로제타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굳이 도와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서호가 사르르 눈을 접었다.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정말 로제타가 너무 좋았다. 서호가 꼼지락거리며 붙잡고 있던 손을 풀어내며 물었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유리랑 이야기를 좀 나눠도 될까요?”
그러자 로제타가 아쉽다는 듯 끝까지 서호의 손끝을 붙잡고 늘어지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
로제타가 이곳에 침입하면서 여러 일이 있었을 테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알고 있어요.”
서호가 얼른 놓아달라는 의미로 아직도 붙잡혀 있는 손가락을 움직이자 로제타가 불쑥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서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곤 뒤로 물러났다.
“나는 왕자와 잠시 이야기하고 있지.”
그리고는 서호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윤에게 손짓했다. 깜짝 놀라 자신의 볼을 감쌌던 서호가 붉어져 있는 로제타의 귀 끝을 보며 웃었다. 정말이지 그만 있으면 어떤 문제든 가벼워지는 이 현상이 싫지 않았다.
***
서호를 눈에 담자 머리를 시끄럽게 하던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저 서호의 향기와 그의 온기. 그리고 자신을 꼭 붙드는 서호의 손길만이 강하게 느껴졌다.
잔뜩 떨리던 몸이 자신의 품속에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변화가 로제타를 달뜨게 했다.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기대는 서호라니. 잔뜩 흥분했던 탓인지 거친 숨결이 목가를 간지럽혔다.
그에게는 직접 이야기하지 못하겠지만 순간적으로 이런 서호를 볼 수 있다면 납치를 한 번 당한 것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렸다.
물론 로제타는 그런 속마음을 서호에게 직접적으로 말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아니, 서호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말이 어디서 새어나갈지는 아무도 몰랐으니까.
‘선을 지켜야 해.’
세간에서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의, 서호가 불쾌하지 않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의 감정만을 내보여야 했다.
‘다른 이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로제타는 루트라는 신관에게서 받았던 기록들을 떠올렸다. 이방인을 다시 돌려보내는 방법과 동시에 안겔이 말해주지 않았던 과거의 거울 사용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던 기록.
그다지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영민한 머리는 몇 줄의 문장만으로도 그들이 어떻게 운명과 그토록 멀어졌는지 짐작했다.
‘비정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강렬한 그들의 감정과 집착.’
그걸 깨닫자마자 로제타는 빠르게 서호와의 과거를 되새겼다. 그리고 나름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직까지 자신은 서호에게 정도 이상의 감정이나 집착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서호의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내 감정을 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있고.’
또 마찬가지로 서호의 개인적인 성향이 더해져 그가 궁을 벗어나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 역시 로제타가 비정상적인 감정을 내보이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지.’
서호가 이 세계에서 남은 생을 살게 된다면 언제든 필연적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가 생길 수 있었으며, 언젠가 자신의 품을 벗어나 더 많은 이들과 교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야 했다. 서호에게 언제나 자신 외에 다른 이들이 생길 수 있음을, 그럴 때 어느 수준 이상의 감정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되뇌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과 다짐을 하기가 무섭게 바로 그와 엇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벌써 서호의 친구 중 마음에 들지 않은 상대가 하나 생겼다. 로제타는 사나워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풀어내며 여자를 바라봤다. 루미너스 왕자의 어미이자 서호와 같은 세계 출신의 여자.
이곳에서의 이름은 그레이스지만 서호의 말을 들어 보면 그녀의 본래 이름은 아마 유리일 것이다.
‘날 만나기 전의 친구라….’
이 세계에서 자신만큼 서호를 오래, 그리고 많이 본 이가 없을 거라는 사실은 로제타에게 언제나 큰 위안을 주곤 했다. 그의 시간을 가장 많이 소유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 흡족했고.
그런데 자신보다 더 오래 서호를 알고 지냈던 사람이 등장했다.
‘거슬려.’
로제타는 그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적의나 불쾌감을 내리누르고 무심한 얼굴을 뒤집어쓴 로제타는 이어지는 서호의 말에 입술을 꿈틀거렸다.
‘서호가 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분이 바닥을 치고 상대를 향한 악의가 끓어올랐다.
‘저게 뭔데.’
서호가 왜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로제타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서호가 자신을 버리고 이곳을 떠난다는 상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멀쩡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서호에게 결정권을 넘겨버렸다.
서호에게 말했듯 그가 자신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서호는 결국 자신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든.’
로제타는 서호의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관심을 끊어내며 바로 앞에 있는 왕자를 쳐다봤다.
‘제 어미를 잘 사로잡았기를 바랄 뿐이지.’
집착적이고 누군가에게는 소름 끼칠지도 모르는 자신의 감정을 그에게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강하게 서호의 의견에 반대해 그에게 실망스러운 눈빛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서호와 부딪치지 않고 이 일을 깔끔하게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저 여자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되지.’
서호와 같은 세상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다 못해 존재감이 옅은 여자였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 전혀 현재에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여자.
쓸 만한 실력자라 기척을 잘 숨기는 그런 이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존재감이 없는 여자였다.
‘꼭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로제타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 여자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만약 이곳에 남겠다고 말한다 해도 오래 살지는 못하겠군.’
당연히 로제타는 그 사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말해 봐야 괜히 서호의 관심이나 신경을 빼앗길 테니까.
로제타는 이쪽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서호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의 일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여자에게 주는 말뿐인 기회가 끝나면 곧장 눈앞의 왕자를 처리할 것이다. 로제타는 감히 제 것을 건드린 왕자를 멀쩡히 풀어줄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무심한 듯 살벌한 로제타의 말투에도 왕자는 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담담하게 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리고요.”
그리 말하며 서호를 돌아보는 시선이 거슬렸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하고, 뭉클해 보이는 시선. 로제타가 그 시선을 잘라내듯 냉정하게 말했다.
“이 일이 끝나면 그대도 끝이야.”
“네. 예상하고 있습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왕자가 다시 문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밖의 상황을 가늠하는 눈치였다. 로제타는 아직도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는 아리스와 왕자의 마법사들의 움직임을 느꼈다.
‘쓸 만하군.’
왕자의 마법사가 벌써 반으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간혹가다 느껴지는 안겔의 성력은 예상외로 아리스를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고 싶어 발악하는 모양이지.’
바깥 상황을 파악한 로제타가 비꼬듯 말했다.
“짐작했겠지만 어느 쪽으로든 이제 빨리 움직여야 할 텐데.”
이렇게 커다란 마나의 움직임을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 궁을 뒤덮은 마나를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숨기는 건 잠깐이었다.
곧 있으면 저 여자에게 집착하고 자기 아들을 견제하는 왕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제일 덜 귀찮은 방법은 왕이 오기 전에 왕자를 처리하고 이곳을 떠나는 건데.’
자신의 신력이나 아리스의 마나가 곳곳에 남아 있긴 하지만 왕궁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신력과 아리스의 마나를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이대로 모습을 감춘다면 그들의 궁에 남아 있는 침입자의 흔적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왕자나 저 여자 사용인을 처리한다면 더욱 일은 쉬워질 테고.’
설령 누군가 자신이나 아리스를 봤다고 이야기하거나, 왕궁 마법사들이 마나와는 다른 신력을 느낀다고 해도 자신의 모습을 직접 내보이지 않는 이상 발뺌을 하면 저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