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32화 (132/155)

#132

동화책에 나오는 전형적인 백마 탄 왕자 같은 걸까?

순금을 녹여낸 듯한 화려한 금발과 호수를 담은 푸른 눈. 그를 보는 이들 모두가 찬사를 뱉어낼 아름다운 얼굴까지. 물론 눈앞에 있는 이는 왕자가 아니라 황제였고, 그가 몰고 온 것은 백마가 아니라 무섭고도 흉흉한 신력이었지만 꽤 전형적인 등장이었다.

윤은 황제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풀어지는 서호의 얼굴과 황제를 강하게 붙드는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정말 끝이 났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어쩌면 후련한 것도 같았다. 이제 서호를 강제하지 못한다. 윤은 상황을 전혀 모르는 다이앤과 그녀와 함께 서 있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절망을 삼켰다.

***

서호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한참 몸을 맡기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로제타를 마주 봤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정말 오랜만에 그를 보는 것만 같았다.

서호는 그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어주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왜 이제 왔어요?”

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입에서 나온 말은 원망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또 말을 꺼내고 보니 서운함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바로 오겠다고 했었잖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오겠다고 했으면서 이제야 나타나다니, 충분히 그를 탓해도 될 일이었다. 로제타가 계속 자신의 옆에 있었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 테고 이렇게 화가 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서호가 로제타를 붙잡은 손에 힘을 더 세게 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얼마나 불렀는데….”

쓰러지기 전, 속으로 그를 계속 불렀다. 만약 여기서 육성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면 할 말이 없긴 했지만 아무튼 일이 생겼는데 오지 않았던 건 로제타였다.

뾰족한 서호의 얼굴에 부드럽게 풀려 있던 로제타의 얼굴에 당황과 미안함이 가득 찼다. 로제타가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나도 어쩔 수가 없는…, 아니 내 잘못이 맞아. 그대에게 약속한 건데.”

처음 말에 더욱 날카롭게 눈을 치떴던 서호는 이어진 로제타의 말에 조금 유한 마음이 되어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은 뭐였는데요?”

그러자 로제타가 입을 꾹 다물고 윤을 힐끗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 지금은 안 돼.”

만족스럽지 않은 답이었지만 윤을 쳐다보는 걸 보아하니 그가 들어서는 안 되는 내용인 모양이었다.

‘아.’

윤과 유리를 보고 나니 이제야 제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다이앤까지 있다는 것도 이제야 눈치채고.’

이아코스 왕국에 있는 타국의 황제 로제타라니, 그것도 후궁인 유리의 개인 방에.

충분히 문제가 될 일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자신과 로제타의 대화도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맞지 않는 것이었고.

서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로제타를 살짝 밀었다. 로제타가 조금 아쉬운 낯으로 뒤로 물러나다가 그의 손을 붙드는 서호의 손길에 얼굴을 환하게 폈다.

서호는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파고드는 로제타의 손가락에 다시 한번 안도감을 느꼈다. 조금 전 족쇄처럼 느껴졌던 윤의 손과 달리 자신의 뒤를 단단히 받쳐주는 버팀목 같았다.

‘내 편.’

서호가 그 손을 꽉 움켜쥐며 다시 윤과 유리를 바라봤다. 유리의 시선이 맞잡은 자신들의 손에 닿아 있었고 윤은 그런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호는 손을 꼼지락거리고 싶은 걸 참고 조금 더 로제타의 옆에 붙어서며 그를 올려다봤다.

로제타는 자신을 바라보던 따뜻한 눈빛과 전혀 다른 냉랭한 얼굴로 윤과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단순히 차갑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무서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딱히 그걸 말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았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유리를 쳐다보던 윤이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마주 봤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 서로를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충돌이 일어날 것처럼 거칠고 긴장된 분위기가 주위를 감쌌다.

그 대치 상태를 깬 건 윤이었다.

“피차 이곳에서는 싸우지 못하겠죠. 지켜야 할 상대가 있으니까.”

“내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하진 않은데.”

서호를 지키면서 충분히 너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에도 윤은 담담하게 답했다.

“저를 처리할 수는 있어도 왕국군 전부를 상대하면서 서호를 지킬 수는 없겠죠.”

여전히 차분한 태도였다. 서호는 어느새 유리를 지키듯 그녀보다 살짝 앞에 서 있는 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제타. 윤의 말처럼 지금은 싸우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 그럼 돌아갈까?”

정말 원하던 답이었다. 그와 함께 새로운 그들의 집으로 가고 싶었다. 손이 말을 전해준 이후 계속해서 원하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손을 붙잡아주는 단단한 온기에 조금 전, 목 끝까지 차올라 숨을 헐떡거리게 했던 부담이 사라졌다. 자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줄 사람이,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걸 막아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었다.

그래서 서호는 조금 더 포용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아니요. 그 전에 해결할 게 있어요.”

“해결?”

로제타의 날카로운 시선이 윤에게로 향했다. 서호가 그런 로제타의 손을 다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요. 저기 윤의 옆에 있는 여자가 바로 그레이스예요.”

“그대와 같은 세상에서 왔다는?”

“네.”

로제타의 시선이 유리를 대충 훑었다. 정말 관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시선이었다.

“…평범하군.”

“네?”

“그대와 같은 곳에서 왔다기에는 지나치게 평범해.”

정말 의외라는 듯한 그 반응에 서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지금이 그런 말을 할 때인가?

서호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리고 내 친구였어요.”

“친구?”

잠시 말을 이해해 보려는 듯 친구라는 말을 한번 반복하던 로제타가 자기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냐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서호가 그게 맞다는 의미로 다시 한번 말했다.

“네. 내게 여러모로 도움을 줬던 친구예요.”

그러자 로제타가 눈을 굴리더니 다시 유리를 돌아봤다. 그리고 매우 어색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평범하진 않고 맹해…, 착해 보이는군.”

여전히 전혀 관심이 없는 게 훤히 드러났다. 참 그다운 반응이었다. 서호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윤은 제 친구의 자식이 되는 셈이죠.”

“그래서?”

여전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긴 아직은 제일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도 했다. 서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윤은 유리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고 싶어 해요.”

“그래,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그대를 납치한 이유는 뭐지?”

시선은 서호를 보고 있었지만 질문은 아마 윤에게 향한 것 같았다. 서호처럼 그걸 느꼈는지 윤이 답했다.

“안겔과 거래를 했습니다. 제가 거울을 챙길 때까지 도움을 주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서호를 원래 세상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죠.”

로제타의 기운이 날카로워지는데도 윤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안겔이 제 마법과 함께 서호를 붙잡아주고 있던 덕에 거울을 빼돌릴 수 있었고요. 어머니와 관련해서도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확실히 안겔이 있었기에 윤이 가짜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단둘이 있었다면 조금 더 빨리 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안겔을 경계하느라 집중이 분산됐었으니까.

“안겔은 서호의 의견을 물으려던 것 같은데 서호는 이미 답을 내린 것 같더군요.”

서호는 그렇지 않냐는 듯 자신을 돌아보는 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늘 말했던 대로 나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어요. 로제타.”

로제타는 크게 놀라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굉장히 덤덤한 그 반응에 윤이 놀란 듯 로제타를 바라봤다. 물론 그건 서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되레 로제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가 몇 번이나 말해주지 않았나?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이상 그대가 날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랬죠.”

흔들림 없는 믿음이 가득한 그 말에 작게 웃음이 났다. 로제타가 서호를 따라 생긋 웃음을 지으며 서호의 입가를 매만졌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좋아 눈을 감고 싶었지만 앞에는 아직 다른 이들이 있었다.

아직 해야 할 말이 더 있기도 했다. 서호가 잠시 로제타의 손길을 느끼다가 손을 붙잡아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어요. 로제타. 유리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거든요.”

“무슨 소리지?”

로제타의 얼굴에는 의아함과 황당함이 가득 섞여 있었다.

“이곳에 오고 난 뒤에 꾼 꿈에서 또 손이 나왔어요. 물론 나에게는 손을 대지 못했고요. 그런데 그 손이 유리를 보여 주더라고요.”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 눈을 찡그리던 로제타가 계속 말하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이번에 저 거울 너머에서 손이 또 나타났어요. 그리고 유리를 다시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내가 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어요.”

“뭐?”

“유리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어요.”

“그대는?”

바로 자신의 의견을 묻는 로제타에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내려갔다. 언제나 내가 우선인 사람. 서호가 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려 노력하며 답했다.

“유리를 도와주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유리를 돕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와줄 수 없고요.”

“도와주겠다고?”

“유리는 그래도 내 친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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