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역시 태도가 거슬렸다. 서호를 위하는 중이라는 저 말투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분이 남겠다고 하시면 더는 손을 쓰지 않을 거예요.”
“더는 손쓸 힘이 없는 거겠지.”
“뭐, 틀린 말은 아니죠.”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여전히 맞부딪치고 있는 성력과 신력을 바라봤다. 별다른 타격이 없는 자신과는 달리 안겔은 이제 조금 힘들어 보였다. 안겔의 얼굴을 타고 식은땀이 아래로 떨어졌다.
“들어오시는 것까지는 상관없지만 서호님이 생각할 시간을 주시는 게 어떨까요?”
로제타가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발을 내딛자 안겔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들어주지 않으실 거라고는 생각했답니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아요. 폐하께서도 서호님을 강제하시는 편은 아니시니.”
로제타는 안겔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안타깝지만 지금 이쪽 마법사는 자리를 비운 상태랍니다. 그러니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제가 움직이는 게 좋겠죠?”
로제타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안겔을 흘끗 바라봤다. 제깟 게 싸우자는 건가 싶었지만 시선이 마주친 안겔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오세요. 참고로 서호님은 지금 후궁과 함께 계신답니다.”
안겔은 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로제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발을 내디뎠다. 안겔을 따라간다기보다는 서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발을 옮기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죽이는 것도 좋겠지만….’
로제타는 안겔의 처분을 아주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서호가 나를 선택하는 걸 보여줘야지.’
도대체 이 여자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끈질기게 자신과 서호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이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서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놓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불행해지는 일 따위는 없을 거야.’
그렇게 로제타가 모래알 같은 인내를 끌어모으는데 그의 발 앞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퍼어엉-.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닥이 크게 진동했다.
로제타가 무심한 낯으로 그를 감싼 아리스의 마법 너머를 응시했다. 시야를 가리는 시커먼 연기는 아리스의 마법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강한 바람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드러난 복도에는 한 무리의 마법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걸리시겠네요?”
옆에서 생각할 시간이 더 생겨서 다행이라며 이야기하는 안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스의 마법이 닿지 않았기에 그녀의 옷은 조금 그을려 있었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쾌한 기색 없이 만족스레 웃고 있던 안겔. 역시 평소와는 달랐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지.’
로제타는 다시 한번 공격을 준비하는 마법사 무리를 돌아보며 힘을 끌어올렸다.
***
문이 열리는 커다란 소리에 서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기나긴 침묵에 휩싸인 방,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던 방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막 방으로 들어선 윤이 조급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서호와 눈이 마주친 윤이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선택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넋을 놓은 듯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유리가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윤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하지만 윤이 단호하게 그 말을 끊어냈다.
“망설일 틈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유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왕이 무슨 문제라도 일으킨 건가?’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서호는 이내 관심을 껐다.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만….”
유리가 자신을 힐끗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서호는 그 시선을 또 한 번 모른 척했다. 그때 윤이 서호에게 다가왔다.
“서호.”
동시에 그들을 감싸는 마법이 느껴졌다. 죄책감 가득한 저 얼굴을 보니 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은가 보네?’
이미 다 이야기한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정말 어머니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구나.’
새삼스레 다시 한번 조금 전 자신의 선택이 원망스러웠다. 왜 그 일을 이야기했을까? 왜 쓸데없이 양심을 지키고 남을 불쌍히 여겼지?
서호가 유리를 돌아보는데 윤이 그 시선을 잘라내듯 시야를 가렸다.
“거울을 깨트리지 않을게. 제발 도와줘.”
서호가 헛웃음을 흘리자 윤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왕이 곧 이 모든 걸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정말 끝이야.”
서호가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윤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이야기했다.
“…사실 어머니에게는 돌아가는 것 말고 다른 답이 없어.”
윤이 서호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어떻게든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할게. 이렇게 방법을 찾아낸 것처럼.”
강하게 붙잡힌 손이 아팠다.
“그러니까….”
서호가 가감 없이 말을 뱉었다.
“정말 너무한다.”
손을 감싸 쥔 손이 꼭 족쇄 같았다. 서호가 손에 힘을 줘 윤을 떨쳐내며 말했다.
“너랑 유리가 신경 쓰이는 건 맞아.”
분명 그랬다. 그랬으니 손이 말한 바를 전해준 것도 맞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후회는 커져만 갔다. 도대체 왜 이야기한 걸까? 이런 취급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
‘아마 그럴지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윤을 조금은 믿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과 로제타의 사이를 아는 사람이니 고민을 하다가 결국 포기할 거라고, 이런 부탁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유리의 일은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하면, 모든 걸 실패했을 때를 가정하며 끝을 고하던 네가 태도를 달리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너무…, 너무 순진했다.
“…나는 여기가 좋아. 돌아가고 싶지 않고.”
서호는 한심한 스스로를 욕하며 똑바로 의사를 표시했다.
“로제타랑 있고 싶어.”
그리고 윤이 뭐라 말을 더하기 전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다시 돌아온 경우는 없잖아.”
그 어떤 기록에도 그런 이야기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었다면 윤은 진작에 그 사례를 예시로 들어서 자신을 설득하려 했을 것이다.
서호가 비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헛된 희망을 줄 셈이야?”
그러자 윤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거울이 깨진 경우도 없었잖아. 그런데 결국 이렇게 돌아갈 방법을 찾았고.”
“그래. 날 이용하는 방법이지. 그럼 나는 누굴 이용해서 돌아와야 하는데?”
서호가 메마른 눈으로 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도대체 누굴 이용해야 해?”
서호는 이왕 솔직해진 김에 하고 싶었던 말을 전부 했다.
“너랑 나는 친구도 뭣도 아니잖아.”
이런 부탁을 할 사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용하려고 나에게 접근했던 거잖아.”
유리의 일이어서, 신경이 쓰여서 도와주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도움을 넘어선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아리스를, 내 친구를 다치게 했어.”
서호는 어떻게든 이들을 도와주지 않을 이유를 찾아내고 있었다.
“유리를 만나고 일부러 무시했지만 내겐 아리스가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어.”
우리 사이는 최악이었다.
“사실 네가 유리의 아들이 아니었어도 신경 쓰였어. 어머니를 위해서 뭐든 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도 도와주려고 했었다. 어떤 방법도 없이 갑작스레 부모를 잃었던 자신과 달리 아직 무언가 시도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 결과가 이럴 줄 알았다면 같잖게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상이 유리라는 건 알았을 때는 더욱 도와주고 싶었어.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그 모든 것들은 다 무시하고.”
서호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아?”
어떻게 사람이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양심이 없는 걸까?
“같이 돌아가 달라고? 네 어머니를 위해서? 너를 믿고?”
그 말을 믿을 수 있다고 여긴 건가?
“내가 너를 어떻게 믿어? 네 모든 게 거짓이었는데.”
서호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긴, 부탁이 아닐 수도 있겠다.”
서호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날을 세웠다. 어떻게든 상대의 죄책감을 더 크게 만들어야 했다.
“내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여기서 부탁이라고 하면 그게 부탁이야? 협박이지.”
그래서 감히 이런 부탁 따위는 하지도 못하도록.
“불과 몇 시간 전 그랬던 것처럼 강제로라도 원하는 대로 하겠지. 아니야?”
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간절하게 서호를 불렀다.
“서호야.”
서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아니었다. 서호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듣고 싶어.”
내 편이 필요했다. 지금 나를 지탱해 줄 사람. 무조건 내 뜻을 따라 줄 내 사람, 로제타가 보고 싶었다.
입 밖으로 내면 너무 보고 싶을까 봐 지금껏 참았는데 그래도 정말 그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이 달싹인 그때.
“…보고 싶어.”
콰아아앙!
문이 터져나가듯 열렸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그들을 감싼 마법이 깨졌다. 그리고 몸을 붙드는 강한 힘. 따뜻하고 포근하면서도 두근거리는 품이었다.
‘왔구나.’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 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뿜어내며 나를 지켜주는….
“로제타.”
마주친 푸른 눈이 다정하게 휘었다.
“서호.”
불안하게 흔들리던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무조건적인 내 편이 이곳에 왔다.
“데리러 왔어.”
나를 구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