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29화 (129/155)

#129

아리스는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처럼 갑자기 행동을 서두르는 로제타를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아직 2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궁금한 것은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 거지?’

처음 정문을 지나칠 때만 해도 그건 당연한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무리 로제타라도 타국에 몰래 잠입한 입장인 이상 당당히 정문으로 왕궁에 들어가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래서 조급한 것 같아도 이성이 아직 남아 있구나 안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로제타는 정문을 지나고도 한참을 이동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어떤 식으로든 명령을 내려주면 좋겠는데,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내가 알아서 들어갈 곳을 찾아야 하는 건가?’

벼락같은 깨달음에 가슴이 철렁했다. 어쩌면 로제타는 반대로 자신이 멈출 곳을 정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알아서 일하는 이들을 좋아하시는 분이니까.’

아리스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뭘 하는 건지….’

서호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저도 모르게 너무 황제에게만 의지하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리스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로제타를 따라 걸어가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아니, 끌어올리려고 했다.

“뒤로 물러나.”

아리스는 의아한 낯을 했다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꺼림칙함에 두말하지 않고 훅,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리스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왕성의 벽이 사라졌다.

아리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벽이 사라져?’

로제타의 눈길 한 번에 사라진 벽을 바라보며 아리스는 헛숨을 삼켰다.

‘부식된 건가? 아니면 소멸?’

먼지조차 없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깔끔하게 뚫린 구멍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던 아리스는 그 구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마나에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아!”

마나, 아무리 성벽을 부숴 봤자 마법을 부술 수는 없었다.

‘알람 마법이랑 보호 마법 같은….’

왕궁 마법사들이 이상을 알아차리기 전 얼른 조치하려던 아리스는 벽에 맴도는 마나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마나가….’

오염됐다고 해야 할까? 자기들끼리 복잡한 배열로 엮여 있던 마나에 로제타의 신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며든 신력의 주인인 로제타를 침입자로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런 문제 없이 벽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가는 로제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아리스를 돌아봤다. 빨리 따라오라는 시선에 아리스가 재빨리 벽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번 마나를 살폈다.

‘나도 인지하지 못해.’

그러니까 마나가 전부 로제타의 권속 안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신력이라는 건 이렇게 대단한 건가?’

마법을 힘으로 망가트린 게 아니라 자연스레 흡수한다고?

이런 게 가능하다니.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끊이지 않고 명맥을 이어오던 마법과는 달리 정말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 쓸 수 있는 신력은 마법사들만이 아닌 모든 학자가 탐구하는 영역이었다.

‘이 사실을 알려주면 아주 난리가 날 텐데.’

아리스는 길을 알고 있는 건지 거침없이 걸음을 옮기는 로제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게 발을 놀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는 곳임을 알고 이리로 오신 걸까?’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황궁이 그렇듯 왕궁 역시 매우 넓은 곳이었고 그만큼 사람도 많을 테니 언젠가는 누군가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역시 마법을 쓰는 게….’

하지만 이번 역시 아리스의 생각은 불발되고 말았다. 아리스는 또 한 번 갑자기 훅 솟구치는 로제타의 힘에 몸을 긴장시켰다가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는 숨을 내뱉었다.

‘사람이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로제타를 따라 벽 하나를 지나친 아리스는 한가득 쓰러져 있는 십여 명의 병사들을 보고 침음을 삼켰다.

‘죽은 건 아니겠지?’

다행히 쓰러진 사람들의 가슴이 조금씩 들썩이고는 있었다.

‘다 죽여버리면 곤란하지.’

살짝 부딪침이 있는 건 괜찮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족족 죽이고 다니면 여러모로 뒤처리가 곤란했다. 한동안 그림자로 지냈던 아리스는 훗날 이 일을 처리할 다른 그림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일단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로 했다.

‘죽이지는 않으시니 됐지.’

자신이 뭘 하기도 전에 알아서 사람들을 처리하고 계시니 할 일도 없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보호 마법이나 알람 마법이 나타날 때마다 알아서 다 처리하고 계시고.’

몇 번을 봐도 신기한 광경을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던 아리스는 나중을 위해서 마나를 한껏 아껴두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로제타가 대뜸 자리에 멈춰 섰다. 성에 들어오고 난 뒤 처음 있는 일에 아리스가 주변을 살폈다.

혹 이번에는 한 번에 처리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누군가가 나타난 것일까?

“폐하?”

하지만 아리스의 부름에도 로제타는 한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리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데 로제타가 다시 발을 내디디며 말했다.

“화가 났군. 빨리 가지.”

자기가 화가 났다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러니까 서호가 화가 난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신력이 연결됐다더니 저런 것도 되는 건가?’

진짜 그런 능력이 있는 게 맞는 건지 모든 게 그저 약간 제정신이 아닌 황제의 착각인지는 아리스도 알 도리가 없었다.

아리스는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마음먹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불안한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로제타가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아리스에게 이야기했다.

“저곳에 서호가 있다.”

“후궁의 궁이군요.”

왕자의 뒷조사를 하면서 왕궁의 도안을 받아 봤었기에 아리스는 후궁 그레이스의 궁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궁에 비해 단출한 편이기도 하고.’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로제타가 곧장 다시 발을 내디뎠다. 아리스는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겠지.’

저 안에는 아마 왕자가 있을 테고, 왕자는 실력이 대단한 자이니 지금까지처럼 쉽게 궁을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사히 돌아가야지.’

아리스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힘껏 발을 뻗었다. 하지만 아리스는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상대 때문이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튀어나왔으나 로제타나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리스는 지친 낯으로 은발의 여인을 바라봤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는지 성력으로 몸을 감싸고 서 있는 신녀 안겔을.

은발을 눈에 담자 한번 뚫렸던 가슴팍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

“제 쪽지는 잘 받으셨나요?”

신녀 안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로제타는 그녀를 보자마자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감정의 향연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로제타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낮게 내려앉은 숨과 함께 신력이 바닥으로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형체를 가진 시커먼 연기가 빠르게 안겔의 몸을 감싼 성력을 타고 올랐다. 안겔이 그녀의 주위를 감싼 신력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화로 푸실 생각은 없으신 모양이에요.”

경고를 받은 후 신력만 보면 덜덜 떨던 여자가 오늘따라 매우 담담해 보였다. 서호를 붙잡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에는 그녀는 딱히 의기양양하다거나 거만을 떨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지도 않았지만.

신력이 조금 더 그녀를 압박하자 안겔이 성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시커먼 신력 사이로 흐릿한 빛이 뿜어져 나오다가 다시 잠식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안겔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폐하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화제를 꺼내는 게 좋겠죠. 우선 서호님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서호님을 납치한 목적부터?”

서호의 이름이 나온 순간 신력이 쿵, 하고 안겔의 성력을 때렸다. 그러자 살짝 비틀거린 안겔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건 좀 아프군요. 뭐, 이해는 한답니다. 일단 서호님은 무사히 계신답니다.”

가슴께를 부드럽게 문지르는 안겔은 꼭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여유로운 태도,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 매우 거슬렸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제가 서호님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하나예요.”

나불거리는 저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반강제적으로 끌려왔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서호님께 선택지를 드리려고요. 데려온 건 폐하 마음대로 하셨으니 돌아갈지 말지는 서호님께서 정하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신력이 안겔의 입을 찢어버리기 전 튀어나온 말에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흘렸다.

‘선택지를 주면 서호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과거였다면 분명 서호가 떠나갈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로제타는 서호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로제타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안겔이 살짝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동의하지 못하시나요? 그렇다면 폐하를 여기에 붙잡아야겠군요.”

굳이 따지자면 조금 전 웃음의 의미는 자신감과 그녀를 향한 조소였지만 로제타는 안겔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로제타는 더욱 성력을 끌어올리는 안겔을 비꼬았다.

“네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요. 무사하다니, 처음부터 제 끝은 정해져 있었죠.”

상황에 맞지 않게 매끈한 웃음을 흘린 안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제가 저지른 짓이니 알아서 마무리하려는 것뿐이랍니다. 모든 건 서호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