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28화 (128/155)

#128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여기엔 윤이 있잖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오랜 시간 윤을 희생시켰다는 걸 알아. 그 애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도 알고. 그렇지만 이곳에 남으면? 그럼 그 사람이….”

네 공포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눈이 떠올라서 무서워. 그 사람이 사랑을 속삭인 내 귀를 잘라내고 싶어.”

이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더 들었다가는 정말 거절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때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내가 원망스럽다가도 또 윤을 만났다는 걸 생각하면….”

귀를 막고 싶어 손이 꿈틀거렸다.

“윤을 너무 사랑해. 내 태양이니까. 하지만 정말 이곳에서는 살 수가 없어.”

울음 섞인 목소리가 거슬렸다. 지금 울고 싶은 건 나였다.

“가족이 보고 싶어. 엄마도 아빠도. 어린 남동생도. 내 친구들도. 내 생활이 그리워. 더 이상 사람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살고 싶지도, 윤에게 기대 살고 싶지도 않아.”

서호는 잔뜩 일그러져 있을 스스로의 얼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는 자기 감정을 토해내느라 바빠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이곳에 남게 되면 앞으로도 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야겠지. 윤의 희생 아래에서 살게 될 거야.”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짜증 났다.

“하지만 돌아가면…. 윤을 보지 못하게 되면 나는 다시 지금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될 텐데.”

그래서 도대체 남겠다는 건지, 가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자신은 그녀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윤을 너무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 애가 원망이 되는 것도 같아.”

그냥 네가 안 간다고 한마디만 하면 모두가 편해질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너를 희생시키는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말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착한 애인 걸까? 왜 그렇게 예쁘지? 왜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분명 형편없는 엄마였을 텐데 왜?”

여태껏 이기적이었던 건 너도 마찬가지고 사람은 원래 다들 이기적이기 짝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마음 편히 떠날 수도 없게….”

유리가 한 모든 말이 끈덕지게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서호가 웅웅 울리는 귀를 틀어막으려 하는데 유리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서호의 팔목에 매달렸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응?”

그 무게를 뿌리칠 뻔했다. 서호가 간신히 그 온기를 감내하고 있는데 유리가 간절하게 부탁했다.

“알려줘, 서호야.”

뭘 알려 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자식도 가족도 없는데.’

있는 거라곤 로제타뿐이었다.

‘나는 로제타랑 사이가 좋아.’

유리와 자신은 너무나 달랐다.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고 내 사람들은 전부 이곳에 있었다.

‘내가 네 심정을 알 리가 없잖아.’

그런데 정말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걸까? 서호가 그런 속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입을 다무는데 유리가 더 강하게 팔에 매달려왔다.

“…아니면 그냥 네가 나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말해 주면….”

누군가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목이 콱 막혀왔다. 제발 입 좀 다물라고, 그만 좀 하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기어코 유리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가 원해서 나랑 같이 가는 거라고…. 내가 없으면 같이 가지 않겠다고 해주면….”

“뭐?”

서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에 튀었다. 유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가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서호는 일그러진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지?’

내가 원해서 같이 가는 거라고 해달라고? 나는 가고 싶지 않다니까?

‘나는 아니야!’

어째서 내가 네 선택을 대신 해줘야 하지? 내 생각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답은 정해져 있으면서 어째서 내가 네 죄책감을 뒤집어써야 하나?

‘네가 뭔데?’

생각이 주체가 되지 않고 뻗어나갔다. 서호는 상대를 가장 상처 입힐 수 있는 이야기들을 빠르게 떠올렸다.

‘윤을 버리고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했던 게 누군데?’

윤이 슬픔에 젖어, 절망과 고통에 젖어 최후의 발악을 하게 한 건 유리와 왕이었다. 이제 와서 윤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말을 믿으라니.

‘미안한 게 아니라 같잖은 죄책감이겠지.’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금방이라도 상대를 향해 퍼붓고 싶은 날 선 말들을 서호는 정말 간신히 삼켜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유리는 아픈 애라고, 그녀 역시 피해자일 뿐이라고 몇 번이고 스스로를 붙잡을 수 있었던 건 간신히 남은 이성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말을 삼켜낼 수는 없었다. 서호는 입술을 파르르 떠는 유리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아.”

“…어?”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네 부탁은 못 들어주겠어.”

그 말을 끝으로 서호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감정도 상대의 감정도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

방으로 돌아온 안겔은 감시하듯 그녀를 바라보는 사용인들을 전부 내보냈다. 그리고 한참 무언가를 끄적이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됐나?’

서호 말고도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안겔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루미너스 왕자를 떠올렸다.

왕의 부름에 왕자는 작금의 상황을 짐작했다는 듯 별다른 반발 없이 다이앤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자리를 떠났다.

안겔은 왕자가 떠나자마자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던 다이앤을 떠올렸다.

‘신녀님께서 보내셨던 신관분들은 전부 궁에 구금되셨습니다.’

구금이라니, 신관의 처분은 신전에게 맡기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물론 정보를 빼돌리려고 한 점이 괘씸할 수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먼저 신전을 염탐한 쪽은 자기들이 아니었던가?

안겔이 그 점을 지적했다.

‘먼저 신전의 거울을 감시했던 건 여기가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

‘그럼 그들을 풀어주시죠. 경고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안겔은 가볍게 말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아무리 동맹 관계라도 주제넘게 굴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안겔을 당황하게 했다.

‘그들이 구금된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요?’

‘그분들이 구금된 이유는 그레이스님의 손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안겔은 다이앤이라는 여자가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 그녀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본래 국왕 전하께서는 본인이 허락하신 사람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 모두에게 그레이스님에 대한 접근을 금지하셨습니다. 물론 그건 신관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신관이 기도하면서 손이 조금 닿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안겔이 황당함을 표했으나 다이앤은 무심히 이야기할 뿐이었다.

‘네, 하지만 사전에 이미 손을 대지 말아 달라 부탁드렸습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죠?’

‘저희로서는 어쩔 방도가 없으니 그들을 살리고 싶으시다면 신전에 직접 연락을 넣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안겔이 헛웃음을 흘리는데 다이앤이 덧붙였다.

‘물론 그 이야기를 하려면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전부 털어놓아야 할 테니 불가능하실 테지만요.’

참, 왕자나 그 밑에 사람이나 짜증 나기 그지없는 이들이었다. 안겔은 다이앤과의 대화를 떠올리다 책상 위에 있는 편지를 내려다봤다.

‘내가 정말 못 보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원래의 자신이었다면 확실히 이 편지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왕자와 함께 이아코스 왕국으로 왔을 때 안겔은 이미 자신이 저지른 짓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그러니 장로층이나 고위층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것도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내가 보낸 이들이니 내가 해결해야지.’

자신에 대한 호의로 이 일에 자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안겔은 왕국에 있는 신관들의 구명을 부탁하는 편지를 잘 정리해 품 안에 넣었다.

그렇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무리했지만 안겔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몰랐다.

‘생각보다 늦네.’

서호에게는 하루의 시간을 주겠다고 당당히 이야기했지만 사실 안겔은 지금쯤이면 황제가 왕국에 도착해 충돌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직도 황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법사가 다쳐서 그런가? 아니면 그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없나?’

황제 쪽의 상황을 가늠해 보던 안겔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황제는 반드시 이곳으로 올 테니 굳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서호에게 생각할 시간을 많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안겔은 얼마나 될지 모르는 시간 동안 잠시 명상에 잠겨 있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겔이 번쩍 눈을 떴다.

‘왔네.’

얼핏 느껴지는 이 기운.

직접 느껴 본 적이 없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아주 작은 흔적이지만 이건 분명 황제였다. 안겔은 옅은 미소를 띠며 방을 나섰다. 기다리던 이가 도착한 듯하니 마중을 나갈 생각이었다.

‘나를 반기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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