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27화 (127/155)

#127

로제타는 모든 일을 아주 간단히 처리할 생각이었다. 다시 모든 게 귀찮아진 로제타가 품속의 책을 아리스에게 건넸다. 던진 책을 마법으로 받아 든 아리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가 신관이 준 책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순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게가 조용해졌다.

종종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조용해진 주변에 로제타가 손에 턱을 괴며 다시 서호의 기운에 집중했다. 서호의 기운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역시 기운만으로는 부족했다. 서호를 직접 만나 그를 꽉 끌어안고 그의 향기를 맡고 싶었다. 그의 체온으로 몸을 데우고 자신을 반길 눈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늦었다며 타박하는 서호의 입술을 머금는 것이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으니까 사과는 뒤로 미루자고 속삭이면 착한 서호는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상상을 이어 가자 서호가 더 보고 싶었다. 빨리 그를 만나서 그의 발에 칭칭 감겨 있을 붉은 실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왕자의 앞에서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선택할 서호를 보고 싶었다.

‘내 운명. 내 행복. 내 세상.’

심장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쿵쿵 뛰었다. 로제타는 나른하게 숨을 내쉬며 서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곧 만나러 가겠다고.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가 거슬렸다. 시간을 빠르게 감을 수는 없는 걸까?

‘한번 부탁해 볼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로제타는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20분.’

1시 40분이나 2시나 거기서 거기였다. 로제타는 새벽이 깊어감에 따라 슬슬 힘을 키우기 시작하는 자신의 신력을 느끼며 생각했다.

‘…갈까?’

정말 이 이상 참기가 어려웠다. 이쪽은 몸이 닳다 못해 타버릴 지경이었다. 얼른 서호를 품 안에 안지 못하면 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서호.’

이 정도면 충분히 기다렸다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마침 아리스 역시 건네준 책을 다 읽은 것 같으니 일어나는 게 좋겠다 마음을 다잡을 무렵, 로제타의 심장이 크게 출렁였다.

로제타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궁을 바라봤다.

‘이건…?’

로제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밀리며 큰 소리를 냈지만 로제타는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서호의 기운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바닥 아래로 깊게 가라앉는 기운.

서호의 신력이 바닥으로 내려가다 못해 땅을 파고 더 깊숙이 침잠하고 있었다.

‘…슬퍼하고 있어.’

왜? 어째서 서호가 이렇게까지 슬퍼하고 있단 말인가? 왕자나 신녀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눈가가 뜨거워졌다. 보이지 않지만 꼭 서호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감정에 동화된 로제타가 크게 가슴을 들썩였다.

“폐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로제타는 아리스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아리스에게 짧게 명령했다.

“…지금 간다.”

로제타가 해야 하는 건 이렇게 시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서호에게 달려가는 것이었다. 서호가 슬퍼하던 자신을 달래주던 것처럼 자신도 슬퍼하는 서호를 달래주고 안아줘야 했다.

“지금 당장.”

***

꿈 이야기부터 조금 전 거울 이야기까지 숨김없이 이야기한 서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다물자 다시 한번 스스로가 한 말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로 인해 자신이 감내해야 할 것들도.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욕이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해?’

왜 손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걸까? 어째서 이 일을 그냥 모른 척하지 않았던 걸까?

처음부터 유리를 만나러 오지 말았어야 했고 이들의 사정을 들어서는 안 됐다. 가해자의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고 선을 그었어야 했다.

‘네가 유리만 아니었어도….’

그레이스가 유리만 아니었어도 서호는 이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을 것이다. 모른 척,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척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겪은 일이 안타까운 것은 맞지만 자신도 중요했다. 그렇게 돌아가면 나는…?

‘다시 못 돌아오면?’

애초에 돌아올 수나 있나? 돌아가면 그대로 끝이 아닐까? 그렇다면 로제타는?

‘싫어.’

남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행복을 위해, 혹시 모를 가능성에 내 미래를 걸고 싶지 않았다.

‘도와주고 싶지 않아.’

서호는 버석한 웃음을 흘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리와 윤을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으면서 자신에게 문제가 생길 것 같자 바로 생각을 바꾸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결국에는 유리를 도와주게 될 자신을 알았다. 정말 싫지만 그녀를 외면할 수 없을 스스로를 알았다. 그런 자신이 너무 싫었다.

어쭙잖은 동정과 죄책감 때문에 모든 걸 잃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할 자신이, 마음이 약한 내가 너무 싫었다. 그러자 생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계속 윤이 원망스러웠다. 왜 자신을 납치해온 걸까? 잘 지내고 있었는데, 왜?

서호는 부러 윤과 유리를 외면했다. 이 원망 어린 시선을 보여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서호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그럼 이제 나만 결정하면 되겠네.”

정말 별것 아닌 말이었다. 처음부터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돌아갈지 말지 생각해 보라고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분명 유리는 그런 생각으로 이야기한 것일 테다.

그런데 계속 다른 쪽으로 생각이 돌았다.

‘왜 내가 도와주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데?’

나는 선택할 수 없어? 나는 네가 원하면 무조건 너를 도와줘야 해? 삐죽하게 솟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서호는 어떻게든 그 삐뚤어진 생각을 지워내려 노력했다.

유리는 이쪽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몰라?’

구체적인 상황은 몰라도 유리는 자신이 거울과 함께 납치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자신이 돌아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납치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라는 게 있잖아.’

왜 내 생각은 해주지 않는 걸까? 나는 정말 싫은 일이어도 너 때문에 이걸 밝힌 건데. 너도 내 생각을 해줄 수 있던 것 아닐까?

기어이 서호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유리를 보고 말았다. 유리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도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도 다 무시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때 그런 서호의 옆에서 윤이 작게 속삭였다.

“너는 그러고 싶지 않잖아.”

어느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유리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서호는 삐꺽거리는 고개를 돌려 윤을 바라봤다. 윤은 서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푹 숙인 고개 아래에서 소리가 계속 새어 나왔다.

“그렇게 되면 네가 너무….”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계속 흩어졌다.

“도대체 왜 이야기해 준…, 아니, 아니야. 이야기해 준 건 고마운데 그래도 이건….”

혼란이 가득한 목소리.

“강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국 이건 강제가 아닌가?”

하지만 서호는 그런 윤을 달래주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이 감정을 내뱉지 않는 것만이 서호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절대 괜찮다고, 이건 강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호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젖어 들어가는 윤을 그냥 바라만 봤다. 그렇게 각자 자기들만의 생각에 빠진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에서 다이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전하!”

사실 아까부터 귓가에서 이명처럼 계속해서 저 목소리가 들리긴 했었다. 커다란 목소리에 서호가 눈만 돌려 문을 바라봤다.

“전하!”

윤을 부르는 목소리였다. 윤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서호는 다시 그쪽에 관심을 끊어냈다. 하지만 귓가로 조용조용한 다이앤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최대한 막아 보려 했지만….”

“…알았어. 내가 만나지.”

“죄송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윤의 시선이 이쪽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은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상대에게 뭐라고 말을 걸 상황은 아니었다. 서호가 다시 무력하게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데 유리가 입을 열었다.

“서호야.”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아서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서호야.”

하지만 조금 더 커진 목소리에 서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유리와 정통으로 시선이 부딪쳤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이번에도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유리는 자기 감정에 휩싸여 서호의 원망과 분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서호는 그래서 이번에는 유리의 감정을 읽어내려 노력하지 않았다. 아예 그럴 열의가 없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감내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다.

서호가 한숨을 쉬듯 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너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잔뜩 들어간, 참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서호를 도와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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