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하지만….’
서호는 입을 다물었다. 본인이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 이상 끼어들 수는 없었다.
‘특히 윤에게는.’
유리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조금 편하게 대화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윤과는 이런 이야기를 할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중에 윤이 아니라 유리에게 한번 말을 걸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서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아 있는 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의자 덕분인지 아까보다는 숨이 차분했다.
‘사실 유리랑도 이런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니지.’
하지만 장소의 특수성이라는 게 있었다. 이 세계에서 다시 만난 친구였다. 아무리 그 친구가 제일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조언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유리에게는 괜찮아.’
그렇게 로제타나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 이 둘 사이에 끼어들 만한 적당한 핑계를 꾸며내는 서호에게 윤이 말했다.
“하나 부탁해도 될까?”
“뭘?”
잠시 머뭇거리던 윤이 부탁했다.
“혹시 손이 보이면 알려줄래?”
“손이?”
“만약 네게 보인다면…, 오래 기다리실 필요 없잖아.”
자신이 이용한 거울이었다. 그러니 기록에 따르면 서호는 당연히 손이 보이게 될 것이다.
‘만약 내가 볼 수 있는데 유리가 보지 못하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서호는 답을 기다리는 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서호는 윤에게 그런 소식을 전할 일이 없었으면 했다. 두 사람의 희망을 꺼트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고작 10초나 지났을까?
서호의 눈에 이상한 형상이 잡히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 아른거리는 형체.
‘저건…?’
거울 너머 뿌옇게 피어나는 연기 같은 그것이 서서히 형체를 잡았다. 찰흙을 빚어내는 것처럼 여러 모양으로 변하던 것이 이내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하얀 손.
꿈에서만 보던 것이 거울 너머 나타나 서호를 돌아봤다. 서호는 덤덤히 그 손을 쳐다봤다. 기록이 틀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지.’
과연 유리는 저 손을 볼 수 있을까? 서호의 눈이 기민하게 유리의 모습을 훑었다.
하지만 뒷모습이라서 그런 건지, 서호는 유리에게서 별다른 변화를 읽어낼 수 없었다.
‘너무 놀라서 굳었나?’
오래 보지 못했던 손이 갑자기 나타나 많이 놀랐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아무리 기다려도 유리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못 본 척하는 거야?’
윤에게 미안한 마음에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못 본 걸 수도.’
서호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노려보듯 거울 속 손을 바라봤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하얀 손은 서호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울 한가운데에 나타나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서호의 시선이 닿자 손이 기다렸다는 듯 더 크게 흔들렸다.
다시 한번 이 손을 볼 수 있는 게 자신뿐이라는 게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서호가 입안의 살을 잘근잘근 씹던 그때 손이 집중하라는 듯 강하게 거울을 내리쳤다.
‘무슨?’
서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거울을 바라보는데 손이 거울에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호는 손이 쓰는 글자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손이 꿈에서 이미 한번 했던 말.
‘같이.’
서호가 멍하니 눈만 끔뻑이는데 손이 거울 앞에 서 있던 유리를 쿡 찔러 가리켰다. 그제야 서호는 조금 전 느꼈던 기시감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꿈에 나왔던 그 여자가….’
절로 입에서 바람이 샜다. 서호는 재빨리 입을 다물고 슬쩍 윤의 눈치를 살피다가 윤이 시선을 느끼기 전 얼른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바라봤다. 손을 조금쯤 원망할 뻔했는데 손은 여전히 유리를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꿈에 유리를 등장시킬 만큼.
‘그럼 무슨 방도가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직접 모습까지 드러내 가며 유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안도는 잠시였다.
‘같이 뭘 어쩌라고?’
유리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는 걸 보면 유리와 관련된 뭔가를 시키려는 것 같았다.
손이 조금 전과 달리 가볍게 거울을 톡톡 건드리더니, 매우 느리게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서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이 거울에 끄적이는 문장에 집중했다.
‘네가 같이….’
서호는 손이 만들어내는 문장을 보며 입술을 떨었다.
‘…데리고 와야 해.’
서호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방금 손이 한 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조금 전 손이 만들어낸 문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정확히는 작게 들려오는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참으려 애쓰지만 그럼에도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서호는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유리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윤을 바라봤다. 윤의 얼굴은 어둡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소리 내어 울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울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뻔했다. 서호는 여전히 방금 손이 말한 것을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씩 떨리는 유리의 어깨와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이를 악문 윤. 서호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봤어.”
서호는 미동도 하지 않는 유리와 그를 돌아보는 윤의 시선을 느꼈다. 서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윤을 바라봤다.
“내가 조금 전에 손을 봤어.”
서호는 잔뜩 흔들리는 윤의 금안이 감기기 전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유리를 가리키며 하는 말도 봤고.”
“…뭐?”
“내가.”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이대로 입을 다문다면 훗날 후회하게 될 스스로를 알았다.
그래서 서호는 그 말을 내뱉었다.
“내가 같이 가면 되나 봐.”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서호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
로제타와 아리스는 궁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가게를 무단 점거 하는 중이었다. 바로 궁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로제타의 말에 아리스가 마법으로 잠겨 있던 가게의 문을 연 것이다.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잡은 로제타는 커다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궁을 바라보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서호는 아직 괜찮아.’
하지만 자신은 괜찮지 않았다. 로제타는 아무리 서호의 기운을 느껴 봐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스스로를 인지하고 있었다.
‘시간도 참 더럽게 안 가네.’
로제타는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기 위해 아까 전부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로제타가 그를 돌아보자 아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만 치켜세우자 아리스가 로제타의 입술을 가리켰다.
“서호님이 보시면 걱정하실 겁니다. 물론 벌써 많이 나으셨지만요.”
그 말에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로제타는 그제야 자신의 입술이 찢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로제타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아리스가 마법을 사용했다. 간단한 마법이었기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입술이 멀쩡해진 것을 확인하듯 눈을 가늘게 떴던 아리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째서 바로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아마 조금 전에도 묻고 싶었던 건 이쪽이었을 것이다. 답답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서호가 있는데 곧바로 그를 만나러 가지 못하다니.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내 힘이 제일 강해지는 건 새벽이니까.”
“…그러니까 휴식이 아니었던 거군요?”
아리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이었다.
“그럼 저희는 몇 시쯤 움직이면 될까요?”
로제타는 시계를 바라봤다.
“적어도 2시는 돼야지.”
서호의 기운이 잠잠했으니 조금 더 시간을 끌어도 괜찮았다. 그 말에 시간을 살피던 아리스가 그럼 앞으로 1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 거냐며 경악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루트가 건넨 책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까?”
“대충 짐작하고 있을 텐데?”
“그렇긴 하지만….”
원래라면 대충 책을 던져 줬겠지만 시간을 끌기 위해서는 별수 없었다.
“서호와 같은 존재들이 다시 그들의 세상으로 돌아간 사례가 적혀 있더군.”
“…몇 명이나 됩니까?”
불안한 듯 돌아온 답에 로제타가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전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달싹거리던 아리스가 로제타의 비틀린 웃음을 살피며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서호님은 그러지 않으실 거라고 확신하시는군요.”
로제타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상, 서호가 원치 않는 이상 그는 자신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아리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런데 왕자는 왜 서호님을 데려간 걸까요?”
“발아래 꿇려 놓으면 답을 하겠지.”
거리낌 없는 로제타의 말에 아리스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부산스레 굴기 시작했다.
들어가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면 좋겠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바로 서호를 찾으러 갈 건지, 어떤 식으로 서호를 찾을 생각인 건지, 마주친 병사들의 처리는 어찌할 건지 등등 묻는 게 너무 많았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