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확실히 내가 방을 나가면 불안해할 것 같기도 하네.’
제대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같은 방에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윤이 다시 유리에게로 다가갔다.
서호는 윤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그들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유리가 불안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서호가 그녀를 달랬다.
“여기 있을게. 지금은 윤이랑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말에 유리가 입술을 깨물더니 윤을 바라봤다. 윤이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윤은 처음과 달리 서호가 당부한 대로 자세하게, 찬찬히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앞으로 유리가 선택해야 할 게 무엇인지, 이번 일의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자신과 윤의 관계와 거울을 어떻게 얻었는지까지도 숨김없이 전부 설명하는 윤을 보며 서호는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까지 다 할 줄 몰랐는데.’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을 납치한 대목에서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안절부절못하는 유리를 향해 작게 웃어준 서호는 다시 윤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정말 미워할 수는 있어도 싫어할 수는 없겠네.’
유리의 아들이라 모호해졌던 경계가 더욱 흐려지고 있었다. 이건 정말 로제타에게는 할 수 없을 말이었다.
***
짧지 않은 설명이 끝이 나고 윤이 유리에게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유리가 창백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이해했어.”
느리지만 그래도 담담하게 답이 돌아오자마자 윤이 조금 서두르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확인?”
“거울에서 손이 보이는지 확인하셔야죠. 만약 손이 보이신다면 가능성이 생기는 거니까요.”
“…지금 당장?”
유리가 입술을 깨물며 윤을 바라봤다. 그 얼굴에는 윤을 향한 그리움과 애정, 그리고 슬픔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숨길 생각이 없는 그 감정을 윤 역시 읽었음이 분명한데 그는 그것들을 보지 못한 사람처럼 냉랭하게 답했다.
“네. 가능성이 없는데 고민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말을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유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그래, 알았어.”
유리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것처럼 몸에 힘을 줬다. 서호는 움찔 떨면서도 그래도 꿋꿋이 자리에 서 있는 윤을 쳐다보다가 앞으로 나섰다.
서호의 도움을 받은 유리가 고맙다는 듯 눈인사를 하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 한쪽에 자리한 거울로 다가갔다.
서호는 발끝까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은 유리를 부축해 그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침대에서 일어나니까….’
이제 와 깨달은 건데 유리가 입고 있는 옷은 잠자리 옷이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재질은 아니었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였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외출복에 비해 얇은 옷.
‘역시 나보다는 윤이 부축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윤은 여전히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로를 신경 쓰는 건 확실해.’
두 사람 모두 꼭 겁을 먹은 것처럼 전혀 서로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창백한 유리의 얼굴을 훔쳐보던 서호는 문뜩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지금의 유리를 본 건 분명 처음이 맞는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전 유리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혼자 갈게.”
자신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자리에 서려고 하는 유리에 서호가 천천히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 유리가 서호의 손을 강하게 붙들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그러면서 서호의 뒤를 쳐다보는 유리에 서호는 지금 유리가 윤을 대신해 자신에게 사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까 윤이 자신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아들을 대신해 사과하고 미안함을 담아 어색하게 웃는 유리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새삼스레 유리가 윤의 어머니라는 것이 와 닿았다.
‘윤이 유리의 아들이라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였었는데.’
서호가 한숨을 삼키며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유리가 조금 더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감사 인사를 한 유리가 거울을 향해 홀로 걸어갔다. 고작 열 발자국이 될까 말까 한 거리였지만 서호는 혹여나 유리가 넘어질까 불안했다. 비틀거리는 몸이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넘어지려는 낌새라도 보이면 금방이라도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리의 주변으로 묘한 공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다가온 윤이 흘리듯 말했다.
“고마워.”
“응?”
서호는 유리의 곁에 느껴지는 저 이상한 공기가 윤의 마나라는 걸 깨달았다.
‘너도 걱정하고 있구나.’
쉽게 유리에게 다가가지도, 친근하게 말을 붙이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윤은 유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돌아본 윤의 얼굴에는 불안함, 초조함, 걱정 그리고 약간의 희망이 보였다.
‘저게 무슨 뜻일까?’
거울이 제대로 작동했으면 하는 마음? …아니면 그 반대? 어쩌면 그는 모순된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 윤이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아?”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서호는 윤이 무슨 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너를 두고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답을 듣고 싶은 걸까? 그도 아니면 그녀가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걸까?
서호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이 일이 실패로 돌아간다는 가정 끝에 말하던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서호는 꽉 막힌 것 같은 가슴을 두드리고 싶었으나 그 답답함을 숨기고 아무것도 읽지 못한 척 답했다.
“글쎄, 뭐든 선택지가 넓어지는 건 좋은 일이니까.”
윤은 유리의 행복을 원하고 있었다. 자기가 불행해지더라도 유리가 이곳을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 서호의 답에 윤이 흐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랑 비슷한 말을 하네.”
“그때?”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이 유리 쪽으로 고갯짓했다. 고개를 돌리자 꼿꼿하게 허리를 편 유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전혀 비추지 않는 거울.
유리가 버거운 듯 조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서호는 유리도, 그녀의 뒤쪽에 서 있는 자신과 윤도 비추지 않는 거울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얼굴이 비쳤으면 유리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일어나자마자 여러 이야기를 들은 유리가 걱정됐다. 작게 한숨을 쉰 서호는 다시 방을 둘러봤다. 도대체 거울 앞에 얼마나 서 있어야 손이 나오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니 적어도 한동안 유리는 거울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앉을 만한 의자가….’
마침 적당한 의자를 발견한 서호가 윤을 톡 건드리며 의자를 가리켰다. 그러자 윤이 의아한 낯으로 서호를 쳐다봤다. 서호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저 의자 가져다줘.”
“…뭐?”
“오래 서 있어야 하잖아.”
왜 네가 하지 않고 나를 시키냐는 그 표정에 서호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답했다.
“네 팔뚝을 봐.”
서호는 로제타의 것만은 못하지만 자신의 것보다는 훨씬 더 두꺼운 윤의 팔뚝을 지적했다. 그러자 윤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서호가 다시 한번 보란 듯 손을 들어 올리며 윤을 재촉했다. 그러자 윤은 자기가 봐도 그보다 덩치가 작은 서호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시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의자를 가지러 떠났다.
‘그래야지.’
만약 여기서 윤이 또 한 번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면 곤란할 뻔했다.
‘내가 정말 의자를 못 들어서 부탁했겠어?’
서호는 그저 윤과 유리가 부딪칠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것뿐이었다.
‘서로에게 조금만 더 솔직해지는 게 좋잖아.’
서호는 의자를 들고 다가온 윤에게 유리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윤이 살짝 미간을 좁히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유리에게 다가갔다.
윤이 의자를 내려놓는 움직임에 뒤를 돌아봤던 유리가 그녀의 바로 뒤에 있는 윤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윤아.”
하지만 윤은 서호의 기대와는 달리 따로 말을 붙이지 않고 다시 몸을 돌리려고 했다. 유리가 그런 윤의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이미 반쯤 몸을 돌린 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흡사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나 동시에 분노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표정이었다.
‘복잡 미묘하네.’
윤의 얼굴에는 그녀를 향한 여러 감정이 잔뜩 섞여 있었다. 하지만 유리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릴 때 윤의 얼굴은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까닥, 고개를 끄덕인 윤이 다시 서호의 옆으로 다가왔다. 멀어지는 윤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던 유리는 윤이 그녀를 돌아보기 전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참 똑같은 모자야.’
서호가 할 말 많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는데 윤이 작게 속삭였다.
“…뭘 생각하는지 아는데 그러지 마. 서로를 위해서라도 데면데면한 게 좋아.”
글쎄. 오지랖이지만 서호는 만약 이게 두 사람의 마지막이라면 오히려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가슴에 남은 감정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
헤어지고 난 뒤의 슬픔이 걱정되고 서로의 상처가 미안해 입을 다문다면 다시 서로를 볼 수 없게 됐을 때 지금보다도 더 공허하고 슬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