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신력만큼이나 마나도 아름답네.’
이불 위에 올라와 있던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걸 발견한 서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호가 그렇듯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천천히 침대로 다가가며 말했다.
“…예상보다 더 빠르네. 곧 일어나실 거야.”
그리고 더해진 말.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그리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슬프면서 한편으로는 후련해 보여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기뻐하면서도 슬퍼하는, 애정과 함께 증오가 엿보이는 금안이 안타까웠다.
윤도, 유리도.
여러 감정이 뒤섞여 시커멓게 가라앉은 윤의 눈을 바라보던 서호는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막 빛을 눈에 담은 검은 눈을 마주했다.
깜빡거리며 허공을 수놓던 마나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호는 유리와 윤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눈을 깜빡일수록 몽롱하던 눈동자가 점점 맑아지고 이내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누워 있던 이에게서 끊어질 듯 얇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아?”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기에 사용하지 않은 목이 불편한 것 같았다. 서호는 한곳에 있는 물잔과 주전자를 발견하고 몸을 돌렸다.
물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윤과 유리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무색하게 두 사람은 그리 애틋한 재회의 순간을 나누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인사도 뭣도 없는 딱딱한 말투에 놀란 서호가 주전자를 들어 올리다 말고 그를 쳐다봤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다른 거울을 찾아왔습니다.”
“…….”
“기회는 이번 한 번뿐입니다. 원래 사용하시던 거울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할지도 확신할 수 없고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서호는 흐려지는 유리의 얼굴과 건조하게 들리는 윤의 목소리에 한숨을 삼키며 마저 물을 따랐다.
“그래도 이건 기회입니다. 불확실한 기회이지만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말은….”
막 잠에서 깨어난 유리는 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결국 서호는 잔을 들고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윤이 하고 싶은 말은 유리, 네가 원한다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 시도해 보자는 거야.”
윤이 놀란 얼굴로 서호를 돌아봤다. 마찬가지로 깨어나고 난 뒤 윤만 보이는 것처럼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유리 역시 서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호를 쳐다봤다. 서호가 그런 윤과 눈을 한 번 맞추고 유리 쪽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에게 들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지?”
유리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했다. 잠에서 깨어나고 나니 갑자기 나타난 동창생이라니. 그것도 오래전에 헤어진.
‘정말 깬 건 맞는지, 여기가 현실인지 헷갈리겠지.’
서호는 허리를 숙여 그녀를 살짝 일으켜 입가에 물잔을 대줬다. 물을 받아 마신 유리가 물잔이 떨어지자마자 작게 속삭였다.
“…서호야.”
부르면 사라질까 두렵다는 듯, 어느새 유리의 손은 서호의 옷자락을 세게 붙들고 있었다.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움켜쥔 손에 옷이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서호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다정하게 토닥였다.
“그래. 나야.”
“…어떻게? 네가 왜 여기….”
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하려면 길어.”
유리가 서호를 그녀 쪽으로 잡아당겼다. 서호가 버티지 않고 몸을 더욱 숙여주자 유리가 비밀을 속삭이는 사람처럼 작게 이야기했다.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너무 연락이 안 돼서 네 집에 찾아갔었는데.”
물론 방이 조용했기에 윤이 충분히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게 뻔했다. 서호는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유리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서호의 얼굴을 훑으며 물었다.
“너도, 너도 여기 왔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유리의 눈에 안타까움과 동질감이 가득해 보였다. 서호가 그녀처럼 힘들었을 거라고 지레짐작한 게 분명했다. 아무리 유리를 달래 준다고는 하지만 그 시선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다. 서호가 고개를 저었다.
“난 온 지 일 년도 안 됐어. 시공간이 조금 달랐던 것 같아.”
대놓고 난 잘 지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서호는 그저 그가 이곳에 머문 지 얼마 안 됐다는 사실만을 밝혔다. 그러자 유리의 얼굴에 다시 한번 당혹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서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유리의 손등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혼란스러운 걸 알아.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조금 쉬는 게 좋겠어.”
홀로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놀란 건 유리만이 아니었고, 서호는 뒤에 있는 윤도 신경 쓰였다.
‘진작 말했어야 했나?’
하지만 직접 자신들이 대화하는 걸 보지 않는 이상 윤이 그 말을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겠지. 어떻게 자기 엄마랑 내가 친구라는 걸 믿겠어.’
서호 자신도 실제로 유리를 보지 않았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호는 천천히 그의 옷을 붙잡은 유리의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유리가 다급하게 다시 손에 힘을 주려고 했다. 서호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사라지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유리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서호는 몸을 돌리지 않고 뒷걸음질 치듯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서호의 어깨를 붙잡은 윤이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뭐야?”
역시 꽤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서호는 유리에게 했던 대로 차분함을 가장했다.
“네 어머니의 친구?”
“그게 무슨….”
서호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서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거울이 대단하긴 한가 봐. 운명의 상대를 위해 시간대까지 틀 정도로.”
상대가 어느 시간대에 있든 실만 연결되어 있으면 상대를 불러올 수 있었다. 서호가 유리를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유리가 진정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그사이에 이야기를 해도 괜찮아.”
서호를 따라 유리를 돌아본 윤이 멈칫 몸을 굳히더니 거칠게 서호의 어깨를 붙들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서호가 윤에게 제안했다.
“저쪽으로 갈까?”
바로 침대가 보이는, 그리 멀지 않은 벽을 가리키자 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호는 그와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유리에게 미소를 흘리며 윤에게 말했다.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어.”
“제대로 된 설명을 듣고 싶어.”
“말 그대로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어. 아, 고등학교가 뭔지 알아?”
“…알아.”
“한때 같은 반이었고 반장, 부반장이었지. 그리고 몇 년 보지 못했다가 내가 이곳에 오기 몇 달 전에 유리를 다시 만났어.”
윤이 반장이나 부반장이라는 말을 알지는 모르겠지만 서호는 그냥 말을 이었다. 하나하나 설명해주다 보면 끝도 없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친구도 잃어서 외롭고 쓸쓸하던 때에 과거의 인연을 만난 게 좋았어. 사람처럼 사는 것 같았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윤의 눈이 조금 커졌지만 서호는 그걸 보지 못한 척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와 달리 꽤 가까워졌지.”
그 말에 다시 한번 모호하게 변하는 윤의 표정에 서호가 재빨리 덧붙였다.
“정말 친구였어.”
서호가 단호하게 이야기하자 윤이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질문했다.
“시공간이 다르다는 건 무슨 말이야?”
서호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말 그대로야. 나는 몇 달 전에 왔잖아. 지금 나는 스무 살이고. 그런데 유리는 스물한 살에 이곳에 도착했다며. 그리고 나보다 24년 전에 이곳에 도착했고.”
시간대가 많이 달랐다. 그리고 그건 매우 놀라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아무튼 조금 더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 거 같긴 하네. 유리랑 내가 같은 시간대의 사람이니까. 갑자기 미래로 돌아가서 혼란스러워할 확률은 줄어들었겠지.”
거울은 신기한 힘을 가졌으니 돌아가도 본래 자기가 사라진 그 시간대에 바로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능성일 뿐이었다.
자신이 사용하던 거울이니 다른 시간대에 떨어질 가능성 역시 충분했다. 그러니 서호와 유리가 같은 또래라는 건 여러모로 좋은 소식이었다.
그 말에 윤의 시선이 다시 거울로 향했다. 서호는 말없이 거울만을 바라보는 윤을 잠시 기다려 주다가 그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유리에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는 건 어때?”
조금 전 딱딱하던 윤의 말투가 걸렸다. 둘 사이의 일은 서호가 간섭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 모두가 신경 쓰였으니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었다.
“이해할 수 있게, 제대로 생각할 수 있게 말이야.”
“그건….”
흔들리는 얼굴을 보며 서호가 문을 가리켰다.
“내가 없는 게 편하겠지? 다이앤을 불러주면 나는 방으로 돌아갈게.”
어떻냐고 눈썹을 들고 그를 바라보는데 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응?”
역시 이건 조금 오지랖이었을까? 그때 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옆에 있어 줘. 어머니나 나 모두에게 그게 좋을 것 같아.”
윤이 다시 유리를 바라봤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윤과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가 보였다. 아들인 윤도 보고 싶지만 과거의 흔적인 자신에게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게 훤히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