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리스가 곤란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며 말을 더했다.
“다만 늦은 밤이라 그런지 말을 구할 만한 곳이 없으니 조금 걸으셔야 할 것 같은데.”
걸어가기에는 좀 먼 거리이기에 아리스가 로제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제타는 별다른 말 없이 아리스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거 조금 걷는다고 다리가 아플 만큼 몸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아직 밤이었다.
‘어차피 새벽이 될 때까지는 왕궁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니.’
아까도 말했지만 로제타는 더는 방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그의 힘이 최고조가 되는 때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의 가운데 이름 ‘오로라’가 가장 빛나는 새벽.
로제타는 작게 흔들리는 서호의 신력을 느끼며 걸어 나갔다.
***
서호는 윤 덕에 완전히 잊고 있던 주제를 상기했다.
‘돌아가고 싶냐고?’
아니, 자신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유리를 보고 난 뒤 그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정말 고마웠던 친구인데 그녀를 보기 전까지 전혀 떠올리지도 못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교류를 하던 친구였기에 그녀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이곳에 오고 난 뒤는 그녀를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나는 충만했어.’
시작부터 그랬다. 처음 로제타의 커다란 감정을 직접 느꼈기에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로제타는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두고 떠난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은 절대 그 애정을 놓을 수 없었다.
과거에 얽매여 더 큰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곳은 자신의 세상이 아니었다. 문화가 바뀐다는 건, 세상이 바뀐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난 여기가 좋고 이곳의 사람들이 좋아.’
그들이라면 자신이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서호는 명확하게 답을 내렸다. 이것은 후회 없는 선택이고 바뀌지 않을 결정이었다.
모호하게 머릿속을 맴돌던 결론을 말끔히 정리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호는 고개를 돌려 윤을 바라봤다.
‘유리의 아들이라고.’
유리와 닮은 곳이 전혀 없는 윤을 보자 정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누가 20년도 더 전에 이곳에 온 사람이 내 친구라고 생각하겠어.’
거울은 공간만이 아닌 시간도 초월하는 정말 특별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냥 감회에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그러했고 지금 서호의 상황이 그러했다.
서호는 조금씩 떨리고 있는 유리의 눈꺼풀을 바라봤다.
‘돌아가는 게 최선일까?’
다이앤에게 들은 유리의 과거는 어두웠다. 하지만 모든 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윤이 있고 다이앤이 있잖아.’
분명 유리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행복한 사람은 전혀 없어 보였다. 다이앤의 말에 따르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볼 수 있는 왕마저도.
‘정말 그렇다면 유리가 돌아가는 게 모두를 위해 좋은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쿡쿡 쑤시는 머리를 부여잡는데 돌연 윤에게서 질문이 날아왔다.
“이 시간이면 원래 잠들 시간 아니야?”
서호는 고개를 들어 막 자정을 넘긴 시계를 바라봤다. 확실히 평소라면 잠들 시간이었다. 서호는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윤을 돌아봤다. 이런 이야기를 윤에게 한 적이 있나 싶었지만 서호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는 것도 우습지.’
이유가 있었다지만 제국을 넘어 왕국까지 자신을 납치한 사람에게 그런 질문을 해봐야 의미가 없었다.
‘나를 훔쳐본 전적도 있으니까 내 생활 패턴을 아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하지도 않았기에 서호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답했다.
“많이 잤잖아.”
“…아.”
무심하게 돌아간 답에 윤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양심이 있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통쾌한 것과 별개로 서호는 시작된 대화를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너는 피곤하진 않고?”
“그, 괜찮아.”
“먼 거리를 이동한 건데 대단하네.”
서호는 그의 세상에는 없었던 마법과 신력이라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아리스와의 수업에서 마법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한 편이었다. 그래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윤이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아리스는 자기도 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허세였는지 아니면 당당한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진짜 가능했다면 진작에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로제타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아리스의 몸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그가 자신에게 허풍을 떤 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벌써 자신을 구하러 왔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게 허풍인 쪽이 제일 좋지.’
아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두 사람이 다친 것보다야 차라리 아리스의 능력이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 게 더 나았다. 아리스를 떠올리자 애써 무시하고 있던 감정이 크기를 부풀렸다.
원망. 그걸 읽었는지 윤이 눈치를 보며 사과를 했다.
“미안.”
“나보다는 아리스에게 미안해해야겠지.”
윤이 곤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마 황제가 발견했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아직 로제타처럼 능수능란하게 신력을 다루지 못하는 서호는 자신이 아리스를 완벽하게 치료했을 거라는 확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랬어야지.”
서호의 답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윤이 그런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화제를 바꿨다.
“어머니가 곧 깨어나실 것 같아. 마나가 거의 다 흩어졌거든.”
그 말에 서호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의식적으로 느껴 보려고 하니 알 것 같았다.
‘처음보다 숨쉬기가 편해.’
서호가 어깨에 힘을 풀며 윤에게 물었다.
“바로 말씀드릴 거니?”
“그래야지. 깨어나고 혼란스러워하시겠지만 시간이 별로 없거든.”
서호는 덤덤한 척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윤의 얼굴을 외면하듯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거울이면 다 되는 거야?”
저 거울은 유리가 이 세계로 넘어올 때 사용했던 거울이 아닌 자신이 이용한 거울이었다. 아무리 두 거울이 같은 기능을 가졌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유리가 이걸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할 수는 없었다.
윤이 작게 침음을 내뱉으며 답했다.
“아마 괜찮을 거야.”
모호한 답에 서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기록이 없어?”
“거울이 깨진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니까.”
윤이 웃음을 지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누가 봐도 가짜인 것을 눈치챌 정도로 허술한 웃음이었다. 서호가 답답함에 따지듯 물었다.
“제대로 된 확신도 없으면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이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어.”
그 말에 담긴 절망을 읽은 서호는 그를 타박할 수 없었다. 서호와 윤 중 유리를 더 걱정하는 사람은 윤이었으니까. 윤이 유리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거울이 사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움직인 거고. 네가 돌아가기 전까지는 통로가 열려 있을 테니까.”
윤이 서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게다가 네가 어머니와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고 봐야지.”
하지만 그 말과 달리, 서호는 만약 자신이 유리와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윤이 지금과 같은 시도를 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건 마지막 발버둥이었던 거구나.’
유리만큼이나, 어쩌면 유리보다 더욱 깊게 절망하고 체념한 것 같은 사람. 서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꿈을 이용하지 않아도 돌아갈 방법이 있는 거야?”
“이곳에 온 뒤로 거울을 마주 본 적은 몇 번이나 돼?”
서호가 기억을 더듬었다.
“초반을 제외하고는 딱히 관심이 없었어. 파티션 너머에 가려져 있기도 해서 있다는 걸 까먹은 날이 더 많았고. 대략 대여섯 번쯤?”
유리를 떠올리지 않은 것처럼 거울에 대한 것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가 주는 관심과 애정이 너무 황홀해서 다른 건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정말 몇 번 안 되네. 기록에 따르면 이방인이 거울 앞에 서 있으면 거울 속에서 흰 손이 나타난다고 해. 꿈에서 본 흰 손을 거울 속에서 몇 번 본 적 있다는 기록을 끝으로 사라진 이방인이 있거든.”
“그걸 이용해 보겠다고?”
“응.”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론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서호가 긴 망설임 끝에 질문했다.
“…만약에 안 되면?”
그러자 윤이 생긋 웃었다.
“그때야말로 최후의 수단을 써야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눈꼬리까지 곱게 접은 아름다운 웃음이었지만 서호는 그 웃음에서 꺼림칙함을 느꼈다.
“최후의 수단?”
되묻는 자신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윤이 서호를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닐 테니까.”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이 일이 실패하면 그는 무슨 짓을 저지를까?
서호가 계속해서 상상되는 최악의 결말을 지워내려 애쓰는데 침대 아래에서 빛과 함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약하고 은은하게 빛을 내며 선을 드러내던 마법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환한 빛을 머금었다. 황금빛으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빛무리가 침대 주위를 가득 채우더니 이내 그 위에 누워 있던 유리를 감쌌다.
유리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빛들은 황홀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