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22화 (122/155)

#122

로제타는 사방으로 퍼지는 마나를 갈무리하는 아리스를 힐끗 바라봤다. 멀쩡한 척했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자신과 달리 생각이라는 걸 하는 아리스 덕에 여태껏 안겔과 왕자, 그리고 사브리나 공작이 숨기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비밀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된 이후부터 이쪽은 거의 다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그랬기에 로제타는 조금 더 차분해진 상태였다. 여전히 감정은 들쑥날쑥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적당히 냉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나자 로제타는 왕자의 목적이 궁금해졌다.

‘안겔은 날 엿 먹이기 위해 서호를 이용했어. 그럼 그 왕자의 목적은 뭐지?’

거울을 이용해야만 이방인들을 돌려보낼 수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왕자의 말대로라면 왕국에는 정말 또 다른 거울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굳이 제국까지 찾아와 자신의 경계를 사면서까지 서호에게 접근하고 거울을 훔친 걸까?

‘서호를 데려간 건 온전히 안겔 때문인가?’

안겔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서호를 데려갔던 거라면 그가 왕국으로 간 이상 그 목적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면 오히려 서호를 구하기는 더 쉬워질 텐데.’

하지만 그 외에 자신이 모르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일은 복잡해질지도 몰랐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왕자의 어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이방인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절차가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이상 다른 곳에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제 로제타가 해야 하는 건 당사자를 찾아가는 것뿐이었다.

‘공기가 불편하군.’

얼른 서호를 구출해서 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물론 서호를 구하고 난 뒤에는 사건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을 싹 다 정리할 것이다.

로제타가 마법의 흔적을 전부 지우고 그의 옆으로 다가온 아리스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보고했다.

“짐작하셨겠지만 여기는 이아코스 왕국의 수도입니다. 마나를 전부 처리했으니 저희가 왕국에 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왕궁 내에서 저희 모습을 숨기긴 힘듭니다.”

그곳에도 왕궁 마법사들이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왕궁은 저쪽입니다.”

아리스가 골목 너머, 아주 작게 보이는 뾰족한 무언가를 가리켰다.

왕궁에 있는 탑 중 하나였다. 평민들은 하루를 끝낸 듯 몇 개의 가로등을 제외하면 주변은 어두웠지만 왕궁만큼은 다른 곳과 달리 여전히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역의 나라답게 부유한 왕국은 제국처럼 빛이 꺼지지 않는 궁을 가지고 있었다. 왕궁을 살피던 로제타는 그의 신력이 또 한 번 반응하는 걸 느꼈다.

여태까지처럼 그의 감정에 동요한 것이 아니라 신력이 스스로 자신의 반쪽을 감지한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리스가 가리킨 곳에서 서호의 신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괜찮아. 몸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력이 조금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위협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위협을 당한다면 신력이 알아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능숙하게 신력을 다룰 수 없는 서호는 납치를 당할 당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대신 아리스를 살리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서호는 그 자신 외에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무사할 거야.’

서호의 신력을 느끼고 그가 무사함을 확신하자 콱 막히던 숨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안도가 흘러나오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너무 기뻐서, 곧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울음을 참아냈다. 기뻐하고 감격하는 건 너를 만나고 난 뒤로 미뤄도 괜찮았다. 지금은 그저 어떻게 해야 조금 더 너를 빨리 만날지를 고민해야 했다.

로제타는 왕궁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아리스를 돌아봤다. 왕궁에 도착하기 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실수를 두 번 할 수는 없지.’

이미 스스로를 너무 믿어 문제가 일어난 적이 있으니 이번은 확실하게 차선책을 마련해야 했다. 로제타는 그의 시선이 닿자마자 바짝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아리스를 미심쩍게 바라봤다.

‘문제는 명령을 잘 따를 거냐는 건데.’

푸티도 아니고 스스로의 목숨도 중요히 하는 것 같으니 눈치가 있는 이라면 시키는 대로 하긴 할 것이다.

“마법사 아리스.”

“네.”

“왕궁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 당부하지. 나와 서호가 신력을 나눠 가지면서 문제가 생겼어.”

정확한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꼭 해둬야 할 이야기였다.

“그와 내 몸이 연결된 것 같더군.”

“…연결이요?”

로제타는 아리스가 깨어난 이후, 자신과 관련된 것을 보고받았는지 아닌지를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정도로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서호의 몸에 이상이 생기니 나도 함께 영향을 받더군.”

“그 말은….”

아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니 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서호를 붙잡고 바로 제국으로 돌아가도록 해.”

아리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같잖게 나를 살리겠다고 헛발질하지 말고 서호를 데리고 이동하란 소리야. 나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괜히 자신을 구하겠다고 서호에게서 시선을 뗐다가 이번처럼 왕자가 서호를 데리고 이동이라도 한다면 일이 복잡해졌다. 서호가 가진 신력은 남을 구하고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에는 적당한 힘이었지만 공격용으로는 부적절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남는 게 나아.’

물론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게 제일이었고 최대한 방심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려고 하겠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몰랐다. 로제타가 아리스를 재촉하듯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요. 서호님이 또 공격을 받는 것보다는 그분께서 안전한 곳에 있는 게 모두에게 좋겠습니다.”

귀찮게 말을 보태지 않아도 알아서 적당히 해석을 끝내니 편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리스에 로제타가 한 가지 더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신력을 쓰게 되면, 그러니까 내가 폭주하게 되면 적당히 도망가도록 해. 서호가 그 상황을 보지 못하게 시야를 가리는 것도 잊지 말고.”

“시야를요?”

“서호가 충격받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자신의 힘에 다른 이들이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면 서호는 분명 크게 놀라고 어쩌면 자신을 피할지도 몰랐다.

‘안 그럴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이해했습니다. 또 당부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고개를 저으려던 로제타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언급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 모르니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로제타의 흉흉하게 빛나는 눈이 아리스에게 닿았다.

“폐하?”

서호를 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들끓는 감정을 완전히 억누를 수 있을 만큼 인내심이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또 한 번 자신의 앞을 막는다면 그 끝은 정해져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안겔이나 왕자가 정도 이상으로 방해한다면 죽여.”

아리스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래도 됩니까?”

“그래.”

신전이나 이아코스 왕국에서 시끄럽게 입을 놀리겠지만 신전은 본래 자신에게 약한 곳이었고 이아코스 왕국의 정세 역시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세자가 왕자를 견제한다고 했던가?’

자신이 왕자를 죽인다면 오히려 쌍수를 들고 반길 게 뻔했다. 예상과 달리 분노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에게 대들 수 없었다. 먼저 건드린 쪽은 자기들이니까.

물론 로제타는 이런 인과관계가 없었더라도 그들을 찍어 눌렀을 것이다. 지금껏 관심도, 흥미도 없던 황제의 역할을 성실하게 이행한 것은 모두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해서이지 않았던가?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칼바람 같은 차가움이 가득 밴 눈이 살의를 드러내며 일렁였다. 로제타는 어느새 빠드득 소리를 내며 꽉 쥐어진 주먹에 힘을 풀었다. 로제타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아리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정말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 건지 얼어 있는 아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로제타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미 한번 실수한 인물이니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

로제타의 명령이 끝났다는 걸 눈치챈 아리스가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럼 이제 왕궁으로 가시죠.”

앞장서 걸어가는 그 모습에 로제타가 자리에 멈춰선 상태로 물었다.

“걸어가는 건가?”

제국에서 왕국까지의 거리도 한 번에 이동해놓고 어째서 별로 멀지 않은 이번 거리는 걸어간단 말인가? 로제타가 불만을 드러냈으나 아리스는 태연자약하게 답할 뿐이었다.

“최대한 마나를 아끼려고요.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 만약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서호를 지키는 건 저 남자가 될 것이다.

‘마법사는 마나가 떨어지면 짐 덩어리나 다를 바가 없으니.’

그러니 최대한 마나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왕궁 앞으로 바로 이동하면 마나를 갈무리하기 전에 들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대한 늦게 알려지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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