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21화 (121/155)

#121

“그레이스님의 옆에는 저를 비롯한 몇 명의 사용인들만이 허락됐고 그레이스님은 점점 더 메말라갔죠. 그나마 왕자님을 볼 때는 상태가 나아지셨지만 우울증은 점점 더 심해지셨어요.”

이대로라면 정말로 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레이스님이 모든 걸 포기할 때쯤 꿈이 심각해지기 시작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오던 꿈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왔죠. 그리고 그 꿈이 사흘에 한 번이 되었을 때, 그레이스님은 그 꿈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열쇠라는 걸 깨달으셨죠.”

그를 낳고 나서 꿈을 꾸지 않았다는 윤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이제 중요치 않았다. 서호는 그저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국왕 전하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셨다는 거예요. 그 후로 몇 달에 걸친 긴 싸움이 시작됐어요.”

무슨 사정이 있다는 걸 짐작했던 것 같은데 모른 척 그냥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던 사람.

“잠들고 싶고 돌아가길 원하시는 그레이스님과 손을 놓지 않으려는 국왕 전하.”

그 배려가 정말 고마웠었다.

“국왕 전하의 눈은 어디에나 있었어요. 당연히 그레이스님은 제대로 잠들 수 없었죠. 그리고 꿈이 매일 찾아오자 그레이스님은 정말 아예 주무시지 못하셨어요. 오 분에서 십 분 간격으로 사용인들이 그레이스님을 깨웠으니까요.”

그녀와의 교류에 외로움이라는 게 뭔지 깨달아버렸지만 그래도 덕분에 떠나오기 전에는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었다.

“점점 더 피폐해지셨어요. 그리고 거의 정신을 놓으신 그레이스님께서 윤님에게 매달리셨죠. 돌아가고 싶다고.”

그래서 그곳에서의 마지막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고.

“사실 윤님과 국왕 전하의 겉모습은 매우 비슷하세요. 아마 국왕 전하라고 생각하셨던 거겠죠. 그리고 그 뒤에 사건이 일어났어요.”

네게도 인사를 건넸으니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국왕 전하께서 거울을 깨트렸습니다. 그 이후, 꿈은 찾아오지 않았고 상황은 정말 엉망이 됐어요.”

너는 나를 조금 찾을지 모르지만,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잘 버텨낼 거라고. 너는 잘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완전히 망가지셨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왕자 전하는 그때부터 그레이스님을 돌려보내기로 하셨어요. 이곳에 있어 봐야 그레이스님은 국왕 전하 때문에 계속해서 망가질 거란 사실을 아시니까요.”

그리 긴 시간 함께하지 않았고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건 최근이니까. 넌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니까 금방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왕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가 되자마자 그레이스님을 깊은 잠에 빠지게 했어요. 방법을 찾을 때까지, 국왕 전하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원하시던 아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신 거예요.”

사실 그 뒤로 네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다. 이곳에 적응하고 다른 이들의 관심과 애정에 행복해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이제 방법을 찾아내셨죠. 바로 서호님이 사용하셨던 거울을 이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곳에서 너를 만나다니? 이런 꼴이 된 너를.

“서호님?”

다이앤의 부름에 서호가 여전히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본래 이름을 알고 싶어요.”

“그레이스님이 원래 이름요?”

이런 긴 이야기를 듣고, 여러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뒤 제일 처음 던지는 질문으로는 맞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꼭 들어야 했다. 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긴 한데.”

서호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이름을 삼키며 천천히 열리는 다이앤의 입술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모양과 소리 그리고 귓가에 닿는 조금은 어색한 발음.

“오유리님이십니다.”

오유리.

서호가 풀릴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줬다. 그리고 혀를 잘근잘근 씹으며 상대를 바라봤다.

헤어졌을 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 파마한 머리가 생머리가 됐다는 것 외에는 정말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너.

그래, 정말 너였다.

내 친구, 반장 오유리.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그녀가 생기 없는 얼굴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

윤은 왕세자가 왜 그를 경계하고 의심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왕세자가 봤을 때 왕이 윤을 대하는 행동이 총애로 보일 여지는 충분했으니까.

‘내가 마법사라는 점도 위험 요소겠지.’

왕세자의 견제로 인해 타국만이 아니라 왕국 내에서도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애당초 윤에게 마법을 가르쳐준 것이 왕실 마법사들이었기에 그들에게까지 자신의 실력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왕비의 죽음 이후, 아무리 외가가 아직 단단하게 그의 뒤를 받치고 있다고 하지만 왕세자가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평소처럼 적당히 비위를 맞춰줬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하려 노력했다.

‘생각보다 더 시간을 오래 잡아먹었지만.’

왕세자는 여전히 의심이 채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곧 전부 끝날 테니, 형님은 이제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로서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윤은 어머니의 방문에 손을 올리며 왕세자에 대한 생각을 지워냈다.

‘이대로 무지하게 두는 게 서로에게 좋아.’

오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앞으로 있을 일에 집중해야 했다. 윤은 연속된 두 번의 부름에 축축 처지는 몸에 힘을 주며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은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서호를 발견했다.

“…서호?”

무표정한 얼굴의 서호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다이앤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신경 쓰는 것 같더라니.’

하지만 지금 서호는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테니 이 만남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윤이 한숨을 삼키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너무나 평범한 인사에 윤이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다 조금 늦게 답했다.

“…안녕.”

서호가 다이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이앤에게 대충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

“뭐?”

“그레이스도 봤고.”

“다이앤.”

윤이 얼굴을 굳히며 그녀를 불렀지만 다이앤은 태연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저는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윤을 스쳐 지나갔다.

“다이앤!”

“그럼.”

윤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지만 다이앤은 깔끔하게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섰다. 어이가 없었다. 닫힌 문을 보고 황당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언제쯤 깨어날 것 같아?”

윤은 어색하게 굳는 입가를 피려 노력했다.

“오늘 새벽이나, 내일 아침쯤?”

“그렇구나. 그럼 나중에 그레이스가 깨어나고 나면 내가 좀 볼 수 있을까?”

윤은 잘 돌아가지 않는 목에 힘을 주며 서호를 쳐다봤다.

“…왜?”

“지금 말해주긴 조금 그래.”

윤은 서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걸까?

‘왜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하지?’

다이앤에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지만 지금 태도는 뭔가 이상했다. 서호의 성격에 화를 내지 않는 것까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느낌, 거기에 더해 정적이고 건조한 얼굴까지.

윤이 그 점을 지적했다.

“화를 내지 않네.”

“그 이야기를 듣고 마냥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지. 물론 네 방식이 잘못되긴 했어.”

역시 이상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은 모습.

‘안겔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어서 그런 건가?’

아직 고민 중인 것일지도 몰랐다. 결정에 참고하기 위해,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고.

윤이 물었다.

“결정을 내렸어?”

“…아, 그거.”

이제야 그 일이 생각난 것처럼 반응이 늦은 서호에 눈을 찌푸리는데 그가 딱딱하지만 그래도 흔들림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답은 정해져 있긴 해.”

“…그렇구나.”

듣지 않아도 서호의 답을 알 것 같았다. 윤이 서호를 외면하듯 그레이스를 돌아보는데 그가 질문을 던졌다.

“계속 여기 있을 거니?”

“깨어나고 나면 혼란스러워하실 테니까.”

그러니 너는 이만 나가 봐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서호에게서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옆에 있어도 될까?”

정말 서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윤은 방 한쪽에 있는 거울을 의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무슨 속셈이 있든 서호가 원한다면 당해줄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 반대로 어머니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게 아무리 서호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지만.

***

로제타는 마나가 옅어지는 걸 느끼며 눈을 떴다.

별이 촘촘히 박힌 어두운 하늘. 제국을 떠날 때 해가 지고 있었으니 이미 완연한 밤이었다. 더군다나 위치 탓인지 주변은 더욱 어두웠다. 불쾌한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발바닥에 끈적거리는 무언가가 묻어났다.

쩍-. 질퍽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이동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들이 어두운 뒷골목으로 찾아든 탓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은 이아코스 왕국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불쾌함은 반쯤 잦아들었다.

처음 신전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확실히 마법사 아리스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이였다. 감정에 휩쓸려 바로 처리하지 않기를 잘했다.

‘서호가 아끼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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