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그리고 제대로 설명을 듣기도 전 이어진 아리스와 그와 함께 나타난 사내의 대화. 대화의 내용과 상대에게서 흘러나오는 성력도 마법도 아닌 힘.
그리고 사내의 엄청난 외모. 이란성 쌍둥이라 자신과 생김새는 다르다 해도 어머니의 유전자를 받아 꽤 볼만한 아리스의 얼굴이 밋밋하고 평면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애써 상황을 가볍게 보기 위해 별 같잖은 생각을 주워 담던 루트는 그에게 꽂히는 두 사람분의 시선에 침을 삼키며 물었다.
“네가 어쩐 일이야? 그리고 여긴 신전이라 이렇게 마법으로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러자 안 그래도 성격 나쁜 동생 놈이 평소보다 더 까칠하게 답했다.
“상황 파악을 못 해? 됐고, 신녀 안겔과 거울에 대해 아는 정보를 다 털어놔.”
다급해 보이는 꼴을 보아하니 정말 큰일인 모양이었다.
‘난리네.’
이쪽이나 저쪽이나 지금 꽤 곤란한 상황인 듯했다. 루트가 들끓는 신력의 움직임과는 달리 밀랍같이 고요하고 창백한 황제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는데 아리스가 다시 한번 그를 재촉했다.
“네가 그림자에게 정보를 주던 정보원이라는 거 아니까 빨리.”
그리고 뒤이은 황제의 목소리.
“정보원?”
황제에게 스스로의 존재를 각인시킨 루트는 절망했다. 이로써 자신은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루트가 엄마 아들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나 잡으려고 온 건 아니지?”
계속되는 딴소리에 아리스가 눈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루트는 아리스의 뒤에 있는 황제를 의식하며 헛기침을 했다.
“안 그래도 막 황실에 정보를 보내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편지와 책을 황제에게 직접 건넸다.
“이건?”
의문을 표하는 황제에게 루트가 설명을 더 했다.
“거울에 대한 또 다른 책을 찾았습니다. 이방인의 귀환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공작에게 보고를 한 뒤 공작이 책을 가져갔기에 자신이 새롭게 만든 책이었다. 사브리나 공작이나 그 외의 다른 이들에게 부러 알리지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루트는 본래 굉장히 똑똑했다.
‘한번 읽은 책 내용을, 그것도 얼마 전에 읽은 걸 잊어먹을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라고.’
그가 담당한 도서관 내의 책 제목과 위치를 전부 외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읽어 보지 않아서 내용은 몰랐지만.’
그러니 적당히 거울과 관련 있을 것 같은 책들을 몇 개 골라 내용을 살피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루트가 그가 엮은 책을 펼치는 황제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손을 내밀어 제일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중요한 부분은 이 뒤에 있습니다.”
루트가 짚어준 부분의 내용을 읽어내린 황제에게서 날카로운 웃음이 튀어나왔다.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상대를 향한 살의 때문에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루트가 은근슬쩍 몸을 뒤로 물리려는데 책을 살피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눈이 마주친 루트가 어색하게 웃는데 황제가 툭 내뱉었다.
“너, 이거 필사한 거군.”
“그걸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뜬 루트는 황제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중간에 말을 바꿨다.
“그게…, 공작님께서 책을 가져가셔서요.”
“양쪽 모두의 줄을 잡고 있던 건가?”
바로 상황을 파악한 황제에게 루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뚫리는 것 같았다. 시야에 닿은 황제의 발밑이 부식되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여 더욱 일신의 안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매달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황제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일단 넘어가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급한 일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자신의 처우가 달라질 거라는 건 확실했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자신보다 조금 멍청한 동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제와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루트가 다시 한번 아리스에게 작게 속삭였다.
“동생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잘 해결해. 거기에 내 목숨이 달렸어.”
“도대체….”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하기도 전, 황제가 필사한 내용을 대충 훑고는 아리스를 불렀다.
“아리스, 가지.”
“아, 네!”
그러자 아리스가 군말 없이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다. 황실 마법사라더니. 황실 마법사는 황제의 직속 시종 같은 걸까?
‘아니, 황제가 이름을 알 정도면 조금 다른 의미인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일단 지금은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루트가 점점 흐려지는 동생을 보며 씩 웃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멍청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는 않은 동생은 아마 일을 잘 해결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의 앞날에 대한 걱정보다는 상사를 모시고 불편하게 움직일 동생을 비웃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루트의 비웃음을 읽은 아리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루트는 흐려지는 동생의 얼굴을 보며 킬킬 웃음을 흘렸다.
***
서호는 다이앤을 따라가면서도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녀를 따라가는 게 맞는 걸까? 그레이스를 보고 나서 더 감정적으로 동요하게 되면 어쩌나? 하지만 망설임 끝에 서호는 결국 그녀의 방 앞에 도착했다.
‘정말 아픈 게 맞는 건지 확인도 하고 싶고.’
만약 정말로 그레이스가 아픈 것이 맞다면, 그건 그것대로 서호를 괴롭게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진실을 알고 싶었다.
다이앤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그레이스의 방은 매우 특이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화병과 말린 꽃들 때문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서호는 불쾌함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방을 살폈다.
‘불은 몇 개 안 뒀네.’
은은한 불빛과 캐노피가 드리운 침대 너머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며 그레이스가 잠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서호가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다이앤을 돌아보다가 그녀의 뒤에 자리한 익숙한 거울을 발견했다.
‘저건?’
서호의 시선이 침대에서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울에 닿자 다이앤이 옆으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전하께서 빌려 오신 거죠.”
굉장히 순화된 말이었다.
‘빌려 온 게 아니라 훔쳐 온 거지.’
절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다이앤은 뻔뻔하게 거울에서 시선을 돌리며 침대를 가리켰다. 몇 번이나 거울을 뒤돌아보던 서호가 다이앤의 재촉 어린 눈빛에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잠들어 있는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되나 걱정됐지만 다이앤은 얼른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할 뿐이었다.
“이리로요.”
“주무시고 계시는데 들어와도 괜찮은 건가요?”
그러자 다이앤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깨우고 있으니까요.”
“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시며 흔적을 숨기신 것 같은데 지금 마법을 해제하는 중이에요.”
그 말을 듣자 주변의 공기에 무언가가 떠다니는 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처음 숨이 턱 막히는 게 꽃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공기 중에 무형의 무언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신력 덕에 느낄 수 있게 된 건가?’
한번 인식하자 몸을 짓누르는 낯선 기운이 갑갑했다. 서호는 몸 깊은 곳에서 꿀렁거리려는 신력을 다독였다.
‘아직은 안 돼.’
지금 신력의 존재를 들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서호가 낯선 공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데 다이앤이 캐노피를 걷어내며 말했다.
“이분이 그레이스님이세요.”
서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레이스에 대한 호기심과 안타까움, 경계가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캐노피 너머의 얼굴을 마주한 서호의 심장이 발아래로 쿵 떨어졌다.
“왜….”
서호가 침대 위 여자를 보며 쉽게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 서 있던 다이앤이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레이스님의 모습이 너무 젊죠?”
다이앤의 말처럼 그레이스는 너무 젊었다. 절대 윤같이 다 큰 아들이 있을 거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처음 오셨을 때 그 모습에서 전혀 늙지 않으셨답니다. 거울을 넘어온 영향인 것 같아요. 여기서는 늙지 않으시는 거죠. 서호님은 어떠신가요?”
“…네?”
“서호님은 이곳에 오신 뒤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라 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 아니요.”
서호가 멍하니 답했다. 이제야 눈치챈 것이 이상했다. 이곳에 온 지 몇 달이 됐는데 한 번도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잘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충격받을 틈이 없었다. 서호는 창백한 여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서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아무리 봐도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은 바뀌지 않았다. 서호가 현실을 부정하려 애쓰는 사이에 다이앤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이 모습을 보여드린 건 제 욕심이에요. 왕자 전하와 그레이스님이 너무 안타까워서요.”
정말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미동도 없는 눈꺼풀.
“그레이스님은 아프시기 전까지는 정말 윤님을 많이 사랑하셨어요. 국왕 전하도 많이 사랑하셨죠. 남편을 공유한다는 이곳의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시던 분이 그분을 받아들일 정도로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가슴.
“하지만 국왕 전하는 지독한 분이셨어요. …집착이 너무 심하셨죠. 그레이스님의 모든 행동을 구속하고 통제하려고 했어요.”
이불 위에 곱게 놓인 손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창백하다 못해 파리해 보였다.
“누구와 대화를 했고 누가 그레이스님의 몸에 손을 댔는지, 먹는 것, 입는 것, 하다못해 머리모양까지 모든 것에 간섭하셨죠.”
뼈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 손목.
“그레이스님이 누군가를 보고 웃기만 해도 상대는 처벌을 받기 일쑤였어요. 감히 그레이스님을 유혹하려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목이었죠.”
아니, 아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