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서호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부모님이 동시에 돌아가신 그때.
마음 한구석에 아파도 좋으니, 깨어나지 못해도 좋으니, 병원에 누워만 있어도 상관없으니 부모님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홀로 남은 것이 그렇게 두려웠었고 외로웠었다. 그런데 윤은 스스로가 선택해서 그녀를 돌려보내려 하는 것이다.
서호는 다시 다른 곳으로 새려고 하는 생각을 붙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윤을 동정하려는 스스로를 막아서기 위해서 조금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그레이스도 돌아가고 싶어 하나요?”
“…….”
그럴 리가 있겠냐는 답을 듣고 싶어서, 윤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싶어서. 하지만 서호는 다이앤의 침묵에서 다른 답을 찾아냈다. 서호가 그가 읽은 것을 부정하듯 다시 한번 물었다.
“윤을 두고요?”
그러자 다이앤이 고개를 옆으로 틀며 말했다.
“그레이스님은 많이 아프세요. …때로는 아픔이 너무 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죠. 그러니 그분을 탓할 수 없는 문제예요. 그렇지만 전하가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고요.”
서호가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려는데 그걸 눈치챈 것처럼 다이앤이 서호를 다시 바라봤다.
“전하께서 서호님께 그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저는 정말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주제넘은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머뭇거리는 것처럼 입술을 깨물던 다이앤이 말을 이었다.
“전하를 미워하셔도 괜찮지만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서호님의 상황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그때 그런 다이앤의 말을 끊어내듯 문밖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다이앤님.”
그 목소리에 서호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건 다이앤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은 다이앤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웬만해서는 이리로 오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좀 전까지의 여려 보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담백하지만 냉정한 대꾸였다. 그런 다이앤을 보며 서호는 얕게 숨을 뱉었다.
‘흔들리지 마. 깊게 생각하지도 말고.’
서호는 눈에 힘을 주며 지금 눈앞에 있는 이의 감정 변화에 집중했다.
‘윤의 이름을 말한 순간 곧바로 태도가 변했어.’
종래에는 이쪽에 매달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윤’이라는 이름 하나가 만들어낸 커다란 차이에 서호마저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자극하면….’
그때 바깥에 있던 사용인이 답했다.
“전하께서 왕세자 전하께 불려 가셨습니다.”
서호는 빠르게 왕세자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왕세자와 윤은 어머니가 다르고 윤은 아버지나 형과 그리 친하지 않다.
서호가 그 외의 다른 정보를 기억해내려 애쓰는데 다이앤이 서호를 돌아봤다.
“…알았다. 서호님?”
그리고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저와 함께 그레이스님을 뵈러 가 보시겠습니까?”
“네?”
***
아리스는 로제타와 함께 이동하면서 마지막으로 푸티에게 미소를 지었다. 막 깨어난 그에게 푸티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리스,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공을 세워야 해요.’
냉담하리만큼 차갑게 떨어진 말이었다. 자신이 아는 푸티라면 깨어난 자신에게 괜찮냐고, 아픈 곳이 없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푸티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푸티의 말에 아리스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해했다. 서호가 납치됐다니, 푸티의 말대로 이번 일을 잘 해결하지 못하면 목이 잘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미움받겠지.’
사용인들의 부름에 방을 나서면서 푸티가 흘리듯 던진 말.
‘당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수행해요.’
그 속에는 자신을 향한 걱정도 있긴 했지만 동시에 원망 역시 들어 있었다. 푸티는 숨기려고 한 모양이지만 서호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게 꽤 많이 화가 난 듯했다. 물론 그 두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리스는 꼭 서호를 무사히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당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크게 자랑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쪽도 꽤 실력 있는 마법사였는데 그렇게 반격 한번 못하고 쓰러지다니.
‘그리고….’
아리스는 자신이 공격받은 뒤, 크게 흔들리던 서호의 다갈색 눈을 기억했다. 맑고 깨끗하던 눈이 잔뜩 흐려져 불안하게 요동쳤다.
‘무사하다는 것도 알려줘야지.’
아무튼 여러모로 자신은 이번 일을 잘 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아리스는 평소라면 절대 먼저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않을 이를 만나러 왔다. 로제타를 데리고.
아리스는 풍경이 변하자마자 눈이 마주친 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네.’
아리스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방의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루트.”
“아리스?”
아리스는 그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는 대신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바라봤다.
“여긴 이아코스 왕국이 아니군.”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목 뒤에 소름이 돋았다. 아리스는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신전입니다. 왕국으로 가기 전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요.”
황제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이곳부터 들러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대충 그의 반응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황제의 기분에 따라 요동치는 신력은 무서웠다.
“…제일 중요한 건 서호의 안전이다.”
만약 서호가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면 아마 진작에 무슨 사달이 났을 게 뻔했다. 아리스는 금방이라도 멱을 딸 듯 자신을 응시하는 로제타의 시선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리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네, 그렇죠. 하지만 그러니까 더 정보가 필요합니다. 푸티는 모든 건 나중에 알아도 좋다고 했지만 또 아까처럼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중요한 이야기만 듣고 바로 왕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이미 한번 저들의 수에 놀아났으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 아리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분노를 억누르느라 입을 열 틈이 없는 건지 로제타가 고개만 작게 까닥였다.
아리스는 짧은 유예를 이용해 다시 방의 주인이자 엄마 아들을 바라봤다.
“루트.”
그의 쌍둥이 형이자 그림자의 정보원 중 하나였던 루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리스와 로제타를 번갈아 쳐다봤다.
***
고위 신관 루트는 최근 매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돈은 많이 준다지만….’
첩자 일은 생각보다 체력이나 심적인 소모가 많은 일이었다.
‘그리고 매우 귀찮지.’
많은 성력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자연스레 신전으로 들어왔다. 그리 튀지도, 그렇다고 모나지도 않게 신전 생활을 몇 년 이어 가자 성력 덕인지 쉽게 고위 신관의 자리에 올라섰다.
루트는 남들에게 무시를 받지도,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는 이 자리에 만족했기에 고위 신관이 된 이후로는 굉장히 나태한 삶을 누렸다.
그렇게 루트는 앞으로도 편안하고 쉬운 삶을 이어 갈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루트의 삶은 한 존재의 등장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신녀 안겔.’
그녀가 루트가 관리하는 서고에서 발견한 책으로 인해 루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게 된 것이다. 신녀 안겔의 수상쩍은 행동을 의심하던 두 세력이 서고를 관리하던 루트에게 동시에 접근했다.
제국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황제 로제타와 귀족들의 우두머리 사브리나 공작.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무리 신전에서는 꽤 높은 지위를 가진 루트라도 그 두 사람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루트는 두 사람의 권유를 빙자한 압박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원하던 정보가 똑같아서 쉽게 이중으로 돈을 받아먹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놀고먹는 고위 신관이라고 할지라도 이 위치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제국의 권력 관계를 알게 되는 법이었다.
즉, 루트는 황제와 공작이 겉으로는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동맹 관계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별다른 거리낌 없이 양쪽의 눈과 귀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최근 공작이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것이다.
‘어쩌지?’
며칠간 이어진 고민 탓에 루트는 황제에게 아직도 정보를 주지 못한 상태였다.
‘괜히 둘 사이에 끼였다가 불똥이 튀면 곤란한데.’
더군다나 자신의 말 한마디에 공작이 처리라도 당하면?
‘책임이 커지는 건 싫은데.’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었다가는 이쪽이 황제에게 처리당하게 생겼다. 그만큼 공작이 숨긴 정보는 황제에게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방인의 귀환과 관련된 내용이니까.’
그러니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황제에게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
‘죽는 것보다는 부담스러운 게 낫지. 편지를 쓰자.’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기 무섭게 방 안에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루트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설마 벌써 들켰나? 도망가야 해?’
루트는 빠르게 도피 계획을 세웠다.
‘…그 자식이 황궁에 있으니까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자신이 죽는 걸 그냥 지켜볼 녀석은 아니었으니 어머니를 봐서라도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그럼 지금은 우선 순순히 잡혀야지.’
루트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막 방 안에 나타난 이에게 변명처럼 이야기를 건네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트.”
이건 조금 전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한 상대, 엄마 아들의 목소리였다. 루트가 눈을 찌푸리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