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18화 (118/155)

#118

윤은 저 깊은 주름이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우울해하는 자신에게 부러 환하게 웃어주던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리 웃음이 많지 않은 사람임에도 자신의 앞에서는 환하게 웃어주던 유모.

언젠가부터 어머니보다 더 의지하던 유모가 안쓰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이 그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괜찮아.”

그러자 다이앤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고 치죠.”

하긴, 다이앤은 처음부터 이 계획을 못마땅해하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자신의 뜻을 따라줬지만. 윤이 미안함을 담아 다이앤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문을 눈짓했다.

“여기엔 내가 있을게. 이제 서호에게 돌아가.”

“제가요?”

다이앤이 의아함을 표했다.

“전하께서 가고 싶으시잖아요.”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이 떨렸다. 윤이 어색하게 웃었다.

“숨길 수가 없네.”

그가 괜찮은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게 맞았다. 하지만 서호가 원망하듯 자신을 바라본다면 조금 상처받을 것 같았다.

‘이기적이지.’

윤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안 가는 게 좋을 거야.”

“그런가요?”

“응.”

씁쓸한 기색을 읽었는지 다이앤은 그 이상의 감정을 묻지 않았다.

“그분은 그럼 완전히 신녀님께 맡기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지.”

다이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 가볍게 덧붙였다.

“생각이 바뀌시면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역시 그냥 넘어갈 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마워. 늘.”

다이앤이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떠났다. 부드럽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던 윤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리고 정말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쪽으로든.’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

서호는 안겔이 방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루 정도 시간이 있으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이야기를 해 놓고 고작 하루를 주겠다니 어이가 없었다. 서호가 헛웃음을 흘리며 이미 떠난 사람이 있던 자리를 노려봤다. 그리고 손에 얼굴을 묻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서호는 정말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안겔이 한 말 중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었는데 계속 다른 것이 신경 쓰였다.

‘그레이스를 돌려보내겠다니?’

서호는 자신이 충격을 받은 이유가 안겔이 말한 기회 때문이 아니라 윤의 결정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외쳐 봤자 머리에는 그와 관련된 생각만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그레이스를 사랑하잖아. 그런데 왜?’

거짓투성이였던 그가 유일하게 진실을 이야기했던 건 그레이스에 대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윤이 그레이스를 돌려보내겠다니.

‘그럼 함께 있지 못하는 거잖아?’

도대체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왜? 먼 타국도 아니고 자그마치 다른 세계인데, 정말로 다시는 보지 못하는 건데. 어째서?

머리에 비슷한 질문이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결국 답을 낼 수는 없었다. 서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을 멈췄다.

“…아무리 혼자서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야.”

자신은 윤을 모른다. 그간 주고받았던 편지의 주인이 그레이스가 아니었으니 그레이스도 몰랐다.

그러니 그들이 내린 결정의 이유 따위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 그만해.”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결정해야 했다. 안겔이 말한 선택의 기회.

“하지만 중요하다고 해봤자….”

이미 자신은 결정을 내렸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생각을 길게 할 이유가 없었지.’

내 세상, 본래 내 것이었던 것들. 하지만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그곳. 추억이 담긴 장소가 가득하지만 동시에 정말 내 사람은 없는 장소.

‘여긴 달라.’

소중한 사람들이 새로 생겼다. 로제타, 푸티, 아리스.

물론 이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황제궁 내부에서만 활동하는 지금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세상을 넓혀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곳의 삶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사람들만, 로제타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어떻게든 그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여기가 좋아.’

잔뜩 정체되어 과거의 기억 속을 헤매던 그곳에서와 달리 이곳에서 자신은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한곳에 고여서 뱅글뱅글 제자리걸음을 하고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벌주듯 아등바등 버텨내던 나.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지독히도 외로웠던 나날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윤에 대한 긴 고민과는 달리 빠르게 확신으로 굳어지는 생각을 끊어내듯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서호님?”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여자였다. 여자를 본 순간 서호는 다시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지금은 이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야.’

생각에 잠겨 주변을 지키는 이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방 주변을 둘러볼 생각은커녕 방 안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물었다.

“대화는 잘 끝내셨나요?”

“…그러니까.”

서호가 머뭇거리며 입술을 달싹이자 여인이 다시 스스로를 소개했다.

“다이앤입니다.”

이름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서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만 하는 거야.’

어차피 자신의 선택은 변하지 않을 테고 윤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서호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고운 인상의 중년의 여인은 윤의 사람인 것이 분명했고 아마 자신을 담당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이곳에 있게 될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보다 긴 시간 함께할 테고. 그러니 탈출하려면 이 여자를 잘 살펴야 했다.

서호는 적당히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안겔이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나요?”

처음 다이앤은 안겔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었지만 그녀가 직접 이 방에 찾아온 이상 이제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우스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이앤은 순순히 답했다.

“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방을 내어드렸습니다.”

“자기 신분을 전부 밝히고요?”

“왕자님의 사람들은 알고 계시죠.”

즉 그녀의 신분을 모르는 이가 더 많다는 것이다.

‘안겔이 벌인 일은 로제타와 척을 지는 일이니까 당연하겠지.’

도대체 안겔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는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다지 친분도 없는 날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할 사람으로는 안 보여.’

도대체 그 목적이 뭘까? 그게 뭔데 미래를 모두 저버릴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자신이 모르는 뭔가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앞으로도 그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이해가 필요하지도 않겠지만.’

티 나지 않게 입꼬리를 살짝 비틀던 서호가 다시 다이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이앤도 안겔과 윤이 하려는 일을 알고 있나요?”

또다시 담담하게 부정을 표할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피던 서호는 그 얼굴에 스치는 경악에 의아해졌다. 방금 자신의 질문에 놀랄 만한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때 다이앤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윤이요?”

놀란 부분은 그쪽이었던 모양이었다. 윤의 숨겨진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긴 그레이스와 윤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녀와의 비밀 이름은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친한 척을 해볼까?’

하지만 서호가 그에 대해 뭐라 더 말을 꺼내기 전 다이앤은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전하를 그리 부르시는군요.”

그러나 차분해진 얼굴과 달리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서호가 그 변화를 기민하게 감지하고는 답했다.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해서요.”

“…전하께서 서호님이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앤은 윤의 사람이었다. 괜히 윤과 친한 척 말을 늘어놓았다가 반대로 둘 사이가 별것 아니었다는 걸 들킬지도 몰랐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 좋겠지.’

그러니 지금 필요한 건 침묵이었다. 다행히 서호의 작전은 꽤 잘 먹힌 것 같았다. 서호를 바라보던 다이앤의 눈빛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사람의 표정을 이렇게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된 걸까?’

상황의 심각성이 만들어준 예민함일까? 그도 아니면 신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발달한 신체 능력 때문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긴장감을 지우던 서호는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일단은 안겔이 한 말들이 전부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다이앤은 두 사람의 계획을 알고 있나요?”

다이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는 조금 더 질문을 구체적으로 던져 보기로 했다.

“그레이스를 돌려보내겠다는 말이 진짜라는 뜻인가요?”

“네.”

서호는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어째서요? 그렇게 되면….”

서호가 말끝을 흐리자 다이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전하께서는 홀로 남게 되시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레이스님을 위해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그레이스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 원했기 때문이라는 소리인 걸까?

‘만약 그게 맞다면….’

새삼스레 윤이 자신의 어머니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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