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그러고 보니, 제국의 황제가 거울을 사용했다지. 깨울 수 있다는 건가?”
숨어 있던 탐욕이 드러난 금안이 번뜩였다. 순간, 본능적인 불쾌함이 윤을 찾아왔다. 왕이 직접적으로 서호를 입에 담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왕의 관심이 서호에게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최대한 서호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해야 해.’
지금 서호가 왕궁에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겠지만, 훗날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왕의 삐뚤어진 관심이 또 다른 거울의 사용자인 서호에게 향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역겨울 정도로 집착이 심한 사람이니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의 상태가 거울을 깬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던 마법사들이나 역사학자의 말에도 그녀를 돌려보내느니 옆에서 잠들어 있게 하겠다고 외치던 아비였다.
죽고 싶다던 어머니에게 죽더라도 내 옆에서 죽으라고 외치던 남자.
구역감이 밀려올 것 같았지만 윤은 죽을힘을 다해 역함을 가라앉히고 답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시도는 해볼 가치가 있겠죠.”
소유욕에 뒤섞이는 희망이라는 감정에 환멸이 났다. 그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내리까는데 왕이 상체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네 말을 다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고개를 숙인 윤은 순종적인 아들의 탈을 뒤집어쓰고 이야기했다.
“네. 하지만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은 저도 아버지만큼 큽니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자신과 어머니가 얼마나 끈끈한 관계인지 알고 있었다. 어미와 자신의 사이까지도 질투하던 못난 사내였다. 왕에게 보이지 않을 비웃음을 머금던 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왕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러니 제게 사흘만 시간을 주시죠.”
“사흘이나?”
못마땅하게 일그러지는 선이 굵은 눈썹을 보며 윤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처음 시도해 보는 마법이니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본래 마법은 선택받은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최정점에 서 있다고 평가받는 자신.
왕이 여기서 뭐라고 말을 보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참 침묵하던 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거다.”
“네.”
볼일이 모두 끝났다. 그러니 이제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서면 되겠지만 윤에게는 한 가지 절차가 더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저리 잠드시고 난 이후, 왕에게 불려오는 날이면 늘상 있던 일.
왕이 윤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했다. 윤은 아무런 반발 없이 아버지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그런 윤의 얼굴로 왕의 흉흉한 금안이 닿았다.
속눈썹 한 올, 얼굴을 이루는 선 하나, 귀의 모양, 얼굴에 난 솜털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시선.
누군가의 흔적을 찾는 집요한 눈빛. 그렇게 꿇어앉은 다리가 무겁다 못해 감각이 사라질 무렵이 되어서야 왕이 혀를 찼다.
“쯧, 여전히 그레이스를 전혀 닮지 않았구나.”
윤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왕이 짜증스레 손을 흔들었다. 나가 보라는 축객령이었다.
윤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접견실을 나섰다.
물러나는 뒤통수로 왕의 끈질긴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지만 윤은 느끼지 못한 척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방을 나설 뿐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닫힌 문. 완전히 시선이 차단되고 나서야 윤은 크게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정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기분이 더러운 만남이었다.
***
잔뜩 굳은 얼굴로 돌아온 어머니의 궁에서 윤을 기다리는 건 다이앤이었다.
“다이앤.”
다이앤이 윤의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듯 그를 부축해 주려 했다. 윤의 다리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걸로 보아 그의 다리 상태를 짐작한 듯했다. 윤은 그녀에게 몸을 기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이앤의 손을 떼어내지도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윤이 다이앤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이다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래. 그런데 왜 나와 있는 거지?”
자리를 비우면서 그녀에게 서호를 살펴 달라고 부탁했었다. 안겔에게 어머니를 보여주느라 서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는 이야기해 주었으니 다이앤이 알아서 잘 서호를 보살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같은 곳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걸 알려줬는데.’
그런데 그녀가 왜 이곳에 나와 있단 말인가? 윤이 눈썹을 찌푸리는데 다이앤이 답했다.
“그분께서는 조금 전 매우 이르게 깨어나셨습니다.”
“일어났다고?”
사용한 마나 양으로 가늠해 보면 적어도 앞으로 대여섯 시간은 더 잠들어 있었어야 했다.
“네. 그리고 그분이 일어난 걸 어찌 아셨는지 신녀님께서 잠시 단둘이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더군요. 방에서 나온 지는 몇 분 되지 않았어요.”
윤은 애써 못마땅함을 숨겼다. 서호를 왕국으로 데려온 이유가 안겔과의 거래 때문이었으니 안겔이 원한다면 자리를 만들어주긴 해야 했다.
‘서호의 몸에 이상이 있다면 그 여자가 치료하겠지.’
황제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서호에게는 호의를 가진 여자니까 서호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안겔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더라도 이쪽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아니나 다를까 다이앤이 말을 덧붙였다.
“방 밖은 호위들이 지키고 있어요.”
“…서호는 어때 보여?”
호위로 함께 있던 마법사의 부상에 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었다. 기절하기 전까지 그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앞으로는 예전과 같지 않겠지.’
무심한 듯 다정하게 쳐다봐주던 그 시선이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조금 아쉬워졌다. 딱히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다정함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그 다정함에 위로를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오로지 어머니만을 생각하기로 했으니 그 외의 것들에 의미를 만들어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쓰게 웃는 윤에게 다이앤이 서호의 상태를 보고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이상은 없어 보이십니다.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고 화가 난 것도 같았지만요. …그리고 친절하신 분 같더군요.”
망설이듯 더해진 마지막 말에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다이앤의 성격이라면 자연스레 그녀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걸 밝혔을 텐데도 그 성정에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 편이지.”
작게 중얼거리는데 볼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윤이 서둘러 다시 입매를 굳혔지만 다이앤은 이미 모든 것을 봤음이 틀림없었다.
윤이 눈치를 보듯 다이앤을 돌아봤다. 다행히 눈을 가늘게 뜨고 윤을 바라보던 다이앤은 그의 웃음을 지적하지 않고 앞으로의 진행 상황을 물어왔다.
“언제 시작하실 건가요?”
고맙다는 듯 눈을 깜빡인 윤이 가볍게 답했다.
“우선 어머니를 깨워야지. 그리고 상황을 설명한 뒤 바로.”
“시간이 얼마나 있나요?”
차분하게 묻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초조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사흘. 하지만 서호를 데려왔으니 더 서둘러야지.”
자신의 것을 빼앗긴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지금 당장 더 걱정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황제였다. 다이앤이 심각해진 얼굴로 걱정스레 말했다.
“빨리 행동해야겠군요.”
“그래. 지금 바로 어머니를 깨울 거야.”
윤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다이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도착한 방.
문밖에서부터 벌써 코를 찌르듯 풍겨오는 꽃향기를 덤덤하게 넘긴 윤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하얀 장막 너머의 실루엣이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함께 방으로 들어온 다이앤이 하얀 천을 걷어 올렸다.
“조금 전에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셨죠.”
안겔이 함께였고 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불려갔기 때문에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도 못했다.
윤은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둡게 켜둔 불 때문에 갈색빛이 도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자신과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가려져 있을 다갈색의 눈. 색의 조합 때문인지 햇빛 아래의 어머니는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였었다.
지금은 보지 못하는 태양 아래 어머니의 모습을 되짚어 보던 윤은 다시 지금의 어머니를 눈에 담았다. 창백하고 건조한 얼굴. 숨을 쉬는지도 의심이 갈 정도로 고요한 숨소리. 미동조차 없는 몸.
죽음 같은 잠에 빠진, 꿈속에 사는 어머니.
그녀에게 닿을 듯 뻗어진 손이 허공을 맴돌다 황금빛의 반짝이는 빛무리를 뿜어내자 화려한 윤의 마나가 주변으로 퍼졌다. 그리고 이내 침대 아래 숨겨져 있던 거대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어머니의 수면을 위해 작동하던 마법진이 윤의 마나에 의해 파훼되고 있었다. 옆으로 다가온 다이앤이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윤은 서서히 흩어지는 마법진을 눈으로 훑었다.
“잠들어 있던 시간이 있으니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그렇군요.”
흩어지는 빛무리에 감싸인 그레이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이앤이 다시 물었다.
“성공하실 것 같으세요?”
마찬가지로 허공을 수놓다가 이내 빛을 잃고 사라지는 마나를 쳐다보던 윤이 느릿하게 답했다.
“…이것밖에 남은 수가 없으니 성공해야지.”
“하지만 만약 실패하신다면….”
그렇게 된다면…. 윤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리며 답했다.
“그때야말로 모든 걸 끝내야지.”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다이앤과 눈을 맞췄다.
“다이앤. 우리 좋은 것만 생각하자.”
“…….”
오랜만에 제대로 바라본 다이앤의 얼굴이었다. 한때는 고왔을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웃음을 흘릴 때마다 잡히던 주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