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16화 (116/155)

#116

‘아리스의 예상이 맞았네.’

서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쓰러져 있던 아리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력을 이용해 최대한 그의 상처를 치료하긴 했지만 정신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용한 힘이었기에 상처가 완벽히 나았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본래도 완벽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힘이니까.’

서호는 그저 정신을 잃기 전 아리스는 괜찮을 거라던 자신의 막연한 확신이 신력으로 인한 것이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서호는 아리스에 대한 걱정을 지우기 위해 질문을 이어 나갔다.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요?”

아리스나 로제타의 생각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번 역시 안겔은 답을 하긴 했다.

“제 상황과 왕자님의 상황이 맞물렸거든요.”

굉장히 모호한 설명이긴 했지만.

“제대로 설명해줄 생각은 없나요?”

안겔이 의외라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침착하시군요. 이것보다는 조금 더 화를 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불안해하시든가요.”

꼭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걱정하듯 던져진 물음이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든 것이 다 짜증 났다. 그리고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현 상황도.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로제타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무사해야 했다. 그러니 상대의 심기를 필요 이상으로 거슬러서는 안 됐다. 서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물었다.

“제 질문에 대한 답은요?”

안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는 얼굴로 답했다.

“선택의 기회를 드리려고요. 물론 제 목적이 따로 있긴 하지만요.”

“목적이요?”

“그건 말씀드릴 생각이 없답니다. 서호님이 생각하셔야 하는 건 서호님께 주어질 기회죠. 저는 서호님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을 생각이거든요.”

“하.”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이번에는 비웃음이 숨겨지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강제에 의한 일이 아니었던가? 서호가 대놓고 날카로운 웃음을 흘렸지만 안겔은 태연함을 유지했다. 오히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곳까지 서호님을 모셔온 방식이 강제적이긴 했죠. 하지만 선택까지는 강제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안겔의 약속은 서호에게 아무런 믿음도 주지 못했다. 서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래요. 그래서 그 대단한 선택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요?”

안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에게도 화를 낼까 싶었는데 돌아온 답은 잔뜩 비틀려 있던 서호조차도 놀랄만한 것이었다.

“왕자님께서는 그레이스 이아코스님을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시려 합니다.”

머리가 방금 그녀가 한 말의 해석을 거부했다. 서호는 몇 번이고 그녀가 한 말을 되뇌었다. 지금 안겔은 윤이 그의 어머니를 다시 한국으로 보낼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안겔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뭐라고요?”

“그리고 그 통로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리게 될 거예요. 더 이상 다른 이방인이 이곳으로 오지도 못할 테고 돌아가지도 못할 테죠. 거울을 깨트릴 테니까.”

뭐라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 서호가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안겔이 변명하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거울을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왕의 집착이 대단하더군요. 그레이스님의 발목에 연결된 그 실들은 정말 끔찍했어요.”

안겔이 서호의 발목 어귀를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서호님, 선택하세요. 이곳에 남으실지, 아니면 돌아가실지.”

서호는 답이 없는 그를 돌아보는 걱정 가득한 안겔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서호는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선택을 해야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

안겔은 서호의 방을 나서면서 애써 충격에 휩싸인 서호의 얼굴을 머리에서 지워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죄책감이 차올랐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 여자 때문에 더욱 서호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

서호가 로제타와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았다. 둘 사이의 유대가 매우 깊다는 것도, 서호가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서호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 것은 강제였지만 돌아갈지 남을지는 서호가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루미너스 왕자의 어머니인 또 다른 이방인을 보는 순간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게 살아 있는 건가?’

그건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죽지도 살지도 못해 그냥 숨만 붙어 있는 시체 같던 그 모습.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짙은 꽃향기, 그 지독한 향기만큼이나 역겨웠던 집착의 흔적.

‘붉은 실이 보이나?’

루미너스 왕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안겔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여인의 발목에서 일어나는 일은 충격적이었다.

닳아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붉은 실들이 발목에 덕지덕지 잔뜩 휘감겨 있었다. 여기저기 그을리고 늘어났으며 잔뜩 엉킨 데다 곰팡이가 진 것처럼 변색된 붉은 실.

발목을 감싸던 실뭉치 중 하나가 기어이 삭아 문드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다른 붉은 실이 나타나 여인의 뼈만 남은 발목을 휘감았다. 검붉거나 하얗게 변해 사라지고 있는 남아 있는 것들과는 달리 피같이 새빨간 실이었다.

하지만 그 실 역시 발목에 닿는 순간 빠르게 색을 잃어갔다. 여인의 발목에 묶이자마자 시작된 변화.

명백한 거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은 끈덕지게 살아남아 여인의 발목에 매달려 그녀를 이 세상에 묶어뒀다. 절대, 절대 보낼 수 없다는 듯 필사적으로 발목을 묶고 다른 실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안겔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왕자가 비웃듯 말했다.

‘너무 당연한 걸 물었나? 아주 잘 보이는 모양이네.’

안겔이 왕자를 돌아보자 그가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바꾸지. 실이 약해졌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뭐라고 답해야 할까. 너무 약하지만 동시에 너무 강해서 확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안겔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수 없다면 이 여인이 너무 불쌍했으니까.

안겔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이 무심한 눈으로 다시 침대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여인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그래, 그럼 됐어.’

메마른 듯하면서도 잔뜩 가라앉은 왕자의 얼굴을 안겔은 외면했다. 왕자의 얼굴을 보자 다시 죄책감이 차오른 탓이었다. 물론 그건 왕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서호를 향한 감정이었다.

서호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만약 자신 때문에 이곳에 온 서호가 저 이방인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사이가 좋을지 모르지만 미래의 일은 모르는 거야.’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러니까 서호는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혹시 모를 최악의 미래를 감수하고서라도 이곳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인지.

***

윤은 안겔에게 어머니를 보여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왕의 부름을 받았다. 왕실 마법사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호출을 한 게 훤히 보였다.

‘여전하군.’

윤은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을 무심히 바라봤다.

장거리 이동마법이었기에 마나를 숨길 수 없었고, 자연스레 왕국에 돌아오면 왕을 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긴 하지만 그럼에도 왕을 독대하는 자리는 늘 불편했다.

자신과 똑 닮은 사내.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색이 또렷한 금안. 쉰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아직도 정정한 사내. 날카로운 눈매가 윤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불려온 지 벌써 한참이 지났는데도 왕은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으로 윤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거겠지.’

윤은 그 긴 시간 동안 자세 한번 흐트러트리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묘한 대치는 언제나 그렇듯 왕의 변덕으로 끝이 났다.

“떠난 것만큼이나 제멋대로 돌아왔구나.”

윤은 눈을 길게 접어 그린 듯한 미소를 띠고는 답했다.

“그런가요?”

왕이 안 그래도 사나워 보이는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심문하듯 물었다.

“수행원들만 따로 돌려보내다니 뭘 하다 온 거지?”

왕에게는 처음 신전에 핑계를 댄 것처럼 어머니의 안녕을 위해 신전에 들르겠다고 보고했다. 따라서 아무런 말도 없이 수행원만을 먼저 왕국에 돌려보낸 행동을 추궁받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윤은 미리 만들어 둔 핑계를 꺼내 들었다. 그가 아는 아버지라면 절대 화를 낼 수 없을 주제를.

“마법사 하나를 만났습니다.”

“마법사?”

제대로 설명하라는 왕의 얼굴을 읽은 윤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국 황실 마법사를 만나 마법을 하나 배워 왔습니다. 어머니의 상태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레이스에게?”

오랜 시간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 아버지는 왕국의 모든 마법사와 신관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그는 무슨 방법을 써도 어머니를 깨우지 못했다.

‘그리고 나 역시 어머니를 깨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종종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곤 했지만 왕은 윤이 직접 실력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의 본래 실력을 알 수 없었다.

‘이곳에 나보다 강한 마법사는 없으니.’

그런데 여태껏 어머니를 깨우지 못한다고 말하던 자신이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 다른 마법사를 만나고 왔다. 당연히 왕이 혹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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