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나를 납치한 정확한 목적도 모르고, 이 방만 나간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
이곳이 제국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무작정 방을 나선다고 모든 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서호는 답답한 현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지기 전 상황을 되짚어 보면 서호를 납치한 건 안겔과 윤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한테 악의는 없는 것 같지만….’
그게 전부 진짜라는 보장은 없었다. 처음부터 납치를 위해서 자신의 경계를 풀려고 호의를 가장한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도대체 자신을 왜 납치한 걸까?
‘로제타를 제외하면 난 특별한 사람이 아닌데.’
이방인이라는 것과 로제타의 운명이라는 걸 제외하면 서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달리 생각하면 자신이 납치된 이유는 저 두 가지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로제타 때문인가?’
제국의 황제라는 위치는 적이 생기기 충분했다. 특히 안겔을 떠올리면 로제타 때문이라는 가정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둘은 사이가 나빴으니까.
‘그럼 윤은?’
윤이 로제타 때문에 자신을 납치할 이유가 있을까?
‘아예 그럴 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이곳은 왕정 국가였고 한 왕국의 왕자인 윤이 다른 나라의 황제인 로제타를 공격할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두 사람의 목적이 같다고 확신할 수도 없잖아.’
윤은 로제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납치한 것일 수도 있었다.
‘머리 아파.’
서호가 마른세수를 하며 문을 바라봤다.
‘답이 안 나올 때 할 수 있는 건 몇 개 없지.’
질문과 정보 수집.
때마침 자신이 깨어난 걸 눈치챘는지 방에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호는 노크도 없이 열리는 문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긴장하지 말고, 너무 겁먹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자극하지도 말자.’
서호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쉬며 방에 들어선 이를 마주했다.
“…어머, 일찍 일어나셨네요?”
전해 들은 것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고 중얼거린 여인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너무 아무렇지 않은 인사에 서호는 순간 이 여자가 지금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납치해놓고 뻔뻔하게 굴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갑작스러운 상황과 꿈 때문에 흐려졌던 현실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지금 정말 위험했다. 서호가 몸을 긴장시키며 물었다.
“여기는 어디죠?”
서호가 살짝 눈을 돌려 커튼의 특이한 무늬를 살폈다. 얼핏 본 방의 모습은 고급스럽긴 하지만 동시에 제국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이아코스 왕국이랍니다. 서호님이라고 했던가요? 제 이름은 다이앤이에요.”
서호는 다시 그녀를 돌아봤다.
“루미너스 왕자님의 유모였고 지금은 그레이스님을 옆에서 모시고 있죠.”
푸티와 비슷한 위치인 것 같았다. 서호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질문을 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알고 있나요?”
“저는 그저 왕자님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생긋 웃고 있으나 말투는 단호했다. 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질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럼 왕자님이 언제쯤 오실까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서호가 한숨을 삼켰다.
“그럼 신녀 안겔은요?”
“글쎄요. 신녀 안겔님이 왜 이곳에 계시겠어요?”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하려는 걸까? 서호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아무것도 답할 생각이 없군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서호는 입술을 깨물며 쓰러지기 전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안겔과 윤이 했던 마지막 말.
‘분명 거울을 챙겼다고 했어.’
그들이 말하는 거울이 뭔지는 뻔했다. 윤이 제국으로 왔던 목적이 그것이었던 걸까? 거울이 목적이었다면 자신은 도대체 왜 납치했던 걸까?
여긴 이아코스 왕국이 맞는 걸까? 만약 다른 곳이라면 여긴 어디인 걸까? 안겔은 정말 로제타 때문에 나를 납치한 걸까? 아리스는 괜찮은 걸까? 로제타는 왜 나타나지 않았던 걸까?
일부러 무시하던 생각의 파편들이 여러 문장이 되자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로제타.’
로제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아리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윤이 로제타를 공격했다면? 아리스처럼 피를 흘리고 쓰러진 로제타, 그리고 그런 로제타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로제타는 황제였다. 주변에 사람을 물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로제타를 발견했을 것이다.
‘로제타가 다쳤다는 것부터가 내 가정일 뿐이잖아.’
그냥 무슨 일이 생겨서 자신에게 오지 못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갈지 생각해.’
서호는 다시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이 방에 들어온 순간 문밖을 지키던 이들이 전부 사라졌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이 여인뿐이었다.
‘내가 신력이 있다는 건 이 여자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제압을 하는 건….’
하지만 이곳은 특이한 힘이 가득한 곳이었다. 겉모습이 여리여리해 보인다고 해서 상대가 정말 약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역시 한동안은 얌전히 지내는 게 좋겠어.’
자신에게 기회는 아마 단 한 번일 것이다. 그러니 그 기회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신중해야 했다.
서호가 다시 침착함을 찾으려 애쓰는데 답을 기다리듯 서호를 바라보던 여인이 질문을 던졌다.
“그레이스님과 같은 곳에서 온 분이라고 들었는데요. 그게 맞나요?”
답을 해주고 싶지 않았으나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야 하니 별수 없었다.
“그분이 지구에서 온 게 맞다면요.”
“…그렇군요. 확실히 그래 보여요.”
추억을 더듬는 것처럼 초점이 흐려진 여인의 시선이 서호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직접 보셨으면 좋아하셨을 겁니다.”
그 얼굴에 담긴 씁쓸함을 읽어낸 서호가 떠보듯 말했다.
“편지를 주고받았었는데요.”
여인이 입을 다물었지만 서호는 그간 로제타가 했던 의심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저와 편지를 주고받은 건 그레이스가 아니었나 보죠?”
코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모든 게 다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배신감이 차오르는 것도 같았다.
‘이제야?’
납치를 당했을 때도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편지가 거짓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끼다니.
‘믿지 않고 있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믿고 있었으니까.’
윤 자체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레이스와 관련된 부분에서만큼은 그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전부 거짓이라면….
“그레이스가 아픈 건 정말이긴 한 건가요?”
서호는 기어이 마지막 끈을 놓지 못하는 스스로를 욕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하나는 진짜였나 보네.’
이걸로 윤에 대한 믿음이 되살아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완전히 윤을 싫어할 수도 없었다.
‘납치당한 주제에….’
윤은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었고 아리스를 공격한 사람이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접근한 사람이고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에게 이런 마음을 품는 건 옳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그레이스에 대해 이야기하던 윤의 얼굴을 떠올리면 서호는 그를 완전히 잘라낼 수가 없었다.
입안의 살을 씹던 서호가 결국 말을 뱉었다.
“빨리 쾌차하시길 바라요.”
감정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래도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담백하게 건넨 말이었다. 서호의 말에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여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절하신 분이군요.”
서호는 굳이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여인도 그 이상 다른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때마침 방문자가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났군요. 서호.”
서호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안겔을 돌아봤다. 그녀는 하얀 신관복을 숨기지도 않고 당당하게 입고 있었다. 자연스레 올라간 입꼬리와 곱게 휜 눈, 나붓나붓한 몸짓. 그녀의 표정과 태도만 본다면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뻔뻔하네.’
서호는 미소를 짓는 대신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안겔을 바라봤다. 피곤한 탓인지, 화가 난 건지 지금은 가식적으로도 미소를 짓고 싶지 않았다.
안겔이 여인을 밖으로 내보내며 서호에게로 다가오더니 손을 뻗었다. 서호가 붙잡으라는 것처럼 다가온 손을 내려다보자 안겔이 말했다.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손을 내밀어 주시겠어요?”
서호는 손을 외면하며 안겔에게 물었다.
“여기가 이아코스 왕국이 맞나요?”
높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상대에 대한 일말의 기대도 없는 목소리.
“네. 맞습니다.”
답이 돌아와도 그녀의 말을 믿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서호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질문을 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제가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죠?”
“반나절 정도요? 서호님이 기절하신 지도 그 정도 됐죠.”
안겔의 말대로라면 윤은 제국과 왕국을 가로질러 이동할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