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지금은 그림자들과 황제궁 사용인 몇 명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로제타가 쓰러졌던 것도, 서호가 납치됐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언제까지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 지금 상황을 알아차린다면 로제타의 부재를 알리는 것보다는 그가 잠들어 있다고 보고하는 게 가장 좋았다.
‘폐하가 왕국에 갔다는 게 알려지면 일이 너무 커져.’
그러니 가장 최선은 누군가 로제타의 부재를 눈치채기 전 그가 돌아오는 거였다. 푸티는 아리스의 마법 때문에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하는 로제타와 아리스를 바라봤다.
푸티가 다시 아리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아리스가 옅게나마 미소를 지어줬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게 훤히 보였다.
‘지금 누가 누굴 안심시켜?’
자기 몸이나 돌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삐죽한 생각이 튀어나왔지만 푸티는 그 속마음을 드러내는 대신 아리스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를 안심시켜 주고 싶은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몇 초 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푸티는 크게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올려 양 볼을 두드렸다.
“좋아, 해보자고.”
자신은 훌륭하고 숙련된 시종이었다. 그러니 뭐든 잘 해낼 수 있었다.
***
안겔은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는 왕자를 쳐다봤다.
‘시간에 쫓기고 있으니 당연한 건가?’
언제 황제가 이곳에 들이닥칠지 몰랐다. 왕자가 서호의 곁을 지키던 마법사를 처리한 것도 황제가 어중이떠중이를 서호의 곁에 붙일 리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지 않았던가.
‘자신이 가진 마법사 중 가장 믿을 만하고 강력한 마법사 중 하나를 붙였을 거라고 했었지.’
다른 마법사가 없진 않겠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어줄 거라던 왕자의 말을 떠올리고 있는데 그가 품에 안고 있던 서호를 눈짓하며 말했다.
“또 다른 이방인이야.”
왕자가 명령을 내리는 내내 품에서 놓지 않는 서호를 보며 호기심을 표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꽤 늦은 소개였다.
왕자의 말에 그가 등장하자마자 제일 빠르게 달려와 상황을 함께 정리하던 중년의 여인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이분을 왜 데려오신 건가요?”
태도를 보아하니 거울에 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안겔이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그가 답했다.
“어머니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거든.”
여인의 얼굴에 충격이 깃들었다. 하지만 왕자는 여인을 달래주는 대신 명령을 이어 갔다.
“그러니 잘 감시해. 무례하지 않게.”
여인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자세한 설명은 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곧 우리 대단하신 아버지께서 들이닥칠 게 뻔하니까 나중에 할게. 우선은 적당한 방으로 옮겨주겠어?”
“…그러죠.”
빈정거리듯 국왕을 거론하는 왕자와 그 말에 모든 궁금증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보아하니 신관들이 보낸 정보가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진 정보를 이것저것 떠올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안겔은 여인이 부른 사람들이 서호를 데려가자 생각을 멈추고 그들을 감시하듯 살폈다. 그때 왕자가 그런 안겔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 신녀를 소개해야겠군.”
안겔은 간신히 사라지는 서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여인을 돌아봤다.
“안겔이에요. 왕자님과 협력 중이랍니다.”
안겔의 인사가 끝나자 여인이 스스로를 다이앤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왕자는 두 사람이 제대로 인사할 시간을 주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 끌려가기 전에 그녀에게 어머니를 보여줘야겠어. 그러니 우선은 어머니의 방으로 가지.”
그 말에 다이앤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그레이스님을요?”
왕자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안겔을 쳐다봤다.
“그녀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안겔은 오만하게 눈을 치뜨며 왕자의 시선을 받았다. 루미너스 왕자와 안겔이 시선을 교환하며 기 싸움을 이어 가자 다이앤이 한숨을 푹 쉬더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시간이 없으니 살필 것이 있다면 빨리 가시죠.”
그 말에 안겔은 왕자에게서 시선을 떼며 다이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미 사라져버린 서호가 굉장히 많이 신경 쓰였지만, 우선 지금은 왕자가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했다.
***
서호는 짙은 어둠을 마주한 순간, 지금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꿈?’
어둠 속 허공에 붕 떠 있는 몸을 내려다보던 서호는 이 꿈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또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 하얀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굉장히 먼 거리여서 형체가 제대로 파악되지도 않았지만 서호는 저 하얀 물체가 그 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서호를 발견한 듯 손이 다가왔다. 하지만 서호는 손이 두렵지 않았다.
신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의 움직임이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손은 인사하듯 살랑 흔들릴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뭐지?’
서호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손이 돌연 몸을 틀더니 어둠 속 한 곳을 가리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 서호는 그곳에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누가 있다고?’
본능은 분명 이곳에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외치고 있는데 서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호가 눈에 힘을 주며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데 흰 손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이 조금 밝아졌다. 동시에 드러난 긴 머리카락과 하얀 옷.
‘…뭐야?’
뒷모습뿐이긴 했지만 전형적인 귀신 같았다. 서호가 황당함에 손을 돌아봤다.
‘얌전하다 싶더니 그냥 헛꿈인가?’
귀신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개꿈이라고 넘기기에는 손 주위에 특유의 형용하기 어려운 기운이 가득했다.
‘이건 절대 그냥 넘길 수가 없는데.’
그럼 도대체 서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저 존재는 뭐란 말인가?
‘설마 무서운 꿈을 꾸면 내가 자기를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손이 그런 생각을 한 거라면 서호는 크게 비웃어줄 생각이었다.
‘장난해?’
서호가 한숨을 푹 쉬며 손을 쳐다보는데 손이 흔들리더니 다시 한번 여인을 가리켰다. 그리고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뭐라고 하고 싶은 것 같은데.’
하지만 말로 하는 게 아니라면 얼굴을 봐도 이해할까 말까 싶을 텐데, 표정도 없는 손이 아무리 꼬고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해도 그 의도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답답함에 혀를 차는데 손이 다시 한번 여인을 쿡쿡 가리켰다. 서호가 결국 다시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여자. 얼굴을 보여주지도, 그렇다고 말을 하지도 않고 뒷모습만을 보여주는데 뭘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손이 서호의 눈앞으로 불쑥 튀어나오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서호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리는데 손이 그런 서호를 따라오며 서호의 손을 툭 쳤다. 서호가 그 손을 피하듯 자신의 손을 물리는데도 손은 계속해서 서호의 손을 향해 까딱거렸다.
‘혹시?’
서호는 설마 하는 마음에 손바닥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손이 기다렸다는 듯 서호의 손바닥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손의 감각에 집중해 손이 하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던 서호는 손바닥에 적히는 글자가 한글이라는 걸 깨달았다.
‘같, 이?’
이건 또 무슨 뜻일까? 서호가 곤란한 얼굴로 손을 내려다보는데 손은 반복적으로 ‘같이’라는 말을 쓸 뿐이었다.
서호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손을 오므리며 다시 손을 바라봤다. 그러자 손이 자리에 멈춰 다시 한번 여인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저 여자랑 뭘 같이 하라는 것 같았다. 서호가 그가 이해한 게 맞냐고 묻기 위해 다시 손을 바라보는데 손이 돌연 허공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자세를 바꾸더니 훌쩍 멀어졌다. 그리고 그 움직임과 함께 서호의 몸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서호는 다급한 마음에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같이 뭘 하라고?’
하지만 손은 서호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흔들대기만 했다. 결국 서호는 아무런 답도 듣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
눈을 뜬 서호는 꿈의 내용을 복기하듯 되새겼다. 평범한 꿈이 아닌 만큼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음이 확실했는데, 문제는 서호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왜 이렇게 불친절해?’
눈을 깜빡거리던 서호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 상황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납치됐지.’
상체를 일으키자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드러난 몸은 따로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어.’
도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윤이 자신을 납치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리스를 공격했던 무자비한 손속을 생각하면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탈출할 수 있을까?’
서호는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감지하고는 한숨을 삼켰다.
‘당연한 건가.’
문 앞을 지키는 이는 고작 두 명이었으나 제대로 된 운동을 해본 적 없는 서호는 자신 있게 그들을 제압하겠다고 나설 수가 없었다.
‘괜히 자극했다간 문제만 더 커지겠지.’
역시 지금 당장 자력 탈출은 힘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