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13화 (113/155)

#113

“그리고 현장에서 발견된 쪽지가 하나 있습니다.”

“쪽지?”

“네.”

푸티가 쪽지를 로제타에게 건넸다.

“신녀의 글씨체와 일치한 것으로 보아 신녀가 쓴 쪽지인 것 같습니다. 믿기는 힘들지만 그림자 중에 죽은 사람은 없으니….”

로제타는 푸티의 말을 흘려들으며 쪽지를 살폈다.

[서호님은 무사할 겁니다. 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요.]

쪽지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이 쪽지를 받고 안도라도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 어쩌면 그 성격에 이쪽을 더 자극하기 위해 이 쪽지를 남겼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숨통을 끊어주지.’

그 여자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방법을 사용해 그 역겨운 입을 다물게 할 것이다. 쪽지가 로제타의 손에서 흘러나온 신력에 닿아 삭아 문드러지며 바닥으로 흩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푸티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 아리스도 조금 전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리스를 찾아가 그에게도 정보를 얻어 보는 건 어떨까요?”

로제타가 말없이 방을 나서자 푸티가 그런 로제타를 따라오며 보고를 이어 갔다.

“주변에 사람을 물려 뒀었기에 폐하와 마법사 아리스의 발견 모두 늦었습니다. 궁이 너무 조용한 것이 이상하다고 판단해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그림자에게 연락했지만 모두 반응이 없었고요.”

로제타는 깊게 침잠하지도, 그렇다고 타오르지도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그림자를 보내 폐하와 마법사 아리스를 발견했을 때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습니다.”

로제타가 딱히 반응을 내보이지 않아도 푸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가득했던 피 웅덩이의 주인은 아리스가 맞지만 몸의 상처는 거의 치료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말에 애써 무심함을 가장하던 로제타의 얼굴에 금이 갔다.

처음부터 그다지 견고하지 않았던 가면이었기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로제타가 다급히 물었다.

“서호가 한 건가? 납치되기 전 아리스에게 신력을 사용할 정도라면….”

“네, 서호님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그 말뿐인 확신에 매달리는 것이 우스웠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로제타를 감쌌다.

로제타가 눈을 질끈 감는데 그를 뒤따라오던 푸티가 로제타를 앞지르더니 몇 발자국 앞에 있는 문을 두드렸다.

“폐하, 여깁니다.”

로제타는 모래처럼 바닥으로 무너져 흩어지려는 이성을 박박 긁어모았다. 서호를 찾기 전까지는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살펴야 했다.

‘두 번의 실수는 안 돼.’

로제타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며 푸티의 안내에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아리스를 바라봤다.

“폐하.”

로제타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은 정신도 시간도 없었다.

“다른 건 됐어.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기다렸다는 듯 답이 돌아왔다.

“순식간에 일이 일어났습니다. 왕자에게 편지를 받던 서호님의 낌새가 이상해지고 그분이 저를 돌아보신 순간, 뒤에서 마나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아리스가 가슴팍을 더듬었다.

“분명 가슴이 뚫렸는데….”

로제타는 아리스의 몸에 아주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서호의 흔적을 기민하게 찾아내고는 답했다.

“서호가 치료했을 거다.”

“…그랬겠죠.”

“무언가 더 생각나는 건?”

기억을 더듬으며 침묵하던 아리스는 로제타의 인내심이 닳아 없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얼핏 거울이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거울?”

거울, 그 상황에서 그들이 말한 거울이 평범한 거울일 리가 없었다. 절로 짜증스러운 숨이 새어 나왔다.

“움직일 수 있나?”

“네.”

아리스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제타는 아리스를 뒤에 달고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본래 자신의 것이기에 신력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아리스를 구하기 위해 서호가 순순히 그들에게 잡혀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너 따위를 구하겠다고….’

하지만 그 분노는 다시 죄책감과 스스로를 향한 혐오로 이어졌다. 계획대로 자신이 그를 구하러 가기만 했다면 다 해결됐을 문제였다. 로제타는 다시 한번 평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리스의 상처를 완벽히 치료할 수 있었다면 서호는 무사한 게 맞다고, 그들이 어떤 목적 때문에 서호를 납치한 것이라면 적어도 지금 당장 서호를 어떻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반복적으로 생각했다.

‘서호는 괜찮을 거야.’

안겔의 쪽지를 전부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쪽지를 떠올리며 감정을 죽이려 노력했다. 서호가 없을 때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늘 잔잔하다 못해 얼어 있던 마음속 파도가 오늘따라 말을 듣지 않았다.

풍랑이 치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돌아온 방.

로제타는 곧장 방 한쪽에 자리한 파티션으로 다가갔다. 한때는 그 거울에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으려 노력했던 때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전혀 바라보지도, 존재 자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서호와 거울을 함께 가져간 이유가 뭐지?’

서호와 자신을 만나게 해준 거울이었기에 방에 두긴 했지만 사실 서호가 이곳에 온 이후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자와 안겔이 그 거울을 가져간 순간 그 가치는 달라졌다.

‘내가 모르는 비밀이 거울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리고 바라본 파티션 너머에는 사라졌을 거라 예상한 거울이 있었다. 푸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거울이 있는데요?”

하지만 로제타나 아리스는 푸티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거울이 있긴 했지만 이게 그들이 찾던 거울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만든 가짜군.”

로제타의 말에 아리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는 자신의 모습조차 비추지 않는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사브리나 공작을 불러야겠다.”

언제나 그렇듯 순종적인 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푸티의 답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푸티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로제타의 명령을 거부했다.

“아니요, 괜히 공작을 불렀다가는 시간만 더 잡아먹을 게 뻔합니다.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끌 테니까요. 지금은 진실을 아는 것보다 서호님을 데려오시는 게 급선무가 아닐까요?”

거울을 눈에 담고 있던 로제타가 그를 돌아보자 푸티가 흔들림이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폐하와 아리스라면 다른 귀족들이 눈치채기 전에 서호님을 데려오실 수 있으시죠? 물론 이게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지만….”

로제타가 완전히 몸을 돌려 푸티를 돌아봤다. 그러자 푸티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간청했다.

“진실을 아는 것도, 이 일과 관련된 사람을 벌하는 것도, 양국의 관계를 걱정하는 것도 모두 서호님을 데려온 후로 미루시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복잡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더 이상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

푸티는 자신의 불안이 현실이 된 것이,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던 황제가 처음으로 실패를 한 것이 지금이라는 사실이 정말 억울했다.

가장 최악의 방식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실패.

언제나 완벽하던 로제타가 처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답답함이 밀려왔다.

‘지금은 이러실 때가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주제넘게 입을 열었다.

황제인 로제타가 아무런 언질 없이 왕국에 들이닥치는 것이, 로제타가 제국을 비운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면서도 그에게 얼른 서호를 구하러 가라고 이야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서호님을 잃고 나면 그 후는 더 걷잡을 수 없어.’

그러니 지금은 다른 건 모두 뒤로 미뤄 두고 서호만을 생각해야 했다. 푸티가 로제타의 뒤에 있는 아리스를 바라봤다.

‘아직 혈색이 별로 좋지 않아.’

아무리 상처가 치료됐다고는 하지만 막 정신을 차린 아리스를 왕국으로 보내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로제타보다 먼저 깨어난 아리스에게 납치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호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지 않으면 훗날 로제타의 화가 그에게도 미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아리스가 서호님의 구출에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해.’

푸티가 여전히 자책 중인 게 훤히 보이는 아리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리스는 얼른 정신을 차려야 했다.

‘물론 가장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 폐하고.’

푸티가 다시 고개를 돌려 로제타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는 안정되어 보이는 로제타를 마주했다.

“폐하.”

푸티가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로제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야지.”

로제타가 고개를 돌려 아리스를 돌아보자 그가 바로 입을 열었다.

“이아코스 왕국에도 황궁처럼 궁을 감싸는 마법이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바로 그쪽으로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정확한 좌표를 알 수도 없고요. 하지만 왕국의 수도까지는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의 말을 들은 로제타가 다시 푸티를 쳐다보자 푸티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했다.

“누군가 폐하의 행방을 궁금해한다면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셨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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