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7장. 추억
로제타는 그에게 뻗어지는 가녀린 손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여인이 애틋한 얼굴로 속삭였다.
“미안해. 아가.”
‘아가’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었지만 로제타는 얌전히 여인의 손길을 받았다.
“정말 너무 미안해.”
여인, 그러니까 로제타의 어머니 신시가 종종 그를 찾아와 사과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로제타는 어떻게 해야 이 불편한 자리가 끝이 나는지 알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로제타의 입에서 여인의 것이라기에는 조금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신시의 눈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그저 손을 들어 방울방울 떨어지는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 내렸다.
신시가 더욱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겁이 나서…, 내 욕심 때문에 네 인생을 망쳤어.”
그리고는 로제타가 뭐라 답을 하기도 전 덧붙였다.
“훗날 네게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면 나는 그 죄를 도대체 어떻게 다 감당해야….”
로제타는 계속해서 신시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니. 그런 게 가능한 걸까?
로제타는 오늘따라 눈물을 멈추지 않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없을….”
하지만 그 순간 목이 턱 막힌 것처럼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목을 부여잡은 것만 같았다. 로제타가 눈을 찌푸리며 입을 뻐끔거리는데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변했다.
로제타는 파리한 낯으로 침대에 누워, 덜덜 떨며 손을 내미는 신시를 바라보다가 그 손을 붙잡았다.
신시가 옅은 미소를 흘렸다. 항상 죄책감이 가득하던 얼굴에 피어난 옅은 안도감에 로제타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신시가 로제타의 손을 단단히 붙들며 말했다.
“이 어미는 정말 여한이 없어….”
마음고생이 심하기도 했지만, 신시는 본래도 몸이 많이 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신시는 로제타가 신에게 이름을 받고 새로운 제국의 후계자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빠르게 무너졌다.
그러니까 남들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신의 힘을 받은 로제타는 알았다. 신시는 아주 오랜 시간, 차곡차곡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이제 와서 신력을 사용해 봤자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그래서 로제타는 신시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에 대한 복수는 이미 했다. 잔뜩 겁에 질려 새벽에 휘감기던 형제의 얼굴을 떠올리던 로제타를 신시가 불렀다.
“로제타, 아가.”
로제타가 상념을 지우고 신시를 바라봤다. 그리고 로제타는 지금이 바로 신시와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가. 이제 너를 옥죄는 것은 없어.”
로제타는 그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신시의 시선에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신시가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자유롭게 너를 표현하면서 살아.”
한때 신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누군가와 길게 대화를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웃어주는 것도, 친구를 만드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드는 것도 불가하다.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
‘절대 그 누구에게도 너를 보여서는 안 돼.’
성격, 취향, 감정까지 모든 것을 숨기고 살아야 한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속삭이던 어머니. 자신보다도 더 괴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로제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리고 지금, 신시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네 세상을 만들렴. 과거는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채우는 거야. 나도, 내가 했던 말들도 전부 잊어.”
신시가 전에 없이 강건한 눈을 하고 말했다.
“네 사람을 만들어.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을 네 주위에 채워.”
조금 혼란스러운 것도 같았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아. 너는 그래도 돼.”
신시의 또렷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쟁취하고 매달려. 더 이상 그 무엇도 포기하지 마.”
로제타의 손을 붙들고 있던 손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로제타. 사랑하는 내 아들. 앞으로 네게 행복한 일만 있길….”
그 말을 끝으로 신시의 숨이 멎었다. 아니, 멎어야 했다. 하지만 신시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아가.”
신시가 강하게 로제타의 얼굴을 붙잡으며 화를 내듯 말했다.
“일어나!”
절대로 어머니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커다란 목소리를 끝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
눈꺼풀이 무거웠다. 꿈에서 쫓겨난 것에, 그리고 자신을 쫓아낸 것이 유약하던 어머니였다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느끼던 것도 잠시 로제타는 흐려지려는 정신을 붙들고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뭘 하고 있었지?’
몽롱한 머리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리고 조금씩 피어나는 기억의 조각들. 집무실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면서 쓰려졌던 것 같았다.
‘기절이라니.’
생전 처음 해보는…, 처음이 아니었다. 분명 전에 한 번 더 이렇게 정신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네게 신력을 넘겨줬을 때.
‘네게?’
로제타는 기억의 한 틈을 잡아당겼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검은 머리, 달콤한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갈색빛 도는 눈이 자신을 볼 때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웃음을 볼 때면 존재는 하는 건지 의심되던 심장이 크게 뛰며 스스로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며 답해주던 목소리.
‘로제타.’
귓가에 환청처럼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자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로제타가 눈을 번쩍 뜨며 몸을 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서호?”
로제타는 급하게 신력을 퍼트려 서호를 찾았다. 넓고 크게 퍼지는 신력이 그의 반쪽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지금 그가 있는 방을 시작으로 황제궁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던 신력이 커다란 황궁 내부를 빠르게 뒤덮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뒤져도 적어도 황궁 내에서는 또 다른 새벽을 찾을 순 없었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짓이겨진 입술이 엉망으로 찢어지며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하지만 로제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방문이 열리면서 푸티가 나타났다.
“신력이라니…, 폐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마주한 로제타가 다급히 물었다.
“서호는?”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로제타는 그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로제타가 발을 앞으로 내디디는데 푸티가 서둘러 그를 부축하듯 다가왔다.
“폐하, 우선 진정을….”
로제타가 그 손을 뿌리치며 다시 한번 물었다.
“서호는?”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인 푸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아코스 왕자가 데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자들은 뭘 한 거지?”
자신이 쓰러졌다고 해도 그림자들이 서호를 지키면 됐었다. 나름 제국에서 날고 긴다는 것들을 자신의 밑에 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것들보다는 쓸 만하니 자신의 손과 발이 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것들은 서호가 왕자에게 끌려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었단 건가?
푸티의 낯빛이 흐려졌다.
“신력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원과 가까운 곳에 있던 인원들도 왕자에게 부상을 당했습니다.”
전부 쓸모없는 것들뿐이었다. 로제타 그 자신까지 포함해서.
“급하게 불러 모은 그림자들이 왕자의 마나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동마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 중입니다.”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치가 떨렸다. 자괴감이 로제타의 몸을 뒤덮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들의 연속이었다.
“서호님과 왕자, 그리고 신녀까지 총 세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마법사들은 현장에서 이아코스 왕국으로 이동하기에 충분한 마나가 사용됐다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로제타는 최대한 감정을 내리눌렀다. 지금은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이아코스 왕국으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마법사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왕국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를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해 저희끼리 결단을 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보좌관들에게 지금 일어난 일들을 알릴 수도 없고요.”
그림자들끼리 왕국으로 쳐들어가는 일을 마음대로 진행할 수 없었던 것도, 그렇다고 보안 등급이 낮은 보좌관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는 것도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자신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호님과 함께 있었던 마법사 아리스도 부상으로 아직 깨어나지 않아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내지 못하기도 했고요.”
마법사 아리스는 로제타도 인정하는 꽤 능력이 있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왕자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누굴 탓하겠어.’
모든 건 다 자신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서호를 지킬 수 있다고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 믿었다. 차선책을 만들어 두지 않은 건 오롯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번 기절도 서호와 연관된 거겠지.’
신력을 매개로 서호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어림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여러 방안을 만들어 뒀어야 했다. 행복에 젖어, 자만심과 오만함 때문에 멍청하게 서호를 놓쳐버렸다.
‘만약 서호가 다친….’
로제타는 그럴 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왕자는 서호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으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로제타는 여전히 서로 연결된 새벽에 집착적으로 매달리며 푸티에게 물었다.
“…서호가 사라지고 얼마나 흘렀지?”
“반나절이 지났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가겠다고 했는데 면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