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사람이 둘러앉자 안겔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동석이 무례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제대로 된 답을 듣기 위해서는 그녀도 함께 있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순순히 답해주진 않겠지만.’
이왕 자리가 마련된 김에 제대로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에요. 함께하면 좋죠.”
서호의 답에 안겔이 감사하다 말하며 아리스를 돌아봤다.
“마법사 아리스도 함께하는 게 어때요?”
“아니요. 저는 호위니까요.”
“흠, 그래요.”
아리스가 단호하게 제안을 거절했으나 안겔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냥 의례적인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모든 행동이 다 의심스러워.’
갑작스레 이 티타임에 나타난 것도, 호위 역할로 따라온 아리스에게 자리에 참석하지 않겠냐 제안한 것도.
언제나 그렇듯 웃고 있는 저 얼굴까지.
하지만 서호는 그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직 푸티는 이 넓은 정원을 다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러니 한동안은 평범한 대화를 이어 나가야 했다.
***
집무실에 앉아 서호의 기운을 살피는 로제타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오른쪽 볼을 매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세게, 오래 어루만졌는지 볼 한쪽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서호에게 이야기를 전해준 푸티가 돌아왔다.
“폐하.”
사용인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행동에 나선 푸티.
그는 자신에게는 처음 이야기를 전했던 사용인을 보내고 서호를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전했다. 혼란스러웠을 와중에도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 꽤 흡족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평소라면 듣기 싫었을 거친 숨소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푸티가 크게 숨을 몇 번 더 들이쉬더니 이내 차분해진 숨소리를 내며 보고했다.
“서호님께서는 이대로 만남을 지속한다고 하셨습니다.”
정확히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서호의 기운이 처음과 달리 매우 잔잔해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에 로제타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여기서 서호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흔들린다면, 서호의 신력이 무의식적으로 조금이라도 새어 나온다면 로제타는 망설임 없이 달려 나갈 생각이었다.
‘신력은 서호를 지키려고 하니….’
서호에게 위험이 된다고 판단을 내리고 자기 멋대로 빛을 내뿜던 신력을 로제타는 기억하고 있었다.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푸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로제타가 아무런 말 없이 푸티를 돌아봤다. 긍정의 말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허락을 읽어낸 푸티가 질문했다.
“이번 만남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제부터 참 많이 듣는 질문이었다. 물론 가장 많이 들은 건 서호에게서였지만.
도대체 왜 이 만남을 받아들인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서호에게 로제타는 최선을 다해 그가 납득할 수 있고 자신을 더 좋아할 수 있을 만한 답을 골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지.’
물론 서호에게 한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 속에 이 음습한 마음을 숨겨뒀을 뿐.
로제타는 서호에게는 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 크게 몸을 부풀리는 이것을 토해내기로 했다.
충실한 시종은 이 이야기를 서호에게 전하지 않을 것이다.
“서호가 그자를 완전히 쳐내야 하니까.”
“서호님이요?”
“그래, 이번 만남에 그자가 진실을 말하든 거짓을 말하든 서호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
서호의 마음속에 왕자가 있는 게 싫었다. 아주 작은 자리라고 해도. 그러니 이 기회에 확실하게 그자를 정리하는 것이다.
‘이미 서호는 의심을 가득 품고 있으니 호감이 사라지는 것도 금방이지.’
로제타가 냉정하게 왕자를 쳐다볼 서호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삐죽 올리는데 푸티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로제타가 별다른 답 없이 손만 휘저었다.
서호의 주변에서 사람들을 물린 것처럼 로제타는 집무실 옆의 사람들도 전부 물렸다. 마찬가지로 괜히 그의 힘에 애먼 이들이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주변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을 스스로를 잘 알았으니까. 웬만해서는 뒤처리가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서호를 위해서라도 로제타는 신력으로 인한 피해를 가능한 최소화할 생각이었다.
‘언젠가 서호도 신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힐 테니 좋은 것만 보여줘야지.’
그 사실을 밝혔을 때 로제타 때문에 신력에 의해 피해를 받은 이들이 서호를 부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 눈빛에 서호가 상처를 받는다면?
‘절대 안 될 일이지.’
신력은 오로지 서호와 로제타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둘 사이의 운명을 돋보이게 해주는 장치로 남아 있어야 했지, 서호의 행동을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됐다.
‘언제나 최고의 것만 주어야지.’
푸티가 집무실을 떠나고 로제타는 한동안 안정적인 서호의 기운을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호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은 아름다운 신력의 흐름을 눈을 감고 세세하게 살피던 로제타는 신력의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하지만 로제타는 바로 서호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힘을 끌어올리는 순간 시커먼 어둠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
대화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분명 전에도 저 두 사람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이렇게 죽이 잘 맞지 않았다.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이긴 했지만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도 선이 없는 건 아닌데.’
하지만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두 사람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쓸모없는 대화를 나눌 만큼.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서호는 꽤 재밌게 지금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서호는 다시 한번 차로 목을 축이며 드디어 나타난 틈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답신이 빨리 돌아왔네.”
오늘 윤이 만남을 청한 이유를 이야기하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몸이 괜찮아지시고 있거든.”
“다행이다.”
실제로 그레이스가 아픈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진짜라면, 그리고 그녀의 건강이 좋아진 것 역시 진짜라면 충분히 기뻐할 만한 소식이었다.
그녀가 아들과 함께 이쪽에 무슨 짓을 하려고 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서호의 말에 생긋 웃은 윤이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들었다.
“지금 줄게.”
언제나 그렇듯 익숙한 문양이 박힌 편지 봉투였다. 이아코스 왕실의 문양이 찍힌 고급스러운 봉투.
서호는 손을 뻗어 윤이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느껴진 무언가에 윤을 가만히 바라봤다.
편지를 받으며 그와 스친 손. 그리고 그 순간 느껴진 이상한 느낌.
‘이 데자뷔는….’
분명 느껴 본 적 있는 거였다. 정확히 어디서 느낀 것인지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걸 분명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서호?”
서호가 편지 봉투를 받은 자세 그대로 굳어 있자 윤이 이상하다는 듯 서호를 불렀다. 하지만 서호가 그 부름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안겔과 아리스 역시 이상하다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서호님?”
뒤에서 걱정스러워하는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서호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입을 열면 막 떠오르려는 무언가가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서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뒤져 가물가물하게 튀어나올락 말락 하는 느낌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서호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아리스가 서호를 부를 무렵 서호는 이 기묘한 데자뷔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리스.”
편지 봉투를 가볍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러니까 한때 꽤 오랜 시간 만졌던 것. 껍데기를 만졌을 때의 느낌.
‘생명력이 전혀 없어.’
명확하게 무엇이 이상한지 깨달은 서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아리스를 돌아봤다. 그리고 아리스와 눈이 마주하자마자 그 뒤에 갑작스레 나타난 자를 발견했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미 늦었다.
마법이 휘몰아치고 서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윤?”
조금 전까지 서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어느새 아리스의 뒤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뒤늦게 윤의 존재를 알아차린 아리스가 뒤를 돌아봤지만 서호의 예상대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털썩-.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아리스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서호는 바닥에 쓰러진 아리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자신의 코앞으로 뻗어진 윤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 이마에 닿은 차가운 손끝. 윤이 아리스의 뒤에서 나타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서호는 그의 몸을 감싸는 마법을 느끼며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리스.’
흐려지는 시야로 아리스의 상체 밑으로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에게서 흩어지는 생명력.
‘이대로 두면 죽을 거야.’
서호는 선택해야 함을 알았고 선택을 내렸다. 바닥에 닿은 발바닥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아리스의 몸을 타고 오르는 걸 보며 서호는 안도했다.
‘죽지 않을 거야.’
물론 그를 구하느라 자신에게 걸린 마법을 처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괜찮을 것이다.
마법을 건 순간 윤의 눈에 비친 미안함과 죄책감을 읽었기에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서호는 이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천천히 내리감았다.
둔해지는 감각 너머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거울은요?”
안겔의 목소리였다.
“챙겼다.”
“그럼, 가죠.”
“그래.”
그 말을 끝으로 또 한 번 자신을 감싸는 마법을 느낀 서호는 그 여파로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로제타.’
하지만 아무리 로제타를 불러도 그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