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하지만 서호는 그 자신도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던 진심을 로제타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서호가 머뭇거리며 로제타의 이름을 불렀다.
“로제타.”
로제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서호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만남을 권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대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주기 위해서야.”
손목뼈를 부드럽게 감싼 커다란 손이 따뜻한 온기를 전달했다. 서호가 그 손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정리할 시간이요?”
“양쪽 모두의 말을 들어 보는 편이 좋지. 그대가 왕자에게 호감이 있으니 더욱.”
서호가 쉽게 답하지 못하는데 로제타가 서호의 손목을 끌어 손목 안쪽 얇은 살에 입을 뭉근하게 맞추더니 이야기했다.
“내가 그대를 왕자와 만나게 할 수 있는 건, 내가 그대를 믿고 나를 믿기 때문이야. 서호 그대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대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
민감한 살에 따뜻한 숨결이 닿으니 목 뒤가 쭈뼛 섰다. 하지만 서호와는 달리 로제타는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그를 다독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만나서 마음 편하게 묻고 와도 괜찮아. 내가 지켜줄 테니까.”
부드럽게 떨어져 나간 손을 흘깃 바라보며 서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말 아무거나 다 물어도 돼요? 괜히 이쪽의 정보만 주는 거면….”
자신 때문에 로제타가 피해를 볼까 걱정이 됐지만 로제타는 여전히 걱정이 없어 보였다.
“오늘 저녁 공작을 부를 거야. 중요한 이야기는 그때 들을 테니 그대가 나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어.”
온기 가득하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다시 서호를 바라보는 로제타의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 자리의 이유는 딱 하나야. 그대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 그러니까 가서 이야기를 나눠 봐.”
“…알겠어요.”
서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타가 달래듯 말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목숨이 아깝다면 감히 제국의 심장부인 황궁에서 움직일 리가 없으니까.”
“네.”
그 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마음의 짐이 사라지려는데 로제타가 말을 덧붙였다.
“오늘은 옆에 그림자들이 없을 거야. 마법사 아리스는 그대의 옆에 있겠지만.”
“왜요?”
“혹시 위험하면 내가 대신 나설 거니까. 괜히 주변에 사람이 있어 봐야 휘말리기만 할 뿐이지.”
로제타가 직접 나서다니. 반쪽짜리나마 신력의 힘을 알고 있는 서호는 이제 다른 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괜찮아요?”
“그림자 내부에서도 그의 실력은 손에 꼽히더군. 생각보다 실력이 꽤 괜찮아. 스스로를 지킬 정도는 돼. 그리고 여태껏 그가 항상 그대를 지켰으니 오늘 자리를 비우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 같은 아리스의 동행에 서호가 더 이상 보탤 말은 없는 것 같았다. 서호가 애써 찝찝한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아리스도 혹시 모를 상황을 알고 있는 거죠?”
“그래.”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바로 움직일게.”
“…네. 그리고 이것도 있으니까요.”
서호의 손끝에서 하얀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자 로제타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리고는 서호에게 다가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녀와.”
어깨를 감싸고 껴안듯 다가온 몸. 서호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들어 로제타의 볼에 입을 맞췄다.
“다녀올게요.”
어깨를 붙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
조금 전까지 여유롭고 어른스러웠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볼에 입을 맞추는 것만으로 바짝 얼은 로제타를 보며 장난스레 웃은 서호는 로제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다행히 서로에게 민망하지 않게 아리스는 막 방 앞에 도착한 모양새였다.
서호가 아리스를 데리고 돌아온 푸티에게 로제타를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며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방 안쪽에서 푸티가 로제타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려 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있던 서호는 얼굴에 닿는 아리스의 시선을 느끼고 웃음을 갈무리했다.
“아리스, 오늘 이야기 들었죠?”
아리스는 다행히 서호의 웃음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려는 것 같았다.
“네. 긴장되십니까?”
“약간요.”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그리고 그 질문에 돌아올 답이 걱정됐다.
‘거짓말을 해도, 진실을 말해도….’
윤이 어떤 답을 해도 그에 대한 실망만 가득할 것 같았다. 서호가 작게 한숨을 쉬는데 아리스가 서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폐하께서 지켜보고 계시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이시려고 사람들도 이렇게 다 물리지 않았습니까? 신경 쓸 이들이 없다면 폐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강하시니까요.”
서호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경 써주는 게 고마워서 서호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로제타에게는 속마음을 전부 다 보여도 이상한 시선을 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속마음을 들켜도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리스에게는 윤에 대한 호감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서호가 말을 아끼는 걸 긴장 때문에 침묵한다 여겼는지 아리스는 그 후로 별다른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도착한 정원.
윤보다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은 별로 큰 차이가 나지는 않지만 최대한 집무실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예쁘네.’
처음 윤과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사용했던 그 정원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 살피며 서호는 궁 안에 있을 로제타의 기운을 느껴 봤다.
그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자 자연스레 주변을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들의 기척도 느껴졌다.
‘정말 오늘따라 사람이 없네.’
힘을 편하게 쓰기 위해 사람을 물렸다는 말처럼 서호의 주변에는 사용인들도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정원에 차려진 이 티 테이블 역시 미리 준비해둔 거였고.
어색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서호는 집무실 안에 있는 로제타의 기운을 느꼈다. 자신의 것과 달리 검은 장막을 휘감은 로제타.
‘하지만 마냥 검기만 한 건 아니야. 그 속에 담긴 이 반짝이는 건….’
반짝거리는 검은 하늘에 수놓아진 수많은 별과 은은하면서도 사람을 홀리게 하는 달의 매력을 전부 가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운이었다.
그 얌전한 기운을 느끼자 잘게 떨리던 심장이 잔잔해졌다. 부드럽고 온화하다기보다는 냉철하고 차갑지만 동시에 정적이면서 모든 걸 포용할 듯 깊었다.
그 깊은 어둠에 몸을 맡기다 보면 계속해서 반짝이는 빛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입가에서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래, 로제타가 있어.’
이렇게 강인하고 단단한 사람이 자신의 편이었고 언제라도 자신에게 달려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길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윤에게 실망하더라도….’
로제타가 있으니 자신은 괜찮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잔잔해졌다. 때마침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도 느껴지자, 서호는 기다리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다가올 상대를 기다리던 서호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지금 다가오는 사람은 한 명이 아니라….
그때 정원에 난 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푸티?”
갑자기 푸티가 이곳에서 왜 나온단 말인가? 서호가 의아함을 표하는데 푸티가 거친 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아리스가 비틀거리는 푸티를 붙들어 주는데 푸티가 감사 인사도 건네지 않고 곧바로 서호를 돌아봤다.
“…하, 서호님.”
빠르게 뛰어온 탓인지 거친 숨 때문에 말은 쉽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자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아무도 정원에 들어오지 말라고….”
그때 푸티가 그 말을 끊어내며 말했다.
“왕자가 혼자가 아니…!”
미처 끝맺어지지 못했으나 서호는 푸티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서호야.”
푸티의 바로 뒤에서 나타난 윤. 그리고 이어진 또 하나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서호님?”
초대받지 않은 손님, 안겔의 등장이었다. 푸티가 불안한 눈으로 어떻게 하냐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푸티가 안다는 건 로제타도 안다는 소린가?’
여전히 잠잠한 로제타의 기운을 느끼자 조금 놀랐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졌다. 서호가 아리스를 돌아봤다.
그러자 미간을 좁히고 있던 아리스가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역시 이 상황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 사람의 의견이 같았기에 서호는 큰 걱정 없이 푸티를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로제타가 아나요?”
“네. 지금쯤이면 보고를 받으셨을 거예요.”
“그럼 됐어요.”
안겔의 등장으로 변하는 것은 없었다. 결론을 내린 서호는 급하게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땀이 송골송골 나도록 뛰어온 푸티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고마워요. 푸티. 그리고 이만 가 봐요. 일이 많잖아요.”
혹시 이 일에 푸티가 휘말릴까 걱정이 됐다. 그 걱정을 읽어낸 푸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서호님.”
“그럼.”
서호와 아리스를 마주 볼 때만 해도 흔들림 가득했던 얼굴은 윤과 안겔에게로 돌아가자 친절한 시종의 것으로 변모했다.
푸티가 두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뒤 자연스레 정원에서 멀어졌다.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호가 두 사람의 인사를 받아주며 테이블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