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09화 (109/155)

#109

어느새 미적지근해진 차가 떫은맛을 냈으나 안겔은 차분하게 찻잔을 비워갔다. 그리고 티포트 안의 차가 완전히 빌 때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주일.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뿐이네.”

안겔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안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는 공작의 등에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방 안에는 안겔뿐이었다.

안겔은 테이블 위에 놓인 공작의 찻잔을 바라봤다. 전혀 입도 대지 않은 차.

‘나를 믿지 못할 테니.’

그러니 공작은 지금도 자신을 믿는 건 아니었다.

‘딸을 믿는 건가.’

안겔은 전날 프레이를 만나고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여태껏 그녀가 프레이에게 가진 감정들이 정말 전부 착각에서 비롯된 일인지, 아니면 왕자에게 협박을 받는 이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기댈 누군가가 필요해 흔들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설령 여태까지의 모든 것이 안겔의 착각이었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친했던 시간보다 멀었던 시간이 더 길었고,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악감정들과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겔이 공작에게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신녀니까.’

아집을 부린다거나 제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안겔은 신녀가 된 이후 자기가 행한 일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은 더 이상 누군가의 헌신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일 역시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 혼자서 할 수 있어.”

그러니 이 일에는 당사자 외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다.

***

윤은 그의 방을 찾아온 안겔을 거부하지 않았다. 안겔의 방은 윤의 방과 가까웠고 따라서 윤은 안겔의 방에 누가 찾아왔었는지 알고 있었다.

‘사브리나 공작이라니.’

안겔이 여러모로 압박을 받는 게 확실했다. 안겔은 윤이 자리에 앉기도 전 입을 열었다.

“알겠지만 공작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안겔이 자리에 앉는 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공작이 거울에 대해 알고 있더군요.”

속이 타는지 안겔은 윤이 따라주지도 않는 차를 직접 따라 마셨다. 그 모습을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윤이 중얼거렸다.

“기록이 더 있었던 모양이지. 신전에서 사람이 찾아온 것도 그 이유였겠군.”

“맞아요.”

“그대의 실수군.”

빈정거리듯 말하는 윤의 말투에 눈썹을 치켜올린 안겔이 잔을 거칠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것도 맞고요.”

안겔은 조금 흥분해 있는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예상보다는 침착해 보였다. 윤이 그 점을 지적했다.

“생각보다 차분한데?”

그러자 안겔이 온 얼굴을 이용해 화사하게 웃었다.

“그야 저 혼자 해결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 웃음에는 숨기지 않은 통쾌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순간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도 같이 해결해야 한다?”

어이없다는 듯 돌아간 윤의 답에 안겔이 당연한 걸 물어본다며 중얼거렸다.

“그야 전 전하의 약점을 알고 있는걸요? 저도 혼자는 안 죽어요.”

“하.”

서로의 약점을 잡은 지금 두 사람은 협력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한 명이 일을 치르기 전 발목을 잡힌다면 다른 이의 발목까지 함께 끌고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윤이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자 안겔의 얼굴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자, 이제 무승부죠?”

전날의 패배가 꽤 아팠던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한 방 먹이려는 걸 보면.

‘자존심이 강한 거겠지.’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게 뻔히 보였다. 그리고 그 성정을 생각해 보면 그녀가 원하는 건 하나일 테고.

“뭘 원하지?”

그녀가 원할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면서도 윤이 질문을 던지자 안겔이 웃음을 지우고 답했다.

“뭘 계획하시든 일정을 앞당기세요. 길어야 일주일 남았습니다.”

“일주일이라.”

윤이 곤란함을 드러냈으나 안겔은 흔들림이 없었다.

“부족하셔도 별수 없어요.”

그래,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필요한 정보도 모두 모은 시점이니 굳이 시간을 더 끌 필요도 없었고.

하지만 그녀에게 모든 계획을 알려줘도 될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안겔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윤은 다시 한번 그녀를 시험했다.

“나를 도와주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할 거지?”

안겔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이미 끝을 정하고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뻔뻔하게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는 그 시선에 윤은 황당함을 넘어 감탄했다. 참 대단한 여자였다.

“나를 들먹이겠다?”

“네.”

하지만 자신을 이용한다고 해서 이 여자가 무사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서호가 이 일에 포함된 이상 그렇게 해도 그대의 죄가 사라지진 않을 텐데?”

저 여자가 원하는 건 서호가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이고, 그렇게 된다면 황제는 물불 가리지 않고 이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칼을 뽑아 들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해도 안겔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윤의 지적에도 안겔은 차분했다.

“상관없어요. 왕국에서도 분명 말이 나올 텐데요. 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 틈을 타서 뭘 하려고? 아무리 그대가 신녀라도 황제의 화를 피할 수는 없어.”

윤의 지적에 안겔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저는 신녀니까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라도 당장은 괜찮을 거예요. 왕자 전하와 달리.”

윤이 정한 끝을 아는 신녀가 뻔뻔하게 말했다.

“되도록 전하께 화살이 돌아가도록 할 거예요. 끝에 가서 제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는 지켜보면 알겠죠.”

안겔이 다시 한번 잔에 차를 가득 따르더니 마찬가지로 차를 가득 따른 새로운 잔을 윤의 앞으로 밀어줬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나 가만히 있지 않으나 결과가 같다면 제가 목표했던 바는 이뤄야겠습니다.”

동의하냐는 듯 안겔이 찻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끝을 예상하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윤이 술잔을 부딪치듯 찻잔을 들어 그녀와 잔을 맞췄다.

쨍-.

잔을 비운 윤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좋아. 그럼 계획을 짤까?”

이제 그의 계획을 알려줄 차례였다. 물론 아직 그녀를 완전히 믿지 않았기에 전부를 말하진 않았다.

***

서호는 나갈 준비를 하면서 로제타에게 물었다.

“정말 만나도 괜찮겠어요?”

서호의 물음에 로제타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살피고 있을 테니까.”

오늘 윤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집무실과 가까운 정원이었기에 로제타와의 거리가 멀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도 서호는 이 만남이 조금 불편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사브리나 공작이 황궁을 다녀간 날로부터 고작해야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브리나 공작이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않았다면서.’

로제타에게 전해 듣기로 안겔과의 만남 이후 공작이 조금의 유예를 달라 부탁했다고 했다.

제대로 된 정보를 모아오겠다고.

물론 로제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시간을 끄는 거라고 했잖아.’

사브리나 공작의 말을 전하면서 비웃음을 흘리던 로제타를 기억하는데 그는 자신과 만나고 싶다는 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나고 오는 게 좋을 거라고 했지.’

윤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기대가 된다고 했다. 안겔이 공작과의 만남 이후 바로 윤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수상한 행동을 하면 붙잡으면 될 텐데.’

윤은 이아코스 왕국의 왕자이고 안겔은 신전의 사람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증거 없이 붙잡기 힘들다는 아리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건드렸다가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로제타의 입장이 난감해진다는 것도.

‘로제타가 아무리 강해도 막무가내로 구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

하지만 둘만 남은 밤 로제타가 서호의 귓가에 속삭인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대와 관련된 일이니 최대한 잡음 없이 처리하고 싶어. 혹여 그대의 평판에 누가 될 일은 만들고 싶지 않고.’

역시 지금 로제타의 행동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서호는 자신의 평판보다는 로제타와 자신의 안전, 그리고 서로를 걱정하는 지금 상황을 피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서호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로제타를 돌아봤다.

“로제타, 정말 나는 안 만나고 싶다니까요?”

서호는 이번에는 전날처럼 만나는 게 위험하지 않겠냐고 묻기보다는 스스로의 생각을 말했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면 그 무엇도 시키지 않을 로제타를 알았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정말?”

로제타가 서호의 말을 부정하고 나온 것이다. 서호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그러자 로제타가 다정한 낯으로 서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만나고 싶잖아.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고. 신경 쓰이잖아.”

“그게 무슨….”

“서호. 그대는 왕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호감이 있어.”

“아니에요.”

서호가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으나 로제타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호감은 아니더라도 같은 나라에서 온 이의 아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함께한 시간이나 편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신경 쓰고 있지.”

그리고 서호는 이번에는 로제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수상하던 이가 요 며칠 더 이상하게 구는 것을 알고 있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경 쓰였다.

“실제로 왕자도 그대의 앞에서는 조금 편하게 구는 편이었으니까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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