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아까 말씀드렸죠? 견습 신관은 1년에서 2년 정도의 기간을 가진다고요.”
“네.”
“바로 신관이 되지 않고 견습 기간을 가지는 이유는 몸가짐을 바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절을 배우고 글자를 배우고 신관으로서의 행동을 배우죠. 하지만 귀족들은 이미 그런 걸 다 알고 있으니까 보통은 1년 사이에 견습을 끝내곤 하는데, 프레이는 이례적으로 2년의 견습 기간을 꽉 채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리스가 검지와 중지를 들어 숫자 2를 만들며 말했다.
“그리고 2년간 안겔은 고아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박학다식해졌고요.”
“…교육을 한 건가요?”
“그렇다고 봐야죠.”
역시 왜 그렇게 사이가 멀어졌는지 궁금했다.
“왜 멀어진 건지는 알지 못하나요?”
그러자 아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지금은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데면데면한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일 궁금한 부분을 알 수가 없었다. 작게 한숨을 쉰 서호가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돌렸다.
“프레이 신관의 평판은 어때요?”
“사브리나 공작과 마찬가지입니다. 두루두루 평판이 좋습니다. 살갑고 밝은 사람은 아니지만 예의를 아는 귀족적인 사람이죠. 무엇보다 신앙심이 깊고요.”
“그래요?”
“굉장히 정순한 성력을 가진 자로 유명합니다. 신녀 안겔과 함께 귀족들이나 평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관 중 하나죠.”
어린 시절 함께했던 두 사람 모두 신전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미래에 교황이 될 거라고 거의 확실시되고 있기도 하죠. 못해도 대신관은 될 거고요. 사브리나 공작이라는 뒷배경이 아예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못하겠지만 개인이 가진 능력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렇구나.”
사브리나 공작도 그렇고 그의 딸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뒷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공작과도 그리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공작이 신전을 직접 찾아가지 않는 이상 볼 수 없기도 하고요. 기본적인 봉사를 제외하면 신전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여러모로 청렴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의문이 생겼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안겔과 별다른 친분도 없으면서 어째서 황궁을 찾아왔을까?
“도대체 왜 안겔을 찾아왔을까요?”
“알려진 것과 달리 아직까지 친분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죠. 아직 거기까지 알아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공작님을 부른 건가요?”
“그렇죠. 곧 알게 될 겁니다.”
이야기의 큰 틀을 알게 된 서호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도 알려줄래요?”
“네. 그러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돌아온 답에 서호가 감사 인사를 건네자 아리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이제 폐하도 예전만큼 여유가 없는 상태는 아니시니까요.”
“무슨 의미예요?”
이해 못 할 소리에 서호가 되묻자 아리스가 눈웃음을 쳤다.
“그냥 저희가 움직이기 편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건 전부 서호님의 덕이죠.”
능글맞게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스에 서호가 이상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저요?”
“네, 그러니 지금처럼 폐하와 좋은 사이를 유지해 주시죠. 빨리 진도나 팍팍 나가시면 더 좋고요.”
“하.”
진지한 이야기도 잠시, 또 장난을 치는 아리스에 서호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서호가 그를 노려보듯 바라보자 아리스가 연인이라고 별다를 게 있냐며 서호와 로제타의 모습을 지적했다.
“사실 지금 거의 연인이나 다름없다는 것 아시죠? 방을 나서기 전에도 입을 맞추시지 않습니까?”
“…….”
자연스레 볼과 입술에 입을 맞춘 로제타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준 스스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걸 모두 보고 있던 아리스와 푸티도.
순간 얼굴이 붉어진 서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서호의 귀로 장난기 넘치는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저도 새로운 정보를 얻으면 서호님께 바로 이야기해 드릴 테니 서호님께서도 사이가 진전되면 바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거랑 이게 같아요? 정말 웃긴다니까?”
서호가 발끈해 외치자 아리스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아리스에게 도움받은 이후로 이상하게 그에게 놀림당하는 상황이 굉장히 많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아.’
푸티나 로제타와는 달리 정말 친구 같은 느낌. 오랜만에 생긴 친구라는 존재가 반가웠다.
***
안겔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으나 그런 상태를 드러내지 않았다. 신녀로 지내는 동안 그녀는 여러 귀족을 만날 일이 많았고, 그중에는 로제타와 같은 황족은 물론이고 다른 왕국의 왕족들을 만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니 아무리 사브리나 공작이라도 내가 긴장할 리가 없어.’
사브리나 공작이 프레이의 아버지라 긴장이 되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부정한 안겔이 처음의 딱딱했던 분위기를 지우고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직접 내린 차를 공작의 앞으로 밀어줬다.
그리고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찾아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공작은 안겔이 건넨 찻잔을 받지도, 안겔의 말에 답하지도 않았다. 그저 처음처럼 안겔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곧은 눈동자. 참 프레이와 닮아 있었다. 안겔이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 건 처음이죠? 굳이 제가 아니어도 신전에 찾아갈 분이 계시니까요.”
그리고는 눈빛만으로 그녀를 압박하는 공작에게 먼저 그 이름을 꺼냈다.
“프레이 신관 때문에 찾아오셨나요?”
그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공작에게서 반응이 돌아왔다. 물론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틈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답이 돌아왔다는 소리다.
“정확히 따지자면 신녀 안겔, 그대 때문이지.”
긴 침묵이 깨지자 콱콱 그녀를 조여오던 주변 공기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공작의 반응 하나하나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는 스스로를 깨달은 안겔은 얼른 공작을 내보내기로 했다.
‘보아하니 공작도 모든 걸 알고 온 모양인데.’
안 그래도 프레이가 이쪽 일에 신경을 쓰고 있는 지금, 공작과 오래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안겔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 일은 순전히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요.”
안겔은 공작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시작을 제가 했듯 끝을 내는 것도 접니다. 아무도 이 일에 관여할 수 없어요.”
어찌 들으면 공작에게 내 일에 끼어들지 말라 강짜를 부리는 모양새였지만 그 속에 든 뜻은 그렇지 않았다.
프레이가 무어라 하든, 그녀를 이 일에 연관시키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 그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속뜻을 읽어냈을 공작이 덤덤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여기서 말하는 그분은 프레이를 말하는 걸까? 황제를 말하는 걸까? 하지만 상대가 누가 됐든 안겔의 답은 같았다.
“허락이 필요치 않은 일입니다. 제가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굉장히 오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런 안겔을 비웃지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안겔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정말 프레이를 너무 닮아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안겔이 답이 됐냐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공작을 응시하자 그가 다시 물었다.
“그분께 내가 알아낸 사실을 알려도 되겠나?”
공작이 말했던 그분은 황제였던 모양이었다.
안겔은 지난밤 내내, 그리고 오늘 새벽부터 공작이 오기 전까지 했던 생각의 결론을 이제야 내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던 건 자신이었으니 이 모든 일을 끝낼 사람 역시 자신이었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은 섞여서는 안 됐다. 안겔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자연스럽게요.”
“아직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순리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제 개인의 고집이긴 하지만 이 일을 가장 잘 해결할 방법이기도 하죠. 저만 이 일에 엮인 건 아니니까요.”
안겔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했다.
“그로 인해 제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생기면 지겠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다른 사람의 죄를 더하거나 덜지는 않을 겁니다.”
“일이 잘못되면 그대만이 아닌 모두가 피해를 보고 책임을 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 텐데.”
그러니 일이 잘못되기 전에 거울에 관련된 사실을 알려 책임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 공작이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혼자의 몸만 신경 쓰면 되는 안겔과 달리 공작은 책임지고 있는 이가 많았으니 당연한 걱정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저와 함께 책임을 질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신경 쓰느라 그분께서는 제국 내의 일에는 신경 쓰지 못할 겁니다.”
안겔은 공작이 반박하기 전 말을 이었다.
“물론 그분의 분노가 너무 커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다 추측뿐이군.”
“그렇네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완전한 확신은 할 수 없으니까요.”
안겔은 프레이를 똑 닮은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 선택해 주세요. 제가 입을 열기 전까지 잠시간 침묵해 주실지, 아니면 이 방을 나가시는 대로 그분께 모든 사실을 고하실지.”
안겔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자 방에 침묵이 감돌았다. 안겔은 처음과 달리 그 침묵에 긴장하지 않고 다시 찻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