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07화 (107/155)

#107

안겔은 굳이 침대까지 가지 않았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면 잠이 다시 깰 것 같았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나마 막 잠들려고 하던 찰나 문밖에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짜증 나는 속내와 달리 몸이 피곤한 탓인지 목에서 나온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안겔이 의자에 늘어진 상태 그대로 눈도 뜨지 않고 묻는데 밖에서 사용인의 답이 들려왔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신녀님.”

안겔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피곤하니 손님은 받지 않을….”

“문을 열지. 신녀.”

그때 안겔의 말을 끊고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중후한 목소리에 안겔이 눈을 힐끗 떴다. 만남을 허락받지도 않고 문 앞까지 찾아오다니.

‘어딜 가든 예의 없는 인간은 있기 마련이지.’

도대체 어떻게 돌려보내야 좋을까 고민하는데 상대가 스스로의 정체를 밝혀왔다.

“사브리나 공작이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안겔이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브리나 공작, 프레이의 아비이자 귀족들의 우두머리. 황제 다음가는 제국의 권력자.

안겔은 이를 악물며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직접 문으로 다가가 상대를 맞이했다.

흰빛이 더 많이 도는 금발을 깔끔하게 넘긴, 중년의 나이임에도 기골이 장대한 공작이 담담히 안겔과 눈을 맞췄다.

신관들이 하는 말대로였다.

‘프레이 신관은 정말 사브리나 공작님을 닮았습니다.’

프레이가 나이를 먹으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짐작이 갈 정도였다. 안겔은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뒤로 물렸다.

평소였다면 프레이와 닮았다는 점은 안겔의 전투력을 향상시켰겠지만 오늘만큼은 그 점이 안겔을 무장 해제시켰다.

“들어오시죠.”

안겔은 방으로 들어서는 공작을 바라보며 사용인들을 물렸다.

***

서호는 약속 시간이 됐다며 방을 나서는 푸티를 돌아보다 오늘 집무실로 가기 전 로제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브리나 공작을 만난다고 했던가?’

사브리나 공작,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서호와 로제타, 윤과 안겔까지 넷이서 식사를 할 때 나왔던 이름.

‘분명 나중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때마침 지금 서호의 앞에는 질문을 던지기 괜찮은 상대가 있었다.

“아리스.”

“네.”

서호가 쓴 문장들을 확인하던 아리스가 고개를 들며 동그라미가 가득한 시험지를 들어 올렸다.

“다 맞으셨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서호가 부드럽게 웃자 아리스가 마지막 문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헷갈리는 부분인데 맞게 적으셨네요.”

서호는 아리스가 건네는 시험지를 받아 들며 물었다.

“음, 그럼 수업은 끝인 거죠?”

“네. 다 맞으면 오늘은 여기서 끝이라고 했으니까요.”

서호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질문을 던졌다.

“사브리나 공작이 누구예요?”

그러자 아리스가 당황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아, 그게 궁금하셨군요.”

갑작스레 나온 공작의 이름에도 놀라지 않는 건 아리스 역시 오늘 로제타가 사브리나 공작을 만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일 것이다. 서호는 조금 더 편하게 질문을 이어 갔다.

“공작이면 귀족 중에서도 높은 사람이죠?”

“맞습니다. 신분도 그렇지만 본인이 가진 힘도 크죠.”

“그래요?”

여기는 본래 살던 곳보다 더욱 신분이 중요한 곳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예전 세상과 완전히 다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여기나 거기나 개인이 가진 능력 역시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귀족파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폐하의 힘이 극도로 강해진 지금 상황에서 유일하게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는 존재죠.”

서호는 푸티가 쉬지 않고 찬양하던 로제타의 권력을 떠올렸다. 아리스 역시 간간이 꽤 객관적으로 로제타의 힘을 알려주곤 했고.

그런데 그런 로제타와 균형을 잡는 사람이라니. 서호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러자 아리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뭐, 그것도 다 폐하께서 용인하니 가능한 일이긴 하죠.”

“용인해요?”

“온전한 본인의 능력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폐하께서는 본인이 완전히 힘을 장악해 틀어쥐는 것보다는 숨구멍을 조금이라도 틔워 놓는 게 귀찮음이 덜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더군요.”

신랄한 말에 서호가 어색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아리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저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이야기입니다. 폐하께서는 제 생각보다 더 계산적으로 움직이시는 분이더군요.”

“…너무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 아니에요?”

서호가 아무도 없는 방을 쭉 둘러보며 말하자 아리스가 걱정하지 말라며 말했다.

“듣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귀족들이 폐하께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게 잘 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작의 능력도 인정할 수 있죠. 실제로도 평판이 좋은 사람입니다. 귀족에게나 백성들에게나.”

“그래요?”

서호가 사브리나 공작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는데 아리스가 돌연 비웃는 것처럼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런 사람도 가족 일에는 조금 고생하는 것 같지만.”

언젠가부터 아리스는 저렇게 비틀린 웃음을 종종 보이곤 했는데 서호는 이제 저게 상대를 비웃는 게 아니라 그의 진실한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서호가 그를 따라 웃으며 다시 기억을 더듬어 물었다.

“딸이 있다고 했죠?”

“유일한 외동딸이 신전에 몸을 의탁했죠.”

외동딸이 신전에? 그건 좀 의외였다.

“왜요?”

“성력이 발현됐으니까요.”

성력이 발현되면 대부분 신전에 들어간다는 건 아리스에게 배워 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신관들이 결혼하지 못하는 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신전에 들어가면 결혼하지 못하는 것 아니에요?”

외동딸이 신전에 들어가면 가문의 맥이 끊기는 것 아닐까? 서호의 의문을 읽어낸 아리스가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렸다.

“고위 신관쯤 되면 다들 알게 모르게 몰래 바깥에서 자식을 얻어놓기도 하죠.”

“네?”

서호가 기겁을 하자 아리스가 신전이라고 완벽한 곳은 아니라며 덧붙였다.

“신관이라고 해서 다들 독실한 건 아니니까요. 그저 성력을 쓸 수 있을 뿐 신앙심이 없는 신관도 있습니다. 대신 그렇게 타락한 신관들은 기운이 점점 탁해진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서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예요?”

“뭐, 그렇죠. 그와 관련된 부분은 신녀 안겔에 묻는 것도 좋을 겁니다.”

안겔에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호가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질문을 이어 갔다.

“안겔과는 어떤 사이예요?”

“관심이 많으시군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리스에 서호가 가볍게 답했다.

“그냥 식사 자리에서 아주 잠깐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그렇습니까? 신녀 안겔이 저와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라는 건 아시죠?”

평민에 고아 출신임에도 신녀 자리까지 오른 사람. 분명 들은 적 있던 이야기였다. 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리스가 그럼 이야기가 더 쉬워지겠다며 반가워했다.

“신전은 일단 겉으로는 평등을 강조하는 곳이기 때문에, 성력이 발현돼 견습 신관이 된 아이들을 짝지어 주곤 합니다.”

“짝을 지어요?”

“이인 일조로 귀족과 평민을 함께 엮어서 1년에서 2년 정도 견습 기간을 거치죠.”

“일부러 귀족과 평민을 엮는 거군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다행히 아리스는 서호가 묻기도 전 설명했다.

“네, 함께 지내면서 평민은 귀족들의 몸가짐을 눈에 익히고 귀족들은 그들이 앞으로 봉사할 백성들의 모습을 익히는 거죠.”

아리스의 설명 덕에 대충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신관들끼리 융화를 시키기도 하고요. 어린 나이에는 신분에 신경 쓰지 않고 친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화목한 분위기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죠.”

“취지는 좋은 것 같은데….”

서호가 눈을 굴리며 뒷말을 흐렸다. 신분이 이리 중요한 곳에서 아무리 신전이라지만 그 모든 것들이 잘 흘러갔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리스가 서호가 걱정하는 바를 짚었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든 사각이 있는 법이니까요. 평민을 시종처럼 부리는 귀족들이 있긴 했습니다.”

“그래도 되나요?”

서호가 눈썹을 찌푸리자 아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전으로 들어가 성을 버린다고 해서 그 뒤에 있는 가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귀족 출신은 보통 고위 신관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그 밑에 줄을 잘 서면 평민 출신 신관에게도 좋은 점은 있습니다.”

아리스가 이해했냐는 듯 서호를 바라봤다. 역시 여기나 서호의 본래 세상이나 비슷한 점은 있었다. 서호가 답했다.

“…대충 이해했어요.”

“다시 프레이 신관으로 돌아가면, 아, 사브리나 공작의 딸 이름입니다. 아무튼 신녀 안겔과는 견습 신관 시절에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였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아니고요?”

“안겔이 신녀가 된 이후로는 사이가 멀어졌다고 했습니다.”

왜 사이가 멀어진 걸까? 그리고 사이가 멀어졌다면서 왜 그 여자는 안겔을 찾아온 걸까?

의문이 커지는 사이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겔이 프레이 신관에게 많은 것을 배운 것은 맞습니다. 프레이 신관도 안겔을 많이 신경 썼고요.”

서호가 되물었다.

“신경 썼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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