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네?”
오늘 손을 뻗어 얼굴을 만지려다가 손에 묻어나는 분에 미안하다며 손을 떼어내던 서호가 떠올랐다. 정리된 머리카락을 만지려다가 훌쩍 물러나던 손짓도.
‘음, 기껏 정리했는데 미안해요.’
평소보다 공을 써도 특별히 많이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그것 때문에 서호의 손길을 받지 못하다니 효율성이 떨어지는 짓이었다.
“꾸미는 데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갑자기 왜…, 아니. 아닙니다.”
의아함을 표시하던 푸티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인사와 함께 푸티가 방을 나서고 로제타는 곤히 잠든 서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뒤 잠이 든 로제타의 품에는 서호가 꽉 들어차 있었다.
***
푸티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로제타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시지?’
사브리나 공작의 딸이 갑작스레 안겔을 만나러 황궁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리 큰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고 했다.
‘요새 굉장히 너그러워지셨지.’
서호와의 일이 잘 풀리기 시작하자 생긴 변화였다. 푸티는 로제타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공작의 앞에도 차를 내려놓았다.
‘좋은 일인가?’
사브리나 공작은 귀족 중 유일하게 로제타의 말에 반박이라는 걸 하는 인물이고 그 딸은 로제타의 명령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로제타가 여유를 가지게 된 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푸티는 살짝 걱정됐다.
‘공작을 이런 상태로 만나는 게 맞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지금보다 조금만 더 냉랭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속으로 입을 삐죽거린 푸티는 그런 속내와는 달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로제타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푸티의 걱정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로제타는 찻잔을 들어 올리지도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딸이 황궁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푸티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역시 폐하는 여전하셔!’
아무리 유해졌다 해도 로제타는 로제타였다. 상대를 배려하고 예의를 지켜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압적인 로제타의 말투에 흡족해진 푸티가 웃음을 짓지 않기 위해 입매에 힘을 주고 공작의 답을 기다렸다.
“황궁에 간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전해 들었다니, 누구에게?”
날카롭게 틈을 노리는 로제타에 공작이 침묵했다.
“…….”
푸티는 입을 꾹 다문 공작의 입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하지만 그 단단한 입매가 열리는 일은 없었다.
“분명 그대가 관리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곧 처리하겠습니다.”
흥, 푸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뻔뻔하게 사죄도 하지 않다니.
“알고 있는 건가? 딸이 알아낸 게 뭔지.”
“…죄송합니다.”
“말해줄 수 없다는 건가? 아니면 모른다는 건가?”
“아직은 말할 수 없습니다.”
딸이 신녀를 찾아간 이유를 알고 있는데 입을 열지 않겠다고? 푸티의 눈이 뾰족해졌다. 푸티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공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로제타가 그런 푸티의 마음을 대변하듯 냉랭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주제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보군.”
더 압박해서 뭘 알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푸티가 뒤에서 로제타를 마구 응원하는데 공작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푸티의 기대와 달리 로제타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야 할 거야. 나가 봐.”
“그럼.”
공작이 방을 떠나자 푸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로제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캐묻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까? 신전을 떠나는 일이 없다고 알려진 신관이 황궁까지 달려올 정도면 정말 심각한 걸 알아낸 것일 텐데요.”
이렇게 보내줬다가 무언가 숨기거나 은폐하기라도 하면 일이 더 복잡해졌다. 푸티가 불안하게 공작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는데 로제타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공작은 내 힘을 모르지 않아. 그러니 딸 단속을 하겠지. 딸이 내 분노에 휘말리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운이 좋으면 안겔을 공작이 직접 처리할 수도 있겠지.”
아하! 푸티의 눈이 반짝였다.
하긴 로제타의 힘은 제국 귀족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감히 로제타의 분노를 사려고 하는 배짱 좋은 인물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사브리나 공작이라고 해도 로제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유일하게 폐하에게 대드는 이라고 해도 언제나 선은 지키는 편이고.’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건 선을 넘는 일이니 공작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푸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로제타가 말을 이었다.
“나는 서호와의 일에 집중하고 싶어. 그러니 귀찮은 일은 최대한 다른 이가 하는 게 좋고.”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해 주시다니 역시 기분이 좋으신 것이 맞았다.
푸티가 속으로 서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데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티가 의아해하며 문을 여는데 사용인 하나가 푸티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공작님께서….”
“뭐?”
푸티가 놀라 사용인을 돌아보자 사용인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푸티가 사용인에게 두 사람 사이를 잘 살피라 명령하며 로제타를 돌아봤다.
로제타는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푸티가 서둘러 로제타에게 다가가 공작에 대해 보고했다.
“폐하. 공작님께서 신녀님에게 만남을 요청하셨다고 합니다.”
로제타를 만나고 나서 바로 신녀를 만나다니, 역시 수상하지 않은가 싶었으나 푸티의 보고에도 로제타는 태연했다. 그는 오히려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이었다.
“빠르군. 궁 밖으로는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해.”
“네.”
딱히 공작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좀 수상쩍은데.’
푸티가 우물쭈물하며 자리에 서 있자 로제타가 귀찮다는 듯 푸티를 내려다봤다.
“안겔을 정리하려고 하는 거다. 자기 딸이 나에게 분노를 사지 않을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여전히 푸티가 이해를 못 하는 기색을 내보이자 로제타가 혀를 찼다.
“정보를 숨겨도, 정보를 숨기지 않아도 자기 딸이 내 화를 사는 건 똑같으니 그 분노를 전부 안겔에게 돌리려고 하는 거야.”
그 친절한 설명에 푸티는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푸티가 이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로제타가 응접실을 나섰다.
푸티가 크게 감탄하며 응접실을 떠나는 로제타의 뒤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응접실 정리를 명하고 오늘 공작의 방문에 대해 사용인들을 단속하러 향했다.
힘차게 복도를 걸어가며 푸티는 생각했다.
‘이렇게 일이 편했던 적이 있나?’
얼굴을 찌푸리고 혀를 차기도 했지만 그래도 푸티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푸티가 간혹가다 로제타의 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도 로제타는 언제나 침묵으로 일관했었다.
‘네 이해는 필요 없고 명령만 따르라는 태도셨지.’
그런데 오늘은 어떤가? 조금 짜증스러운 기색이긴 했지만 푸티에게 적당한 설명을 해줬다.
‘나도 평소라면 감히 의문을 표하지도 못할 텐데 질문을 했고.’
훌륭한 시종답지 않은 태도였다. 공작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였던 것처럼 의문 역시 속으로 삭였어야 했는데.
편안해진 로제타의 분위기에 풀어진 자신을 깨달은 푸티가 눈을 부릅뜨며 스스로를 비난했다.
‘한심하긴!’
더욱 정진해야겠다 다짐한 푸티가 두 손으로 얼굴을 짝짝 내리치다가 피식 웃었다.
‘뭐, 그래도 이게 좋긴 하지.’
아랫사람에게는 평소보다 유하게 구시고 그 외에 사람들에게는 평소와 다름없이 구시니, 걱정할 거리도 없었다.
‘물론 남의 키스를 보는 건 전혀 즐겁지 않지만.’
자신이 보든 말든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는 로제타와 그런 로제타의 옷자락을 붙잡던 서호의 곧은 손.
입술을 쪼듯 가볍게 입을 맞추다 이내 키스가 질척해지면 더듬거리며 서호가 눈치채지 못하게 옆구리나 팔뚝을 더듬던 로제타.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품에 완전히 안겨 작게 앓는 소리를 내던 서호까지.
긴 키스 뒤에 눈가를 붉히며 젖은 숨을 내뱉던 서호와 그런 서호를 바라보며 짐승같이 눈을 빛내던 로제타를 떠올린 푸티는 얼른 고개를 흔들어 기억을 날렸다.
본디 훌륭한 시종은 본 것도 보지 못한 것으로 만드는 이가 아니었던가.
‘그래, 서호님이 부끄러워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야!’
예전과 달리 서호가 로제타에게 끌려다닌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둘의 관계에서 더 위에 있는 건 항상 서호였으니까.
푸티는 빠르게 꼴사나운 모습을 지우며 사용인들에게 할 말들을 정리했다.
***
이른 새벽 일어나 기도를 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그 기도를 정오가 될 때까지 이어 가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모은 채로 기도를 이어 나가던 안겔이 구김 하나 없던 옷자락을 구기며 자세를 무너트렸다.
‘집중이 안 돼.’
머리를 모두 비우고 아버지만을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프레이와의 대화 이후 고작 하루가 지났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하는 기도만큼은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안겔은 잔뜩 힘이 들어간 손아귀에서 힘을 빼내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사용인들에게 방해하지 말라 이야기를 전해둔 덕인지 주변이 조용했다. 안겔은 적막함을 즐기듯 눈을 내리감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몇 시간 내내 꿇고 있던 다리가 저렸으나 안겔은 굳이 성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피곤해.’
그래도 몸을 혹사하니 이제야 좀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잡생각이 너무 많아서 전혀 자지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