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안겔은 한 시간이 넘도록 처음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입 한번 열지 않고 차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프레이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찾아오신 거죠?”
그러자 프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르륵,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찻잔을 내려놓은 우아한 손짓, 결 좋은 금발과 푸른 눈, 순백의 새하얀 신관복이 지독히도 어울렸다.
안겔이 시선을 피하듯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는데 프레이가 답했다.
“내가 답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텐데.”
안겔이 다시 시선을 들어 프레이를 똑바로 마주 봤다.
“글쎄요. 말해주지 않으면 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자 프레이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아주 작은 파임이었으나 틈 하나 없던 가면에 생긴 그 흔적이 눈에 아프게 박혀왔다.
거기에 더해 프레이에게서 짙은 한숨까지 흘러나오자 안겔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평소 안겔이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과 담담한 어조로 일관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리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다니?
‘뭐지?’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걸까? 안겔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있는데 프레이의 성력이 널리 퍼져나갔다.
안겔의 것과는 다르지만 정순하고 깨끗한 성력이었다. 너무 깨끗해서 감히 더럽힐까 두려워질 정도로 맑은 기운에 안겔이 움찔 몸을 떠는데 프레이가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지?”
“…뭐라고요?”
다른 이들이 들을 수 없게 대화를 차단하기 위해 성력을 풀었다는 걸 알면서도 안겔은 작게 속삭였다. 어쩌면 너무 맑은 기운에 압도되어 콱 막힌 목소리가 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안겔이 고개를 숙이고 어느새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는데 프레이가 툭 내뱉었다.
“거울, 거울을 어째서 황제에게 준거지?”
프레이의 말에 안겔의 얼굴이 휙, 위로 올라갔다. 프레이가 잘게 떨리는 안겔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이방인이 겪을 일을 알면서도 황제에게 거울을 선물한 건가?”
“…….”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함을 아는데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해.’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안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프레이가 말했다.
“아니라고 말해.”
그 말에 놀라 프레이를 바라봤던 안겔이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여전히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프레이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 아니, 프레이의 얼굴 가득 들어찬 배신감 때문에.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프레이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라고 생각했어.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 역시 진심이라고 생각했지. 그 누구보다도 신앙심이 깊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너니까.”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연약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짓을 벌였다고?”
“…….”
왜 이렇게 배신감을 보이지? 어째서 나를 믿고 있었던 걸까? 우리는 그날 이후 친우가 아니었다.
남보다도 못한 사이. 일방적인 증오를 보내던 그런 사이였다.
그런데 왜 너는….
‘신녀가 됐다고?’
처음 신녀가 됐다고 밝혔을 때 네 반응을 기억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는 반응. 주변에서 정말 신녀가 된 게 맞다고 확인시켜 주자 돌아온 답.
‘네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야. 넌 나와 달라.’
그때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었을까?
그간 친근하게 대해주던 건 아무런 의미가 없던 행동이라고.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나만은 숨겨진 네 웃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모두 혼자만의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다.
너도 고아에 제대로 된 줄도 없는 나를 속으로는 무시하고 너와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프레이의 손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프레이는 그런 안겔의 손을 다시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사이는 끝이 났다.
그런데 왜 지금 너는 이러는 거지?
‘언제부터 나를 믿었다고, 왜 내게 배신감을 느껴?’
그리고 나는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데?
안겔은 입안에 퍼지는 비린내에 잘근잘근 씹던 입안의 살이 찢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여린 살을 혀로 쓸어내자 따끔하고 쓰라렸다.
하지만 안겔은 혀를 떼어내지 않고 더 강하게 문질렀다. 피가 멈추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피가 더 나길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벼락같은 말이 떨어졌다.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넌 나와 다르다고.”
안겔이 멍하니 프레이를 바라봤다.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들리는 말.
무시나 경멸이 아닌 걱정과 애정이 담긴 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안겔의 입이 열렸다.
“…그러게. 그랬어.”
정말 나는 너와 달랐다.
‘네가 아니라 나였구나.’
겉과 속이 달랐던 건 나였다. 너를 좋아하면서도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자신. 어느새 흔들림을 정리한 프레이가 견고한 얼굴로 무어라 이야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안겔은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 거울과 관련된 자료를 찾았는지, 우선 그 자료는 프레이와 신관 하나만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안겔이 완전히 정신을 차린 건, 프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최대한 네가 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지. 내가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 아무런 짓도 하지 마.”
그리고 문이 닫혔다.
누굴 보내겠다는 건지, 신전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건지 물어봐야 할 건 많았지만 이상하게 궁금하지 않았다.
안겔은 텅 빈 앞자리를 보며 생각했다.
네 속셈을 들키고 싶지 않다면 자신을 도우라는 왕자.
안겔과 황제의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온,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프레이.
안겔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로제타는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을 황홀하다는 듯 내려다봤다. 빛 아래에서 보면 살짝 갈색빛이 도는 서호의 머리카락은 매끈했고 부드러웠다.
물론 그 감촉만큼이나 로제타를 사로잡는 건 나른하게 풀린 서호의 표정이었다.
이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받아들이는 그는 잠이 오는지 몽롱하게 풀린 눈을 끔뻑거리며 로제타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팔랑팔랑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속눈썹은 로제타의 손가락이 두피 안쪽을 은근하게 쓸어내리면 날아오를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잠시간 뚜렷해지는 서호의 눈에 자신이 듬뿍 담기는 것이다.
‘웃고 있군.’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서호의 눈 속에 비치는 자신의 입매는 서호의 것과 마찬가지로 매끈한 곡선을 띠고 있었다.
“간지러워요.”
단순히 간지럽기만 한 걸까? 뭐,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서호는 손을 붙잡아 내리지 않으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간질거리는 웃음을 흘린 서호가 몇 분 전부터 전혀 넘어가지 않던 책을 탁상 위에 올려두고 엎드려 있던 몸을 똑바로 했다.
“잘 건가?”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서호가 잠들 시간이 된 것이다.
로제타의 물음에 서호가 눈만 깜빡여 답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다시 잠기운이 그득했다. 머리를 만지던 손을 내려 그 눈가를 뭉근하게 매만지자 서호가 아예 눈을 감았다.
로제타는 허리를 숙여 천천히 서호에게 다가갔다.
“서호.”
은은하게 그를 비추던 불빛이 로제타의 커다란 몸에 가려져 시야가 어두워지자 어렵게 눈을 뜬 서호는 코앞에 자리한 로제타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눈을 감았다.
그것이 허락임을 알아차린 로제타가 서호의 귀여운 코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지 찡긋거리는 코끝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린 로제타는 곧장 서호의 입술을 머금었다.
요즘 푸티가 관리를 해주는 탓에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 두 개가 부딪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이 열렸다.
물론 서호가 잠에 취해 있는 만큼 그의 움직임은 로제타의 것보다 느렸다. 하지만 그 뭉툭한 움직임마저도 너무 자극적이었다.
나른한 숨소리와 함께 뒤섞이는 혀. 편안하게 이완된 움직임이 좋았다.
혀를 맞대고 입안의 살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노곤하게 서호를 녹인 로제타가 아쉬움을 뒤로하고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지난 일주일간의 경험으로 로제타가 알게 된 것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서호는 잠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본래도 잠을 소중히 한다는 걸 알긴 했지만.’
서호는 잠결에 키스를 하는 걸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 키스가 잠을 방해할 정도가 되면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키스를 잘 안 받아줬고.
‘그러니까 이 이상은 안 돼.’
살짝 늘어진 은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로제타가 아쉬움에 서호의 입술에 다시 한번 쪽 입술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입술을 우물거리던 서호가 몸을 틀며 로제타에게 몸을 기대오더니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완전히 몸이 달아오른 자신과 달리 편하게 잠든 그가 조금쯤 원망스러울 법도 한데 지금 당장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키스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버틸 수 있을 때 서호가 더 마음을 열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로제타는 뒤로 물러나 있던 푸티를 불러들였다.
“푸티.”
“네, 폐하.”
잠에 취한 서호는 푸티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푸티는 아직 이곳에 있었다.
로제타는 푸티를 돌아보지도 않고 이불을 뒤집어 서호와 그의 몸을 잘 감싸며 명령했다.
“내일부터는 평소처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