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04화 (104/155)

#104

물론 서호를 들먹이지 않았다면 황제가 황궁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을 리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저자는 일국의 왕자였으니 얼마든지 다른 수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안겔은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멈추고 왕자에게 물었다.

“서호에게 다가간 이유는 뭐죠?”

그리고 별다른 망설임 없이 돌아온 답.

“기회를 주려고? 그가 원한다면 함께 돌려보낼 생각이었지. …어머니와 같은 곳의 사람이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왕자는 서호가 원한다면 그 역시 돌려보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서호가 지금은 그걸 원치 않는다는 거지.’

안겔이 조급함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은 원하지 않고 훗날 원할 수도 있잖아요.”

“거기까지 신경 써줄 수는 없어.”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다는 말에 안겔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데 순간 왕자가 매끄러운 웃음을 흘렸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웃음. 안겔이 제일 싫어하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우위에 선 자의 눈이었다.

안겔의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왕자가 다리를 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당신도 거울을 황제에게 준 목적을 달성하고 싶겠지. 그러니까 서호가 황제를 두고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걸 원했던가?”

왕자가 손에 턱을 괴며 웃었다.

“그대가 내가 거울을 왕국으로 가져가는 걸 도와주면 원하는 대로 서호를 돌려보내 주지.”

안겔이 입을 뻐끔거리다 되물었다.

“…그건 당신만 좋은 것 아닌가요?”

그러자 왕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호는 이곳을 좋아해. 그러니 난 굳이 그를 돌려보낼 이유가 없어.”

왕자가 검지로 그녀의 눈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눈이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보이는 호의야.”

“호의라니….”

“그야 당신이 모든 진실을 아는 것처럼 나도 모든 진실을 아니까.”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요?”

안겔은 어이가 없었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둘 중 우위에 있는 건 왕자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하지만 안겔이 그 점을 지적하기 전 왕자가 화사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만약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일그러진다면 난 황제에게 거울을 깨트리는 방법을 이야기할 거야. 그러면 서호는 영영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지. 당신이 싫어하는 결말이지?”

무슨…. 안겔이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 때문이라도 말하지 못할 텐데요.”

“난 이번 일에 모든 걸 걸었어. 거울을 가져가려던 걸 들킨다면 아버지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테니.”

“서호를 돌려보내면 황제가….”

“설마 내가 그걸 짐작하지 못할 것 같나? 난 이미 내 끝을 정해뒀네.”

그래, 왕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왕과 황제의 분노를 예상할 수 있는 이였다.

즉 그가 말한 끝은….

안겔이 눈을 질끈 감는데 왕자가 속삭였다.

“당신이 황제에게 붙는 건 황제나 내 아버지 말고는 모두에게 좋지 않은 선택이야. 서호는 좀 애매하지만…. 미래에는 후회할지 모르고.”

안겔이 다시 눈을 뜨고 왕자를 응시하자 그가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생각할 시간을 약간 주지.”

안겔은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입장이 역전당한 현 상황이 너무 화가 났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던 건데….’

왕자가 거울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던 순간부터, 자신의 속내를 들킨 그때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혼자서 그것도 모르고 발버둥을 쳤다.

안겔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용인들을 무시하며 세게 발을 내디뎠다.

‘멍청한 것, 한심한 것!’

한때 신전의 누군가가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안겔은 이번만큼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욕했다.

왕자를 도와 거울을 빼돌리라니? 그걸 들키는 순간 안겔은 정말 끝이었다. 신녀라는 자리는 신의 사랑을 받는 황제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그러니 신전은 자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돕지 않으면?’

서호는 계속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다. 정말 황제만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황제가 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어.’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안겔이 방문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사용인을 무시하고 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방 안에 자리하고 있던 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네가?’

안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제야 손님의 존재를 알리는 사용인과 방 안에 있는 이를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눈앞에 있는 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안겔.”

안겔을 찾아온 이는 안겔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황제보다도 더 싫어하는 여자.

“프레이.”

고위 신관 프레이였다.

***

로제타는 지난주에 있었던 신녀와 왕자의 만남을 기록한 보고서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리고 아리스가 사용인을 통해 보낸 서호와 왕자에 대한 보고서를 살피던 중 또다시 신녀와 왕자가 만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대놓고 마법을 썼다고?”

“네.”

로제타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작당을 하는 건 사실인 모양이군. 그걸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

하지만 이상하게 옛날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로제타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언제나 서호와의 관계였으니, 그와의 관계에 이상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이상 그들의 이상 행동은 별달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무슨 짓을 해도 서호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로제타가 내내 함께했던 서호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리는데 그림자가 물었다.

“조치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로제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그냥 감시만 더 늘려놔. 앞으로 왕자와 안겔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다 보고하고.”

조금만 더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트집을 잡아 쫓아내면 됐다.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까지 하나하나 전부 보고하라는 로제타의 명령에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로제타가 다시 아리스의 보고서를 살피려는데 다른 그림자가 집무실에 들이닥쳐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가 왔다고?”

“사브리나 공작의 딸인 프레이 신관이 왔습니다.”

“갑자기?”

“신전 측에서 신녀 안겔을 방문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청을 보내긴 했습니다.”

로제타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보좌관들이 대신 처리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허락했나?”

“요청에 하자가 없었기에….”

“공작의 딸이 직접 온다는 말은?”

“아니요, 고위 신관 하나가 온다는 말뿐이었습니다.”

로제타의 냉랭한 눈이 막 찾아낸 신전의 공문을 훑었다.

“그 딸이 고위 신관이니 틀린 말은 아니군.”

“어떻게 할까요?”

주름졌지만 또렷하던 공작의 눈을 떠올린 로제타가 공문을 옆으로 밀어내며 답했다.

“그 여자가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 여자라면….”

“공작의 딸 말이야. 공작이 관리하겠다고 했었으니.”

사브리나 공작은 멍청한 이가 아니고, 한번 한다는 건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식 관리를 잘했을 것이다.

‘잘하지 못했다면 그 딸이 끝장날 테니.’

안겔의 감시를 명령했을 당시 그 딸이 보냈던 서신이 떠올랐다.

[신전은 원칙적으로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또한 신전은 폐하의 명령을 받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신전을 떠나 황궁까지 찾아온 지금 그 말의 경계는 흐릿해졌다.

‘안겔이 무슨 짓을 벌인다면 함께 처리하는 게 좋겠군.’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던 이가 굳이 안겔을 보기 위해 황궁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아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거울과 관련된 일이겠지.’

로제타는 이미 예전에 안겔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지금과 같은 일을 벌였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아직 멀쩡하게 둔 건 왕자를 처리하기 위해서였고.

‘정확히 그 딸이 무슨 정보를 얻은 건지 확인할 필요는 있겠군.’

안겔의 목적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든 건 확실히 하는 게 좋았다.

로제타는 그림자에게 명령했다.

“내일 사브리나 공작을 불러와.”

“네.”

그림자가 방을 나서고 아리스의 보고서를 마저 살핀 로제타가 자리를 정리하며 방을 나섰다.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보좌관들이 일을 잘한 건지 요 며칠 얼굴을 내보이지 않은 것치고는 일 처리가 나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원래 늘 이런 식이었지.’

본래 로제타는 보좌관들이 처리한 일의 최종 결재만 해주는 식이었지 사사건건 관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고작 며칠을 비운다고 무슨 일이 날 리가 없었다.

‘신녀와 왕자에 대한 사항만 보고받고 나머지는 잠시 미뤄둬도 되겠어.’

서호와의 관계가 진척된 지금 일 때문에 집무실에 오랜 시간 발목 잡힐 수는 없었다. 로제타는 집무실을 떠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보좌관들을 본척만척하며 빠르게 방으로 향했다.

방에 가까워질수록 기분 좋은 떨림이 로제타를 찾아왔다.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서호의 신력과 웃음소리.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평소보다 큰 청량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며칠 내내 로제타를 감싸고 있던 말랑거리고 간지러운 이 감정.

그 기분 좋은 운율을 들으며 부드럽게 문을 열자 안에 있던 행복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왔어요, 로제타?”

“다녀왔어.”

로제타는 그를 반기는 서호를 보며 점점 더 부피를 키워가는 감정 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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