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03화 (103/155)

#103

서호와 헤어지고 방으로 돌아온 윤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안겔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봤다.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던 안겔이 윤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솔?”

윤은 옆에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사용인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 방이 윤에게 주어진 방이라지만 신녀인 안겔이 들어와 있고 싶다는데 사용인이 그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굳이 날 위해 신녀와 척을 질 생각도 없을 테고.’

윤은 사용인을 방 밖으로 내보내며 안겔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물론 자리에 앉으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새어 나가지 않게 마법을 쓰는 걸 잊지는 않았다.

“어쩐 일이지?”

사실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날의 대화는 흐지부지 끝났으니.

예상대로 안겔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그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그날 이후 일주일이나 지났고.”

“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나?”

안겔은 비협조적인 윤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시작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요.”

“그날의 대화로 그 건은 정리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번 윤이 반발하자 안겔이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그리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그 정도로 순진하신 분은 아니니.”

비웃음을 흘리듯 오만하게 눈을 내리깐 안겔이 고개를 돌려 방에 달린 거울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예전에 제게 말씀해 주셨죠. 거울은 이세계로 가는 통로라고.”

이건 안겔에게 붉은 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그날의 이야기였다.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윤은 이방인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때 거울이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 알려줬었다.

‘거울이 곧 문이고 통로야.’

‘제대로 설명해 주시면 좋겠군요.’

‘거울을 통과해 이곳에 온 것처럼 거울을 통과해야 한다는 거지.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군.’

‘…거울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다는 건가요?’

윤이 그날의 대화를 되짚는 사이 안겔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전에 있던 거울을 감시했다고도 말씀하셨죠. 그런데 굳이 왜 서호가 필요했던 걸까요?”

그간 말해둔 것이 있으니 안겔이 진실에 다가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윤은 표정을 굳히는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패밀리어를 들킨 당시의 대화를 떠올렸다.

진실과 거짓을 적당히 섞은 그 날의 대화.

‘도대체 이것들로 무얼 하고 있었던 거죠?’

‘서호를 살피고 있었어.’

안겔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호를요?’

‘대충 짐작했을 텐데?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일 년이라고 말했던 건 사실이네.’

안겔이 왕국에 보낸 신관들로 정보를 캐내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걸 드러내며 동시에 과거 황제와 서호에게 했던 말을 들먹이자 안겔은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요?’

‘어머니의 마지막을 위해서 서호가 필요해. 황제가 순순히 서호를 이쪽으로 보내줄 리가 없으니 서호와 개인적인 친분을 다질 생각이었고.’

안겔이 비웃음을 흘렸다.

‘향수병에 걸렸다는 말도 진짜다?’

‘그래. 본래 세상을 간절하게 원하시지.’

‘그래서요?’

네 말을 믿진 않지만 어디까지 하나 보겠다는 듯 안겔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윤은 그 불신하는 태도를 보면서도 말을 마무리했다.

‘그게 다야. 난 어머니의 마지막을 위해서 뭐든 할 수 있거든.’

그날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안겔은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얼굴에 믿음은 없었고 그저 진위 파악을 위해 자리를 파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안겔은 그날의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실에 가까운 가정을 하고서.’

그간 알려준 정보가 너무 많았다. 안겔을 우습게 생각해서 쉽게 했던 대화들이 발목을 잡았다.

“향수병이 그리 심하다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뭐든 해드릴 수 있다면 그녀를 본래 세상으로 보내면 되는 것 아닌가요? 왜 굳이 위험하게 황궁에 잠입한 거죠? 동향 사람의 편지보다는 돌아가는 게 더 좋을 텐데?”

윤은 한 번 더 거짓과 진실을 섞었다.

“아버지께서 원치 않으시니.”

거울 사용자의 집착을 알고 있는 안겔은 이리 답하는 것만으로도 윤이 하고 싶은 말을 알아차렸다.

“거울을 왕이 관리하고 있으니 통로로 쓸 수 없다?”

“그래.”

왕은 그레이스를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안겔은 윤을 향해 날카롭게 웃었다.

“본인의 능력을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왕국에 당신의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왕을 속여 거울을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안겔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직 내게 말하지 않은 게 더 있는 거겠죠. 돌아가는 과정에 필요한 게 더 있다든가….”

윤은 그의 얼굴을 살피며 하나하나 가정을 더해가는 안겔을 똑바로 마주 봤다.

“거울이 두 개가 필요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과거에는 거울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울이 없나?”

유심히 윤의 얼굴을 살피던 안겔이 피식 웃었다.

“이 중에 답이 있나 봐요.”

거의 진실에 도달한 이 여자의 집착에 욕을 해야 하는지 찬사를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윤이 빈정거리듯 답했다.

“똑똑하네.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이곳에 있는 거울이야.”

윤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다 알게 됐으니 마음이 편한가?”

그러자 안겔이 단호한 얼굴로 윤의 말을 부정했다.

“‘다’라는 건 어울리지 않네요. 저는 왕자님의 입으로 모든 진실을 듣고 싶은데요.”

윤이 혀를 찼다.

“욕심이 많군?”

정녕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은 거냐는 물음에 안겔이 환하게 웃었다.

“그런 편이죠. 그래서 진실은요?”

윤이 덤덤하게 말했다.

“모든 걸 아는 당신을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안겔은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웃던 안겔이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닦아내며 물었다.

“내가 설마 아무런 대비도 없이 당신을 찾아왔을까요?”

“하.”

헛숨을 내뱉은 윤이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리자 안겔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윤은 그 눈빛을 비웃었다. 지금 이 여자는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진실을 알아낸 건 칭찬해줄 만한 일이지만.’

왜 본인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똑똑하다는 말은 취소해야겠군.’

두 사람은 이제야 동일한 선상에서 대화를 할 수 있게 됐을 뿐이었다.

“그래서 왜 이곳의 거울을 가져가려고 하신 거죠?”

윤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답했다.

“알지 않나? 거울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어.”

“…역시 거울이 깨졌군요.”

“맞아.”

귓가로 또다시 거울이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어머니의 비명.

왕국의 거울은 아버지의 욕심으로 깨졌고 그 이후로 어머니는 꿈을 꿀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를 다시 본래 세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거울이 필요했다.

바로 이 제국에 있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거울이.

그리고 그 거울을 얻기 위해서 윤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신녀 안겔.

‘본래 이렇게 이용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 여자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마침 사용하기 나쁘지 않은 상대이기도 했다.

‘눈도 꽤 쓸 만할 테고. 잠시 입을 다물게 하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겠지.’

거울 사용자가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 그 거울을 황제에게 선물한 여자.

황제의 추락을 원하며 그에게 선물한 거울. 그로 인해 이방인이 얻을 피해 따위는 생각도 하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서호가 이곳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곤 하지만.’

그건 그저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그러니 신녀를 이용하는 걸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건 업보니까.’

이 일들이 끝나고 난 뒤 안겔이 겪게 될 황제의 분노는 모두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

숨겨진 진실을 전부 알게 된 안겔은 고양감에 빠져 있었다. 왕자의 어미가 꿈을 꾸지 않게 되었던 것도, 아직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거울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안겔은 흥분을 숨기려 애쓰며 질문을 이어갔다.

“거울을 가져간 뒤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죠?”

“…….”

왕자를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눈을 휘며 웃었다. 저 웃음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보던 안겔은 거울 사용자의 집착을 떠올렸다.

후궁을 붙잡기 위해 거울을 깨트렸다던 왕. 그리고 후궁을 돌려보내기 위해 제국으로 들어온 왕자.

설마…. 안겔은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하듯 물었다.

“거울을 깨트릴 생각인가요?”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겔이 다급하게 말했다.

“한번 넘어간 상대가 다시 돌아온 적은….”

“가능성을 남겨둘 생각은 없어.”

정말로 거울을 없애겠다는 소리였다.

‘이대로 왕자가 거울을 가져가면 서호는?’

서호는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안겔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안겔의 얼굴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겔은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왕자가 정말 원하던 것이 거울이었다면 그는 어째서 서호에게 다가갔던 걸까?

단순히 거울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아니, 왕자는 서호의 도움이 없었어도 그의 능력으로 충분히 거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서호에게 접근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황제의 경계를 받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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