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102화 (102/155)

#102

푸티가 미리 준비했던 대로 한 올 한 올 최선을 다해 로제타의 머리를 매만지는데 로제타가 불쑥 물었다.

“내용은?”

편지의 내용을 묻는 로제타에 푸티가 냉큼 답했다.

“내일 오랜만에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셨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보내실 겁니까?”

“원한다면.”

조금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반응이 유했다.

‘서호님과의 진전 덕인가?’

푸티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제타가 물었다.

“요즘 어땠지?”

푸티는 미리 준비해둔 대로 줄줄 이야기를 이었다.

“바깥 활동을 삼가셨습니다. 마나는 평소보다 조금 많이 움직이긴 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신녀님과는 그 뒤로도 따로 만나시지는 않았고요.”

서호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날, 왕자와 안겔이 한번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고 가볍게 차를 마신 것이 전부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고.

‘마법을 사용했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상황 때문인지 별다른 말이 없으셨지.’

서호와의 일 때문에 로제타에게서 별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 평소보다 더 유심히 그들을 살피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었다. 그 이후로 만남이 없기도 했고.

“안겔은.”

대외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왕자와 달리 안겔은 요새 조금씩 대외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많은 편지가 오고 방을 자주 나서십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왕국에서 또다시 편지가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안겔이 이아코스 왕국에 사람을 심어 두었다는 건 이쪽도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녀가 몰래 편지를 받아 보았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서호와 문제가 생겼던 날 왕국에서 편지가 왔음을 로제타에게 알렸지만 상황이 그랬던지라 로제타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쉰 로제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일은 집무실에 가야겠군. 왕자와 안겔에 대한 것들 전부 제대로 보고해.”

“네.”

그래도 완전히 넘어갈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서호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살핀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푸티가 머리를 손질하던 손을 떼어내고 로제타의 눈치를 살폈다. 로제타가 대충 거울을 살피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그날 이후 처음으로 혼나지 않았다. 왕자가 보낸 편지와 안겔에 대한 보고 때문인지 오늘은 별달리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좋은 건가?’

잠시 고민하던 푸티는 입술에 힘을 주며 스스로를 타박했다.

‘좋은 거긴!’

내일 서호가 아리스와 함께 왕자를 만나러 간다면 그 시간 내내 로제타는 왕자와 안겔에 대한 일을 처리하며 예민해질 것이 뻔했다.

‘그림자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야겠네.’

스스로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긴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했다.

로제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푸티는 훌륭한 시종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로제타의 기분이 더 상하지 않게, 그리고 로제타의 사람들도 기분이 상하지 않게 중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푸티가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해야 할 일들을 되새겼다.

***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서호는 표정이 좋았다. 윤이 특이한 간격으로 배치된 창문들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호가 물었다.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가 볼까?”

윤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늘 그들이 살펴보는 곳은 황제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뒤에서 그들을 따라오는 아리스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주변을 훑어보는데 서호가 불쑥 물었다.

“있잖아, 윤. 그레이스는 처음 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어땠대?”

“아버지를 만났을 때?”

“응.”

“갑자기 왜?”

서호가 그를 힐끗 돌아보며 답했다.

“그냥… 알다시피 이번 편지에 그레이스와 네 아버지의 연애 이야기가 적혀 있길래.”

알다시피. 저번 만남에서 서호가 보낸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걸 저도 모르게 말한 탓인지 반대로 서호에게 보내는 편지 역시 자신이 살피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딱히 탓하는 기색이 없네.’

그날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서호의 시선에 비난하는 기색은 없었다.

‘기대가 없는 건가? 아니면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가 줄 정도로 내게 호감이 있는 건가?’

분명 안겔과의 일을 추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황제나 서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늘의 만남도 별다른 말 없이 수락했고.’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하지만 의심도 잠시 윤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따로 원하는 것이 있는 건 이쪽인데 괜스레 상대의 의도를 살피고 있었다.

‘곧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날 테니 저쪽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없어.’

윤은 마법사와 서호의 분위기를 살피며 적당히 답했다. 아예 새로운 화제가 아닌 이미 나온 화제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조금 부끄러워하셔서 나도 잘…. 그냥 놀라웠다고 했어. 갑자기 다른 곳에 끌려온 거니까.”

그러자 서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나도 놀라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윤이 호기심을 꾸며내며 물었다.

“어떤 느낌이야?”

“응?”

“거울을 넘어올 때 말이야.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어? 어머니는 말을 아끼셔서.”

“넘어올 때?”

잠시 고민하는 사람처럼 침묵하던 서호가 그리 대단한 것 없었다며 말했다.

“글쎄. 그냥 로제타를 따라서 손을 내밀었더니 갑자기 주변 풍경이 변했었어.”

“…그래? 생각보다 별것 없네.”

정말 너무 아무것도 아니어서 그 별것 아닌 일이 불러온 것들이 더 깊게 가슴에 남았다.

“사는 세상을 바꾸는 일인데 말이야.”

거울이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세계가 조금만 더 다정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그 손을 붙잡은 뒤 일어날 일들을 귀띔해 줬다면 모든 게 달랐을까.

윤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쓴물을 삼켰다.

지금 와서 다른 이를 탓해 봐야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중해.’

안겔을 만난 이후,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남을 원망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목적만 떠올려.’

본래 제국에 온 이유만을 생각해야 했다. 쓸데없이 감성적으로 굴지 말고.

다행히 표정 관리가 나쁘지 않았던 듯했다.

“그렇네. 그만큼 거울이 대단한 물건이라는 거겠지.”

서호보다 눈높이가 높아서, 마법사가 그들의 뒤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윤은 다시 눈꼬리를 한껏 휘며 말했다.

“신의 선물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신전에서 관리하던 물건이라고 했으니까. 아, 왕국은 거울이 따로 있다고 했지?”

“그래. 오래전부터 이쪽이 관리했지. 여긴 어때? 아직 신전에 돌려주지는 않았지?”

이미 거울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걸 밝혔었기에 윤은 망설임 없이 물었다. 그러자 서호도 평범하게 답했다.

“응. 아직 여기 있어.”

윤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거울을 본 적 있어?”

“몇 번? 그런데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더라.”

“그래? 나는 어릴 때 몇 번 보고 별로 본 적이 없어서.”

윤의 말에 서호가 그럴 만하다고 중얼거렸다.

“하긴 궁이 넓으니까.”

“그래도 아예 특별함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일반적인 거울이랑 다르게 모습이 비치지 않는다는 점에선.”

그러자 서호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맞아. 그래서 신기했어. 그런데 그래서 더 잘 안 보게 되더라.”

본래 마법이 없던 세계에 살았기 때문일까? 서호가 조금 흥분한 채로 말을 이었다.

“딱히 거울로서 기능을 안 하니까 항상 방에 있어도 잘 안 보게 되는 것 같아.”

정말로 꼭 알고 싶었던 정보를.

‘방에 있다고.’

자연스레 눈을 깜빡이는 척 윤은 평소보다 길게 눈을 감았다. 이 탐욕스러운 눈을 들키면 안 됐다.

윤은 서호의 시선이 얼굴에 닿기 전 말을 받았다.

“그럴 수도 있겠네. 겉모습도 커다란 것 빼면 평범한 편이니까.”

“맞아.”

윤이 거울의 외양을 자잘하게 설명하자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거울의 외양을 묘사했다. 일단 겉모습은 왕국에 있던 것과도 동일한 것 같았다.

물론 서호가 봤다던 거울이 진짜가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사람의 형상이 비치지 않았다고 해도 마법을 사용하면 충분히 비슷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직은.

‘그래, 거울을 숨길 이유는 없어.’

그러니 서호가 말한 것처럼 그 거울은 황제의 방에 있을 것이다.

윤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대화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저기를 찍는 게 어떻겠냐며 한 그림을 가리키는 서호에 윤이 다시 사진기를 들었다.

‘너는 이곳에 소중한 것이 생겼다고 했지.’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은 다르다던 서호의 말이 생각났지만 윤은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를 지워냈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서호의 손에 사진기를 들려줬다. 그러자 서호가 잔뜩 기대한 얼굴로 사진기를 붙잡고 방금 그가 가리켰던 곳을 찍기 시작했다.

윤은 그런 서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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