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윤이 서호에게 했던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
‘자기만족.’
윤이 이렇게 제국을 찾아온 건 전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였다. 어머니나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서.
‘그래.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망설이면 안 돼.’
이미 서호에게 답을 들었다. 그러니 이제 제대로 움직여야 했다.
서호와 각방을 쓰면서 황제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따라서 윤은 평소 보지 못했던 곳도 살필 수 있었다.
윤은 접근하기 힘든 황제의 집무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정확히 하루가 지났을 때 윤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역시 그곳에 있구나.’
황제의 방.
패밀리어를 통해 한번 살펴본 적이 있고 황제에게 불려서 들어가 본 적이 있던 방에 자리한, 파티션으로 분리되어 있던 공간.
‘거기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크지.’
사실 그간 궁을 꼼꼼히 살핀 것은 모든 가능성을 따져 보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중요한 물건을 황제가 아무 데나 보관해 두었을 리가 없으니 처음부터 가장 유력한 장소는 황제의 방이었다.
‘하지만….’
오늘 서호가 다시 황제의 방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서호가 방으로 돌아갔으니 그 호위인 아리스라는 마법사 역시 계속해서 그 방을 드나들 것이 뻔했다.
‘위치를 확정 짓기 전에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방을 살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귓가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작게 한숨을 쉰 윤이 차가운 얼굴과는 달리 친절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답했다.
“누구시죠?”
“나예요.”
돌아온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린 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죄송하지만,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해 주시면….”
하지만 상대는 윤의 말을 잘라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할 뿐이었다.
“나를 보는 게 좋을 텐데요. 내가 좋은 선물을 가져왔거든요.”
작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불길했다. 만남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결국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솔.”
눈이 마주치자 자애로운 미소를 흘린 안겔이 손에 든, 아마도 찻잎을 담았을 작은 통을 흔들어 보였다.
“좋은 차를 가져왔답니다. 방문을 허락해 주겠어요?”
깊게 파인 눈꼬리의 궤적을 눈으로 좇던 윤이 몸을 비틀어 자리를 내어주자 안겔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윤을 돌아보며 물었다.
“편안하게 대화를 해도 될까요?”
가식적인 대화는 집어치우고 직접적으로 대화를 해도 되냐는 물음이기도 하겠지만 살펴보는 이가 없냐는 물음이기도 할 테다.
윤은 주변의 기척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목소리라면.”
안겔의 등장으로 주변을 감시하던 이들이 몸을 긴장시키는 게 느껴졌지만 그 정도는 마법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윤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걸었다.
‘경계를 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오늘 이 대화를 다른 이들이 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윤의 머리를 맴돌았다.
안겔이 만족스레 눈웃음을 치며 윤이 권유하지도 않았는데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차 통을 건넸다.
“아주 귀한 것이랍니다. 왕자님도 마음에 들 거예요. 이걸로 차를 우려 주겠어요?”
윤은 느릿하게 그 차 통을 받아 들며 안겔과 눈을 마주했다. 손끝에 닿는 이 느낌.
‘성력이야.’
차 통 안에 성력이 가득 차 있었다. 안겔이 태연한 얼굴로 얼른 차 통을 열어 보라며 눈짓했다.
윤은 천천히 차 통을 열었다.
“…….”
윤이 통 안을 살핀 것을 확인한 안겔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때요, 굉장히 귀한 차죠?”
가만히 안을 살피던 윤이 안겔을 따라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렇군. 잠시 기다리게.”
“기대할게요.”
윤이 안겔을 뒤로하고 통을 가지고 주전자가 있는 곳으로 몸을 옮겼다. 안겔을 등진 윤이 마법을 이용해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물이 끓자 윤은 주전자 안에 찻잎을 넣었다.
안겔이 가져온 것이 아닌 다른 찻잎이었다.
하지만 안겔도 윤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안겔이 가져온 통 안에는 열댓 마리의 날벌레가 들어 있을 뿐이었으니까.
‘방심했어.’
아니,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서호와의 대화를 되새기느라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한번 사용했었던 패밀리어가 어떻게 됐는지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손톱보다도 작은 조그만 벌레들은 한번 사용을 하고 나면 하루나 이틀 뒤 죽어버리니 자연스레 이번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한심하긴.’
성력을 이용해 살아난 벌레들과 미약하게 남아 있는 자신의 마나.
하지만 자책을 하며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곱게 우러나는 차를 내려다보는 윤의 입가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
푸티는 푹푹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서호가 다시 방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완전히 로제타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고 말은 하지만 그럼에도 요즘 로제타의 기분은 연일 상승곡선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 로제타가 외모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깐깐하기 그지없으시지.’
한 번도 관심을 준 적 없는 피부 관리에 관심을 가지고 머리 스타일을 지적했으며 화장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 말하기까지 했다.
꼼꼼하다 못해 예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하나하나 지적하는 로제타 탓에 푸티는 다시 한번 공부를 해야 했다.
‘이게 무슨 고생이람.’
빨래나 청소 같은 부분은 다른 사용인들이 맡았지만 로제타를 무서워하는 사용인들 탓에 그와 직접 얼굴을 맞대야 하는 일들은 대부분 푸티가 담당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스스로의 외양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그는 언제나 완벽해야 하는 황제였기에, 푸티는 정말 최선을 다해 전문 사용인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그를 꾸몄다.
다행히 푸티는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직접 가르침을 사사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도 전부 푸티의 실력을 칭찬했었다.
‘그래, 나는 능력 있는 시종이라고!’
하지만 외모에 관심을 가지게 된 로제타는 푸티의 실력을 깎아내렸다. 결국 푸티는 매일 아침 로제타에게로 향하기 전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오늘의 스타일링을 준비하곤 했다.
‘이거면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완벽하신데 도대체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오늘은 분명 칭찬을 들으실 거예요.’
이미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떨어진 상태라 다른 사용인이 로제타의 스타일링을 맡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서호가 다른 사용인들이 있으면 평소보다 굳어진다는 이유로 그것도 불가능했다.
‘네가 해.’
단호하던 그 얼굴을 떠올린 푸티가 울상을 지었다. 안 그래도 많은 푸티의 일이 몇 배로 늘어난 것이다.
‘그나마 옷차림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더군다나 오늘은 로제타에게 꼭 보고해야 할 일까지 있었다.
로제타에게 남은 두 번째 문제.
거울과 관련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왕자와 신녀는 아직도 황궁에 있었다. 푸티는 황제의 방으로 향하기 전 왕자를 전담하는 사용인에게 받은 편지를 움켜쥐었다.
최근 며칠간 서호가 로제타와의 관계에 집중한 탓에 왕자와 만나지 않아 잊고 있었지만 서호는 왕자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아리스는 실제로 두 사람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했지만.’
푸티는 익숙한 복도로 들어서며 손에 쥔 편지를 힐끗 내려다봤다. 후궁 그레이스가 보내는 편지와 왕자 개인이 보낸 편지.
미리 왕자의 편지를 뜯어 확인 절차를 거쳤기에 푸티는 왕자가 편지를 쓴 이유를 알았다.
‘만날 때가 되긴 했지. 오히려 조금 늦은 감이 있고.’
푸티는 이 편지를 전해주고 난 뒤의 로제타의 반응을 예상해 봤다.
‘서호님이 만남을 거절하지는 않으실 텐데.’
편지를 본 순간 서호와 함께 있으면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던 분위기가 돌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서호가 왕자를 만나러 간 뒤 불똥이 튈 가능성도 컸고.
푸티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 마음을 다잡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자.’
후, 크게 숨을 내쉰 푸티가 한 손에 편지를 꼭 쥐고는 문을 두드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폐하, 서호님. 일어나셨습니까?”
“푸티.”
서호의 목소리에 푸티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로제타는 깨어 있다 못해 홀로 씻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당연했지만 서호까지 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편지에 대해 보고받느라 조금 늦은 모양이었다.
서호가 깨어나기 전 완벽한 준비를 하길 원하던 로제타를 떠올리며 푸티는 한숨을 삼켰다.
“왔어요? 그건 뭐예요?”
바로 손에 들린 편지를 발견한 서호에 푸티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푸티가 기민하게 로제타의 표정을 살피며 서호에게 편지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서호가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살피는데 로제타가 부드럽게 권유했다.
“편지를 읽기 전에 씻고 식사를 먼저 하는 게 좋겠어.”
푸티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식사는 잠시 뒤에 들어올 겁니다.”
“그래요? 그럼 우선 좀 씻을게요.”
서호가 식사가 도착하기 전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섰다. 푸티가 물을 받아주겠다고 하자 서호가 고개를 저었다.
“목욕할 건 아니고 가볍게 샤워를 할 거니까 괜찮아요.”
서호의 거절에 푸티가 욕실의 문을 닫아주고 로제타에게로 다가갔다. 어느새 로제타는 화장대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