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평소처럼 행동해 보려 했다. 시간을 달라는 서호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전부 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전부 처리했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은 탓인지 그래 봐야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 이후 로제타는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힘들어.’
자신의 냄새에 서호의 향기가 사라지는 건 싫으니까 시간이 될 때마다 몸은 씻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폐하! 얼른 준비를….”
갑자기 방으로 들이닥친 푸티가 귀찮게 그를 닦달할 때 이불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를 무시했다.
아직 서호의 향기가 남은 이불에 고개를 묻고 온몸을 감싼 채 나는 너와 함께 있는 거라고 우기고 있었던 것도 같다.
‘서호.’
같은 물건을 쓰니 서로의 향기는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불에서 나는 향기에서 네 것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때 흐릿하고 몽롱한 정신 사이로 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호.’
그걸 깨닫는 순간 몸의 세포들이 하나씩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서호가 어디 있는지 모른 척하기 위해 죽여뒀던 감각이 살아나고 지금 이곳에 있는 이가 정말 서호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문이 닫혔다.
그리고 가까워지는 기척과 함께 몸 위에 닿은 손.
정말 서호였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걷어내고 그를 직접 마주하고 만지고 싶었지만 로제타는 참아냈다.
‘이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어.’
서호가 기겁을 할지도 몰랐다. 물론 중간에 충동에 휩싸여 저도 모르게 이불을 풀어낼 뻔했지만.
‘입술….’
로제타는 여전히 이불에 꽁꽁 싸매여 키스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서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책을 넘기는 손과 방 한쪽에 자리한 화분에 물을 주는 손길은 차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까 전 있었던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운 색으로 부푼 서호의 입술이, 아직도 거칠게 뛰는 자신의 심장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사귀는 것은 아니다. 서호가 자신의 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과 달리 그에게 다가갈 명분은 충분했다.
“그래서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멍하니 서호의 행동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로제타는 서호의 물음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
서호가 의아하다는 듯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때맞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서호님?”
“푸티.”
문이 열리고 등장한 이는 푸티였다. 푸티가 로제타와 서호를 바쁘게 번갈아 바라보더니 하하 웃음을 지었다.
“서호님, 목욕을 준비해드릴까요?”
“갑자기요?”
“오랜만에 돌아오셨으니까요.”
본래 목욕 시중을 받지 않는 서호였기에 그가 이상하다는 듯 답했다.
“그보다는 로제타를 신경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푸티가 잔뜩 굳어 자신을 돌아봤다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폐하를요?”
서호가 이제 슬슬 걱정된다며 자신의 몸을 감싼 이불을 훑었다.
“아까부터 저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데요.”
그러자 푸티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하하,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서호님, 오늘은 제가 꼭 목욕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네?”
“제발요.”
서호가 아리송한 얼굴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보면 안 되는 거예요?”
“네.”
“아….”
서호가 흠칫 놀라며 로제타를 바라봤다가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푸티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무얼 생각하시든 그건 아닐 겁니다!”
“음, 그래요. 아무튼 욕실로 들어가요.”
몇 번 더 그게 아니라고 말을 더하던 푸티는 서호가 욕실로 들어서자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욕실에서 나온 푸티가 서둘러 로제타에게 다가왔다.
“욕조에 들어가셨습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그런 푸티의 손에는 로제타의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로제타는 그제야 꽁꽁 둘러싸고 있던 이불을 풀어냈다.
펄럭거리며 걷어진 이불에서 뻗어져 나온 다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다리였다.
근육이 진 탄탄한 허벅지와 그 위를 눈에 담은 푸티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옷을 건넸다. 시중을 드느라 벌거벗은 몸을 본 게 처음이 아니면서도 오늘만은 절대 그 몸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행동이었다.
로제타가 상체를 일으키자 탄탄한 가슴팍과 그 아래 옹골지게 자리한 복근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만큼이나 아름답고 눈을 사로잡을 만한 육체였으나 푸티는 서둘러 로제타에게 옷을 들이밀 뿐이었다.
로제타가 옷을 받아 드는데 푸티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흥분하셨다고 착각하신 것보다는 차라리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로제타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빠르게 옷을 입었다.
네 향기를 느끼기 위해서, 너와 함께 있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옷을 다 벗고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를 서호에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키스에 잠깐 흥분했다는 핑계가 나았다.
로제타의 침묵에 고개를 돌려 그의 표정을 살핀 푸티가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과 비교하면 이건 조금 소름 끼칠 수도…, 크흠.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푸티가 욕실을 힐끗 돌아보며 손을 뻗어 로제타의 의복을 정리해줬다.
“서호님께서 마음을 먹으셨으니 앞으로 좋은 모습만 보여주셔야겠죠.”
로제타는 별다른 대꾸 없이 이불을 눈짓했다. 그러자 푸티가 서둘러 침구를 챙겼다.
며칠간 건드리지도 못했던 이불이었기에 푸티의 손길은 다급했다. 로제타는 푸티가 방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지도 않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모습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서호가 좋아할까.’
아직 완벽히 서호를 가지지는 못했으니 로제타도 노력을 해야 했다.
‘내 얼굴이 좋다고 했지.’
생전 들여다보지도 않던 거울 앞에 앉아 이리저리 고개를 틀어 보던 로제타는 이불과 베개를 든 사용인들과 함께 다시 방으로 들이닥친 푸티에게 손짓했다.
“네, 폐하?”
“머리를 올려야겠어.”
“네?”
로제타는 머리를 올렸을 당시 볼을 붉히던 서호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서호가 올린 머리를 좋아하니 머리를 올려야겠다고.”
“그, 네.”
당혹스러워하던 푸티가 로제타의 말을 알아차리고는 서둘러 머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느리기 짝이 없어서 거슬렸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서호는 목욕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니 얼른 준비를 마쳐야 했다. 로제타가 거울 너머 푸티를 바라보며 재촉했다.
“서호가 나오기 전 완벽한 모습을 만들어. 저것들은 내보내고.”
“…네.”
푸티가 침구를 정리하는 사용인들을 돌아보자 사용인들의 행동이 더욱 빨라졌다. 그렇게 로제타는 서호가 나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다듬고 건드려도 만족이 되지 않았다.
“별로군. 다시 해.”
로제타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푸티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를 냈다.
“폐하, 폐하는 어떤 스타일을 해도 잘생기셨습니다. 이렇게 걱정하실 필요가….”
“네 실력이 별로인 것이 아니고?”
비난하듯 그를 쳐다보는 로제타의 시선에 푸티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가 폐하의 모든 것을 담당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있는데요!”
로제타가 냉랭하게 반응했다.
“노력? 그렇다면 노력과 실력이 비례하진 않는 모양이지.”
“…그, 그런.”
아무리 다시 거울을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용인을 불러와…. 아니, 이제 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하던 로제타가 돌연 축객령을 내렸다.
“네?”
물이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물에 젖은 발소리가 들렸다.
“서호가 나올 거야. 나가.”
로제타가 바쁘게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했다.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옷을 입고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한 로제타는 아직도 방 한구석에 서 있는 푸티에게 날 선 시선을 보냈다.
“안 나가고 뭐 하는 거지? 어서.”
결국 푸티는 제대로 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푸티가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욕실 문이 열렸다.
로제타는 그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서호를 반겼다.
***
언제나 패밀리어를 통해 궁을 살피던 윤은 서호와 황제가 각방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서호가 예정에 없는 만남을 요청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혹 그가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든가, 지금 이곳에서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래서 윤은 마법사가 함께 있음에도 또 한 번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아니, 조금 더 확실한 답이 돌아왔다.
‘이곳에 소중한 것이 생겼다고.’
그 답으로 윤은 인정했다. 서호는 어머니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었고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는 걸.
‘어째서 어머니와 다른 걸까?’
소중한 것이 생긴 건 어머니나 서호나 똑같을 텐데….
순간 서호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도 네 행복이 자기 행복이시겠지?’
윤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내 행복이 어머니의 행복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을까?
동시에 또 한 번 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야기 들으니까 더 착한 아들 같다.’
자신은 정말 착한 아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원망하는, 애정을 갈구하던 어린 시절에 갇혀 있는 자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