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9화 (99/155)

#99

‘웃기는 일이지.’

로제타가 평소와 같지 않아서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그가 걱정되다니. 참 모순적이지 않은가.

서호는 속마음을 숨기며 걱정스러운 기색만을 드러냈다.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요. 하지만 다른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자긴 했어요? 피곤해 보이는데.”

부드러운 서호의 목소리에 로제타의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그냥 적당히.”

하지만 이어진 로제타의 답에 서호의 눈초리는 날카로워졌다. 방금 저 말은 자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서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식사는요?”

“…적당히.”

눈을 굴리며 명료하지 않게 답하는 로제타에 서호의 눈이 조금 더 냉랭해졌다.

“씻기는 했어요?”

“했어!”

여태까지 답 중 제일 커다란 목소리였다. 이걸 웃어야 할까? 그래, 씻기는 한 모양이었다. 서호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잘한 게 하나밖에 없네요.”

그러자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로제타가 행동을 하나하나 꼽기 시작했다.

“…방에 잘 있었어. 일도 잘했고. 또….”

지금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할 때였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대답하려고 온 건데…. 이런 꼴로 들을 거예요?”

서호가 이불에 꽁꽁 싸매어져 있는 로제타의 몸을 눈으로 훑는데 로제타에게서 다시 한번 개미같이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좋겠어.”

“네?”

서호가 귀를 의심하며 그와 눈을 맞추는데 로제타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딱히 보여주기 좋은 꼴은 아니라서. 그냥 몸만 일으키지. 좀 물러나 주겠어?”

목소리를 높이며 애원하던 푸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서호가 방으로 돌아간다고 하자마자 말리던 모습도.

‘도대체 어떤 꼴인 거지?’

지금 드러난 모습은 조금 부스스하긴 해도 평범하다 할 수 있었다.

이불 안 모습이 조금 궁금했지만 서호는 참기로 했다. 물론 그렇다고 로제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서호가 생긋 웃으며 답했다.

“싫어요. 그냥 그렇게 들어요.”

“뭐?”

사실 서호는 로제타가 도망가지 않고 자신의 답을 다 들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너무 눈치를 보잖아.’

지금 상태라면 자신이 답을 하던 와중에 도망을 갈지도 몰랐다.

‘로제타는 오해가 많은 편이니까.’

서호가 당황한 듯 보이는 로제타를 똑바로 마주 보며 허리를 조금 숙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로제타가 흠칫 놀라며 숨을 멈췄다. 서호가 작게 웃었다.

“숨은 쉬어요.”

다행히 로제타가 다시 숨을 쉬었다. 로제타의 호흡에 맞춰 함께 숨을 내쉬던 서호가 여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생각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결론을 내렸어요. 이야기해도 될까요?”

당황하던 얼굴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평온을 가장했지만 로제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져 있었다.

‘스스로에 자신감이 없는 편인가?’

평소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는데 유독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오해도 많았고 자신감도 없는 편이었다.

‘그래도 눈을 피하지는 않네.’

무언가를 대비하듯 느릿하게 숨을 내쉰 로제타가 서호를 바라봤다. 여전히 생기는 없지만 그래도 또렷한 눈이었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을 보자 심장 한쪽이 작게 뛰었다.

눈빛과 달리 이불에 둘둘 싸인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고, 저 얼굴은 그런 모습조차도 잘 어울렸다.

‘기왕이면 얼굴을 다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푸른 눈도 아름답긴 했지만 며칠간 보지 못했던 얼굴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하는 게 정말 아쉬웠다.

하지만 서호는 그 아쉬움을 내리눌렀다.

서호는 기분 좋게 떨리는 심장을 느끼며 빙빙 돌리지 않고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 마음을 받아줘도 될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낀 당신 감정은 너무 커다랗고 예뻐서…. 내가 그만큼 당신을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요.”

“…그건!”

서호는 크게 움찔거리는 로제타 때문에 함께 출렁거린 몸에 힘을 주며 손을 뻗어 이불 위로 로제타의 입을 막았다.

“지금은 그냥 들어주면 좋겠어요. 최대한 솔직하게 말할게요. 숨김없이.”

이불 너머로 달싹거리는 로제타의 입술이 느껴졌다. 혹 로제타의 숨이 막힐까 싶어 서호는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그런데 나는 로제타를 좋아해요. 그래서 로제타랑 멀어지는 건 싫어요.”

나풀거리는 금빛의 속눈썹의 수를 하나씩 새어가며 서호가 덧붙였다.

“하지만 로제타가 나 때문에 상처를 입을까 걱정이 되고요.”

푸른 눈이 오묘한 빛을 내며 흔들거렸다.

“근데 두 감정 중에 뭐가 더 크게 다가오나 봤거든요? 몰랐는데 내가 좀 이기적이더라고요.”

자신이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

“당신이랑 멀어지느니 차라리 당신이 상처를 받는 게 나을 것 같고…. 못됐죠?”

서호는 또다시 달싹거리는 로제타의 입을 다시 한번 막았다. 도톰한 이불 너머 로제타가 다시 입을 다무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로제타. 로제타가 해야 할 건 하나예요.”

로제타의 푸른 눈은 별빛을 담은 것 같았다. 정말 못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당신은 기뻐하기만 해서…. 그리고 그게 기꺼운 스스로가 느껴져서 마음이 안 좋았다.

그래서 서호는 이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당신을 지금보다 더 좋아하게 만들어서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하는 거예요.”

언젠가 내가 나보다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될 때를 기약하며.

“내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고 당신에게 매달리게 만들어 봐요.”

서호는 이제 말을 해도 된다는 듯 로제타의 입술 위에 올렸던 손을 치워냈다. 그러자 로제타에게서 잘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게 맞나?”

깨질 듯 동시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을 보며 서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는데… 유예를 두면 좋겠어요. 아직 사귀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찬 것도 아니거든요.”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을 보며 서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면 로제타가 그리도 좋아했던 건 자신이 말을 너무 헷갈리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긴장했으니까.’

지금 서호는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짓을 하고 있었다.

희망 고문.

“그냥 지금처럼 지내요. 못됐죠? 그런데 이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서호는 못된 말을 하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로제타가 날 잘 유혹하면 다음에는 내가 고백을 할게요. 로제타는 그때 받아줄지 말지 정해요.”

그리고 계획했던 마지막 행동을 하기 위해 슬금슬금 손을 움직였다.

“아, 신체적인 접촉은 어느 정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한 것들은 괜찮다는 소리예요.”

몸을 천천히 숙여 움찔거리는 로제타의 몸을 누르듯 힘을 줬다.

“그리고 아직 하나 더 있어요.”

점점 더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졌다. 동시에 어느새 이불 끝을 붙잡은 자신의 손이 보였다.

“내가 로제타를 좋아하긴 하는데 그게 로제타와 같은 방향은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방향을 좀 틀어야겠어요.”

서호도 아리스도 장담했던 대로 본래 호감이 있던 사람이었고 거부감도 없었기에 방향을 트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얼굴에 좀 약하더라고요.”

로제타가 이불을 붙잡고 있지는 않았던 건지 이불은 작은 힘에도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키스까지는 된다는 소리예요.”

튀어나올 듯 커지는 눈을 그대로 마주하며 서호가 드러난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가 눈매를 찌푸렸다.

“입술이 거칠어요.”

며칠 사이에 입술이 망가져 있었다. 이로 씹은 듯 잇자국이 조금 나 있기도 했다. 하지만 뻐끔거리는 저 입술이,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 흔들리는 눈이 좋았다.

작게 웃음을 흘린 서호가 고개를 틀고 다시 입을 맞췄다.

거칠어진 입술을 깨물듯 물고 이미 벌어져 있던 틈 사이로 들어간 서호는 바짝 얼어 숨어 있던 물컹한 혀를 찾아냈다. 연한 민트향이 났다.

그 향을 따라 톡톡 입안을 건드리던 서호는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하는 로제타를 느꼈다. 느릿하게 감싸오는 혀와 이불 아래로 꼼지락거리는 로제타.

‘손을 뻗고 싶은 건가?’

하지만 돌돌 말린 이불 때문에 손을 뻗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맞춘 입 사이로 웃음이 샜다. 서호는 질척해질 것 같은 키스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뒤로 물렸다.

“오늘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어때요?”

부드러운 키스였음에도 로제타의 숨은 거칠었다.

“더 좋아하게 만들라고 했는데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면서요?”

서호가 다시 입술을 맞대며 속삭였다.

“얼굴은 내 취향이니까 지금은 얼굴만 드러내고 있어도 돼요.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거든요.”

로제타에게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정말 성격이 나쁘네.’

그리고 아리스의 말도 맞았다. 나는 언젠가 당신을 지금보다도 더 좋아하게 될 거고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도 더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바로 사귀지 않은 지금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될 때가 두렵지는 않았다. 설령 내가 당신을 더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당신 마음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을 확신해서. 나를 거절하지 않을 당신을 알아서.

‘나는 당신 생각처럼 착하지 않으니까.’

손해가 생길 일은 만들 생각이 없었다. 서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반질거리는 로제타의 입가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러자 로제타가 좀 더 닿고 싶다는 듯 고개를 들어왔다. 서호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입을 맞췄다.

정말 로제타는 너무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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