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8화 (98/155)

#98

“…네? 답을 내리셨어요?”

금방이라도 죄송하다고 할 것 같던 푸티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요. 그러니 아침 식사 후에 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네, 네!”

서호가 허둥지둥 몸을 돌리려는 푸티를 불렀다.

“로제타는 집무실에 있죠? 방으로 불러올 필요 없어요. 돌아오면 이야기할 테니까.”

보통 저녁 시간 전에 돌아오니 그때 이야기를 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푸티가 곤란한 얼굴로 답했다.

“…그, 폐하께서는 방에 계십니다.”

서호는 아리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일은 제대로 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러자 푸티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긴 한데 일을 방에서 하고 계셔서요.”

“방에서요?”

자신이 방에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원래 집무실에 잘 가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고.

“그럼 가서 바로 말할게요.”

서호가 마지막 단추를 잠그며 몸을 트는데 푸티가 화들짝 놀라며 서호를 붙들었다.

“자, 잠깐만요! 그래도 식사는 이곳에서 하시는 게….”

“왜요?”

아까는 서호가 마음을 정했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좀 기다리라니? 서호의 의문 섞인 물음에 푸티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 폐하도 준비를 해드려야….”

“준비를 할 게 있어요? 지금 시간이면 이미 준비를 다 끝냈을 텐데.”

늦잠을 자는 사람도 아니었고 이미 준비를 다 마칠 시간이 아닌가. 그러자 푸티가 말을 몇 번 더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그래도 중요한 대화를 하니까. 그….”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푸티에 서호가 팔짱을 끼며 자리에 멈춰 섰다.

“역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죠?”

푸티가 입을 다물었다. 거기서 답을 읽어낸 서호가 다시 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식사를 끝내고 가요. 하지만 내가 간다고 말하진 마요.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니까.”

“네?”

서호가 단호하게 답했다.

“알려주면 안 갈 거예요.”

“…그.”

“알았죠? 알려주면 방으로 안 가요.”

푸티가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서호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푸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알겠습니다.”

푸티에게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쩌겠는가.

‘아리스에게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면 푸티에게는 서운한걸.’

아리스를 따라 자신을 떠본 것도, 로제타가 당해도 괜찮다는 말에 동의한 것도.

‘로제타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푸티가 들었으면 억울해 눈물을 흘릴 게 뻔한 생각을 하며 서호는 의자에 앉아 아침 식사를 기다렸다.

사실 마음 한쪽에는 괜찮지 않은 로제타를 보고 싶다는 생각 역시 존재하고 있음을 서호는 애써 부정했다.

***

서호는 식사가 끝난 후 입을 헹구고 나서도 푸티가 돌아오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가져다준 푸티는 서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먼저 자리를 떴다. 서호가 말없이 그런 푸티를 바라보자 그는 로제타에게 서호가 돌아온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실제로 지킬지는 모르겠네.’

이미 푸티에 대한 서호의 신뢰는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그래서 서호는 굳이 푸티를 기다리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

물론 홀로 궁을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서호는 거리낌 없이 옆방의 문을 두드렸다. 예상대로 방 안쪽에서 아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서호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아리스.”

자신이 머물던 곳과 엇비슷한 방이었다. 방 한쪽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리스가 서호를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호님?”

서호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돌아가 보려고 하는데요.”

아리스가 문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생각은 끝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아하, 그럼….”

아리스가 손을 살짝 흔들자 흐트러져 있던 책상 위 필기구와 종이들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알아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서호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법은 참 신기하네요.”

“제가 좀 대단하죠.”

마법이 아닌 제가 대단한 거라는 의미인 걸까?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서호가 코웃음을 치는 것처럼 웃음을 짓다가 먼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아리스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서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함께 돌아가는 길에 아리스가 가볍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서호가 아리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내가 무슨 답을 할지 알고 있지 않아요?”

“그렇죠. 굉장히 빨리 돌아가시네요.”

“원래도 길게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어요.”

아리스가 서호의 얼굴을 살피며 덧붙였다.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으셨고요?”

서호가 큰 반응 없이 답했다.

“방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그래도 결국 결론은 같았을 거예요.”

아리스가 안도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됐군요. 푸티는 제가 잘 달래서 데리고 가겠습니다.”

“폐하! 일어나셔야 한다니까요? 일을 다 하셨어도 차림새를 단정하게….”

때마침 방에서 새어 나오는 푸티의 간곡한 목소리에 서호는 터질 뻔한 웃음을 참아내며 답했다.

“그래요.”

그리고 서호의 답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는 푸티가 나타났다.

푸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호를 바라보며 외쳤다.

“서호님! 왜 벌써?!”

서호가 웃음기를 지우려 애썼다.

“식사를 끝내고 온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그럼 혼자서…! 아리스?”

문을 열고 서호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굴던 푸티가 그 옆에 있던 아리스를 그제야 발견했다.

아리스가 자기 존재를 알리듯 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나와 같이 왔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자, 그럼 푸티. 우리는 이제 가 볼까?”

“네? 하지만!”

아리스에게 어깨가 붙잡힌 푸티가 몸을 뒤틀었지만 아리스는 단호하게 푸티를 데리고 방에서 멀어져갔다.

“자, 자. 갑시다.”

“그, 아니, 이러면….”

서호는 복도 너머로 점점 사라지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익숙한 방에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방문이 닫히자마자 움찔 떨리는 커다란 이불 뭉치를 발견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로제타였다.

‘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있는 건가?’

머리카락 한 올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로제타가 확실했다. 커다란 이불 덩어리를 지켜보던 서호는 침대로 향했다.

그리고 처음을 제외하고는 미동도 없는 이불 위로 손을 올렸다.

“이틀 만에 보는데 인사도 안 해주는 거예요?”

그 말에 이불 안쪽에서 조그만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서호.”

이불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였으나 그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반가웠다.

‘생각보다 더 보고 싶었었나 보네.’

딱히 물기가 어린 목소리는 아니라 안심됐지만 동시에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얼굴은요? 눈을 마주 보고 인사를 해야죠.”

이불이 조금 들썩였다. 그리고 그걸 보는 서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로제타는 이불을 걷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불을 더 붙잡는 모양새였다.

“왜 더 숨어요?”

이불 안에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제대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불속에 저렇게 파묻혀 있으니 말이 잘 들리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서호는 놀리듯 말을 던졌다.

“로제타? 이 커다란 몸이 이불 속에 숨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리 이불이 커다랗고 푹신하다지만 저 커다란 덩치가 숨겨질 리가 없었다. 서호가 그저 올려두고만 있던 손에 힘을 주고 이불을 흔들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로제타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불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서호는 마지막 수를 쓰기로 했다.

“정말 안 볼 거예요? 나 나가요?”

그러자 여태껏 지지부진하던 것이 무색하게 이불 뭉텅이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꼬물꼬물 머리가 튀어나왔다.

잔뜩 정전기가 일어 엉망이 된 머리카락과 함께 볼록 튀어나온 푸른 눈.

고작 눈만 드러났을 뿐이었지만 드디어 드러난 얼굴에 자연스레 입꼬리가 치솟았다. 서호가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눈으로 훑다가 로제타와 눈을 마주했다.

“얼굴 보기 힘드네요.”

그러자 눈 밑을 붉게 물들인 로제타가 우물쭈물 답했다.

“…못난 모습이야.”

서호가 로제타의 얼굴을 살폈다.

볼 수 있는 게 눈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눈으로 시선이 갔다. 눈가는 조금 피곤해 보였고, 평소처럼 반짝거리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으며 눈 밑이 붉었다.

‘괜찮다더니.’

푸티의 말과는 전혀 달랐다.

그게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미묘하게 남아 있던 불편한 느낌이 씻은 듯 사라졌다. 이미 인정하긴 했지만 정말 자신은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로제타에게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렸고 그런 스스로를 깨달았으니 이제 와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서호는 여전히 흔들리고는 있으나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푸른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푸티는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던데.”

그러자 로제타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야 할 일은 하고 있었어.”

서호가 지금 모습에 실망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호가 걱정하는 건 로제타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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