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어이가 없었다. 서호가 입을 뻐끔거리는데 아리스가 손을 척 치켜들며 답을 재촉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답을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
입에서 바람이 샜다. 하지만 아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폐하가 평소와 똑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셨어요?”
저 천연덕스러운 태도를 보니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면 정말로 로제타의 상태를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서호가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또요?”
서호는 입안의 살을 깨물었다.
‘이걸 이야기해도 될까?’
서호가 머뭇거리는데 아리스가 툭 내뱉었다.
“후련하셨습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호가 멍하니 아리스를 쳐다봤다. 아리스가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폐하의 감정이 그리 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고 이대로 거절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진 않으셨나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날카롭게 말이 튀어 나갔다.
조금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온 것도 같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찔끔한 기색 없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떠보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섭섭하셨나요? 서운하거나, 화가 난다거나?”
“…….”
거칠게 내쉬던 숨이 뚝 끊겼다.
부글부글 끓던 가슴이 차가워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저 표정을 보니 방금 상황이 이해됐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다 계산된 질문과 대화였다.
‘정말이지.’
서호가 질린 낯으로 아리스를 바라봤다. 아리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요. 후자군요? 화가 나셨어요.”
그러고는 다행이라는 듯 와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애 감정이 없는 건 아니네요. 그리고 생각보다 폐하를 더 좋아하시고요.”
그가 예를 들어 보겠다며 덧붙였다.
“저도 서호님을 좋아하긴 하는데 만약 서호님이 폐하처럼 행동했다면….”
아리스가 손가락을 튕기며 씩 웃었다.
“안도했을 겁니다. 후련했을 거고요. 그리 깊지 않은 감정인데 왜 고백을 해서 우리 사이를 망가트리려 하냐고 원망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화가 나지는 않았겠죠.”
아리스가 쭉 손을 뻗더니 손에 나타난 꽃 한 송이를 서호에게 건넸다.
“상처를 주지 않아서, 상처를 줬다 해도 그리 크지 않을 테니 안심했겠죠.”
꽃을 건네는 아리스의 얼굴에는 서호를 자극하던 비웃음은 사라져 있었다.
“서호님과 폐하의 관계는 저와 서호님과의 관계보다 더 끈끈하니, 경우가 조금 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리스가 예리한 눈으로 서호를 살피며 물었다.
“그 정도면 되지 않습니까? 충분히 커다랗고 짙은 감정 같은데. 얼마든지 연애 감정으로 틀 수 있고 남들이 봤을 때는 연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죠.”
서호가 입술을 달싹이는데 아리스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폐하에 비해 부족하시겠지만 원래 감정은 상대적이니까요.”
아리스가 서호가 받지 않는 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새로운 꽃을 만들어냈다.
“폐하께서는 서호님 외에 다른 모든 이에게 무심하시죠. 다른 사람에게 줄 감정들을 전부 서호님에게 줬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줄 감정이 그리 많이 남은 거라고요.”
퐁퐁 손에서 튀어나온 꽃이 테이블 위에 수북이 떨어졌다.
“서호님은 가족들과도 친밀하셨고 친구들도 있으셨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그럴 존재가 없어서 그 감정을 전부 서호님께 쏟고 있는 겁니다.”
그분에게 소중한 존재가 당신뿐이어서 그래서 그리 감정이 큰 거라 강조한 아리스가 그 꽃들을 한 번에 움켜쥐더니 다시 서호에게 건넸다.
“그러니 서호님의 감정이 부족한 건 아닌 거죠.”
꽃다발을 내려다본 서호가 되물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안 좋게 끝나면 로제타에게 더 상처가 될 텐데요.”
로제타에게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더 다가가기가 어려운 거였다. 그러자 아리스가 무슨 그런 걱정을 하냐며 한숨을 푹 쉬더니 물었다.
“그 얼굴을 가지고 온몸으로 사랑한다고 외치는데 더 좋아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세요?”
아리스가 손을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얼굴, 몸, 조건, 감정까지 모든 부분이 과하면 과했지 빠지진 않는 분이신데요. 앞으로 더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그래도 정 신경이 쓰이시면 솔직하게 말하세요. 조금 더 기다려 줬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건 로제타에게 너무한 짓….”
아리스가 답답하다는 듯 서호의 말을 잘라냈다.
“조금 이기적으로 구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평생을 자기 생각만 하고 사신 분이니 한 번쯤 당하셔도 괜찮아요.”
서호가 짜증스레 답했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자 아리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보세요. 이렇게 폐하를 생각하는 사람은 서호님뿐이라니까요? 심지어 푸티도 제 말에 조금이나마 동의했었습니다.”
푸티까지 동의했다는 말에 서호가 놀라는데 아리스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기다려 달라고. 감정이 똑같아지진 못해도 용기를 내고 다가갈 수 있을 정도로 참아 달라고 하세요. 지금처럼 떨어져 있는 거 싫으시잖아요?”
망설이듯 꽃다발을 쳐다보던 서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다가 로제타가 저를 더 좋아하게 되면요? 괜히 희망만 줘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걱정을 가득 담아 던진 말에 아리스가 커다랗게 코웃음을 쳤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음이 튀어나왔다. 확실히 이건 좀 자의식 과잉이었다. 서호를 따라 웃음 짓던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무한에 1을 더해도 무한은 무한이지 않습니까. 더 커진다고 엄청나게 티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아리스가 옅은 웃음을 입가에 단 채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서호님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 장난스러운 말투에 서호가 쭉 펴고 있던 허리에 힘을 빼며 답했다.
“…다 아리스 추측일 뿐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하지만 본래 감정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니까요. 양을 가늠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서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스가 덧붙였다.
“폐하가 아닌 본인을 생각하세요. 본인이 좋은 대로 사는 거죠. 만약 이런 상황에서 나보다 상대가 더 중요하다? 그건 정말 상대를 사랑하는 거고요.”
아리스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 정도가 되면 더더욱 그냥 폐하와 사귀시는 거고요. 어떻습니까, 훌륭한 답이죠?”
나쁘진 않았다. 윤과의 대화와 지금의 대화가 섞이자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제야 솔직해질 수 있었던 거지.’
자신은 마냥 착한 사람이 아니었고 스스로가 제일 소중한 사람이었다.
로제타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까지는 아직이었다. 그래도 그가 주는 애정이 좋고 그가 자신을 만지는 손길도 좋았고 키스도 좋았다.
아리스의 장담처럼 서호는 금방 로제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로제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윤의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얕은 감정일 게 분명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은 조금 더 쉽게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이기적이었잖아.’
이곳으로 넘어올 당시 로제타의 손을 처음 붙잡았을 때부터 자신은 이기적이었다. 그의 커다란 감정을 느꼈으면서 외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주는 애정이 좋아서, 점점 채워지는 가슴의 구멍이 신기해서 그의 마음을 짐작했음이 분명한데 무의식적으로 모른 척했다.
그리고 고백을 받은 지금은…. 그 애정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걸 잃게 되면 얼마나 힘들지 이미 알잖아.’
무조건적인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자신이 얼마나 망가질지는 이미 부모님의 죽음으로 경험했다.
서호는 다시는 그런 지독한 외로움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도 가려놓았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날것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자 마음이 후련해졌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아요.”
서호의 답에 크게 기지개를 켠 아리스가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댔다.
“좋아요. 가르침은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마법은 가르쳐드리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한 선생님이죠?”
아까 윤과 대화할 때 댔던 핑계를 들먹이는 아리스에 서호가 피식 웃었다.
“그렇네요. 아리스는 좋은 선생님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아리스와 서호 모두 입을 다물었다. 서호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것처럼 책을 펼쳐 든 아리스에게 입술만을 달싹여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 중 하나가 당신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서호는 이 편안한 고요함이 좋아서 입을 다물었다.
***
서호는 눈을 번쩍 떴다. 방 안 가득 들어찬 햇빛이 보기 좋았다.
잠기운 하나 없이 말똥말똥한 눈이 햇빛 아래 떨어지는 먼지들을 바라보다가 살짝 휘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서호는 곧장 욕실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얼굴도 밝아 보였다.
답을 내려서일까?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던 전날과 달리 컨디션이 좋았다. 씻는 도중 푸티가 들어와 늦어 죄송하다고 말하는 걸 말리며 욕실을 나선 서호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리스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푸티가 화들짝 놀라며 서호를 바라봤다. 지진이 난 듯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보며 서호가 가볍게 웃었다.
“내 반응을 떠보려고 했던 건 확실히 조금 기분 나쁜데 그래도 답은 내렸으니까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