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안겔은 다시 벌레를 바라봤다. 정말 방 안에 벌레가 있었다. 황족들의 편의를 위해 건 마법이었고 더군다나 이곳은 황제궁이었다. 마법에 구멍이 생길 리가 없었다.
‘푸티가 그걸 용납할 리가 없어.’
안겔은 그를 싫어하지만 그가 매우 꼼꼼한 시종이라는 걸 알았다.
‘…왕자가 대단한 마법사다.’
그리고 왕자가 궁에 도착한 이후 갑자기 틈이 생긴 황제궁의 마법.
‘왕자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벌레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생각을 이어 가던 안겔의 감각에 순간 무언가가 잡혔다. 아주 짧은 시간 휙 지나간 느낌이었지만 기시감이 느껴졌다.
안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성큼성큼 창틀로 다가가자 벌레가 안겔을 피하듯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런 벌레의 움직임은 안겔의 성력에 막혔다. 마찬가지로 성력으로 눈앞까지 끌고 온 벌레를 유심히 살피던 안겔이 탄성을 내뱉었다.
‘역시.’
아주 미세하게나마 마나의 흔적이 느껴졌다.
신녀라는 자리의 특성상 여러 고위 인사들을 만나는 안겔은 마법사를 만나는 일도 많았다. 그렇기에 마법을 쓰고 난 뒤의 흔적 정도는 종종 보는 것이었고.
‘벌레를 이용하고 있어.’
안겔은 어느새 마나의 흔적이 거의 사라진 벌레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왕자를 압박할 수가 생겼다.
그것도 꽤 커다란.
***
서호는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머리 뒤로 꽂히던 시선을 무시했지만 방에 도착한 뒤에는 그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아리스가 들으라는 듯 대놓고 커다랗게 한숨을 쉬자 서호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냥 편하게 말해요.”
서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리스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서호가 그 앞에 앉자 아리스가 쉴 틈도 없이 말했다.
“제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서호가 모른 척 되물었다.
“그럼 뭘 원했는데요?”
잠시 욱한 얼굴을 했던 아리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됐든 이건 아닙니다. 덕분에 저만 폐하께 죽어 나갈 겁니다. 물론 푸티도 함께요.”
“푸티는 왜요?”
아리스는 그렇다 치지만 푸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
“제 말대로 행동했으니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아리스는 제대로 설명해주는 대신 따지듯 물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도대체 왕자에게 왜 그런 말을 해주신 겁니까?”
아리스의 반응을 짐작했었기에 서호는 그냥 덤덤하게 답했다.
“음, 조금 신경이 쓰여서요? 너무 오지랖 같았죠?”
아리스는 자신과 윤이 친해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아리스에게 윤을 선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고 단언했었고.
그런데 오늘 서호가 그런 말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분명 폐하께서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지 않으셨나요?”
확실히 오늘 일을 로제타가 알게 된다면 여러모로 신경을 더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저질렀다.
‘오늘은 로제타를 별로 배려해주고 싶지도 않고.’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사실 후회하지도 않았고.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어요.”
“왜요? 혹시 왕자님에게 마음을 여신 겁니까?”
제발 그렇게 답하지 말라는 간절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서호는 솔직하게 말했다.
“…완전히는 아니고 일부?”
“서호님.”
땅이 꺼질 듯 낮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서호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심각하게 볼 건 아니에요. 그냥 연민과 동질감을 느꼈을 뿐이니까.”
“연민이요?”
서호가 윤에게 가진 감정은 곧 자신처럼 가족을 잃을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레이스를 사랑하는 건 보이잖아요. 그리고 오늘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그냥 조금 안됐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말해주고 싶었어요.”
아리스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폐하께서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겁니다.”
아리스가 살짝 고개를 들며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쉬우십니까?”
“내가 쉽다고요?”
이건 조금 말이 심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아리스의 얼굴이 너무 거무죽죽해서 그 점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대화 한 번에 그렇게 마음을 활짝 여시면….”
서호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일부라니까요? 그리고 그를 향한 의심과는 별개의 감정이고요.”
“정말 그러셨으면 좋겠네요.”
그리 말하는 아리스에게는 서호를 향한 믿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말을 하면 할수록 우울해지는 아리스에 서호는 그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도 꺼내 들었다.
“정말이에요. 그리고 덕분에 숙제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여러모로 도움도 됐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에 약한 희망의 빛이 맴돌았다.
“숙제를요?”
“네. 부모님이 생각나서요.”
“그게 무슨….”
서호는 아리송한 얼굴을 한 아리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전날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리스. 이번에 꽤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줬잖아요. 이유가 뭐예요?”
“갑자기요?”
아리스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서호가 그 미간의 주름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묻고 싶어서요. 푸티랑 다르게 아리스는 완전한 로제타의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으니까.”
로제타의 명령을 따르고 그의 밑에 속해 있지만 푸티처럼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모시는 건 아니었다.
‘…유치하지만 로제타보다는 나랑 더 친한 것 같고.’
그러니까 자신을 위한 답을 듣기에는 더 적합한 상대였다. 윤과 나눈 대화로 한 발 내디디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 더 확신이 필요했다.
잠시 말이 없던 아리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전 남의 일에 관여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런 일은 도와줬다가 잘못되면 욕을 먹으니까요. 하지만 서호님이 마음에 들고 폐하는 무서우니 이번만큼은 끼어들었죠.”
“이유가 이상하지 않아요?”
자신은 좋고 로제타는 무서워서 도와주겠다니? 하지만 아리스는 별다른 설명 없이 답했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제가 끼어들 이유가 되거든요.”
“아무튼 로제타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끼어들었다는 거죠?”
“따지자면 그렇죠.”
딱 원하던 답이었다. 서호가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리스가 볼 때 우리 둘의 관계는 어떤 것 같아요? 음, 평범해 보이나요?”
“어떤 의미로 하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좀 모호했던 것 같았다. 서호가 조금 더 말을 다듬었다.
“그러니까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냐는 거예요. 감정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거나….”
서호가 말끝을 흐리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리스가 됐다는 듯 손을 흔들며 답했다.
“확실히 폐하께서 서호님을 더 좋아하시는 건 분명하죠.”
“역시 그렇죠?”
조금 실망스러운 답이었다. 하지만 아리스의 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네. 하지만 그게 비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보는 게 조금 껄끄럽긴 한데 저는 원래 남들이 연애하는 걸 지켜보는 일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연애요?”
연애라니? 서호가 의문을 표하자 아리스가 코웃음을 쳤다.
“폐하에는 미치지 못해도 서호님도 폐하를 좋아하는 게 보이니까요. 같은 의미는 아니라고 하셨지만 일단 겉으로 볼 때는 연인처럼 보입니다.”
“연인처럼요.”
“네.”
서호는 로제타와 함께 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사람이고 생활 전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연인 같다기에는….
“흐음.”
서호가 침음을 내자 아리스가 푹,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이번에 하려던 조언을 곁들여도 되겠습니까?”
원하던 바였다. 서호가 눈을 빛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혼자 숙제를 해보려고 했지만 도와준다는 걸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아리스가 곧장 질문을 던져왔다.
“왕자님을 만나기 전 오늘 내내 불편하셨던 이유가 폐하 때문이라는 건 서호님도 인지하고 계셨었죠?”
그 말대로 오늘 서호는 뭔가를 할 때마다 로제타가 떠올랐다. 행동 하나하나에 로제타를 떠올렸고 기억을 더듬었으며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서호가 동의하듯 눈을 깜빡이자 아리스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럼 묻겠습니다. 폐하의 빈자리가 신경 쓰이신 건 알겠는데, 평소와 다름없다는 폐하의 상태에 대해 들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다 질문에 답하려던 서호는 문뜩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도대체 아리스는 로제타가 평소와 다름없다는 걸 어떻게 안 거예요? 나는 말한 적이 없는데.”
말하고 나니 더 이상했다.
‘그래, 나는 분명 아리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아리스는 자신이 윤을 만나기 전부터 로제타가 오늘 평소처럼 생활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호가 얼른 답하라며 눈에 힘을 주자 아리스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제가 푸티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으니까요.”
“네?”
서호가 할 말을 잃고 아리스를 바라보는데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가 덧붙였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실제로 폐하는 일단 평소처럼 일은 하고 계십니다.”
“일은요?”
거슬리는 부분을 지적하자 아리스가 이야기가 옆으로 새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상태는 서호님의 답을 듣고 난 뒤에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