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윤은 대단한 마법사이니 실제로 서호가 마법을 배우고 있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서호가 마법을 배운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말이라는 거였다.
“못난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부끄러우니까 진전이 생기면 부탁할게. 제안해 줘서 고마워.”
“그래.”
서호는 윤이 또 한 번 사과하기 전 이야기를 틀었다.
“그레이스가 본래 세상을 많이 그리워했어?”
저번에도 그렇고 윤은 종종 서호가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본래 세상이 그립지는 않은지 간접적으로 확인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그의 어머니인 그레이스 때문일 것이다. 잠시 침묵하던 윤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꿈이 사라지고 난 뒤에 많이 힘들어하셨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그것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면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셨을 수도 있겠다. 선택지 자체가 아예 사라진 거니까.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아예 선택도 못 하는 건 다르게 느껴지잖아.”
“…그렇지.”
윤의 단단해지는 턱선을 살피던 서호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괜찮으셨을 거야.”
“그랬을까?”
서호가 부러 가볍게 이야기했다.
“너는 나랑 비교도 안 되게 착한 아들이잖아.”
“내가?”
짧은 시간 그를 봤을 뿐이지만 그는 정말 그레이스를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리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목적이 그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의 전부라면 그는 정말 오로지 어머니를 위해서 이 힘들고 피곤한 일을 자처한 거였다.
“나는 너처럼 못했을 거야. 솔직히 지금 이 상황 불편하잖아. 신분을 숨기고 의심받고.”
서호가 딱히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들이 그를 의심하고 있음을 솔직히 말하자 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괜찮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의심하는 게 맞고. 소중한 사람이 잘못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
말을 할 때면 늘 서호의 눈을 마주하던 윤의 시선이 아래로 쳐졌다. 그리고 고해하듯 돌아온 말.
“사실 온전히 어머니를 위해 움직였다기보다는 자기만족인 경향도 약간 있어.”
“자기만족?”
“내가 생각했을 때 최고의 답을 주려고 하는 거야. 지금 이것도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지는 않았거든.”
윤이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내 멋대로. 내가 마음이 편한 쪽으로. 이렇게 하면 좋아하실 거라고 핑계를 대면서.”
입꼬리가 웃음을 만들려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지만 그 떨림은 웃음이 되지 못했다.
“원래 사람은 자기가 제일 중요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착한 아들은 아니라는 거야.”
일자로 닫힌 입술을, 조금 밑으로 처진 입매를 바라보던 서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냥 로제타에 대한 생각을 잠시 뒤로 미루기 위해서 그와 약속을 잡았을 뿐이었다.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니까.
‘열 수가 없었지.’
그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화 때문에 의심과는 별개로 윤이 신경 쓰였다.
‘같은 곳에 뿌리를 둔 사람이라서?’
어쩌면 이건 가족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동질감일 수도 있었다. 서호는 처음으로 숨김없는 윤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어머니를 잃는 것이 두려운 아들의 모습. 그리고 곧 떠나보낼 사람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윤.
‘신경이 안 쓰이기도 힘들지.’
부모님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흔들리는 윤을 두고 보기 힘들었다. 자신과 달리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 그가 마무리를 잘하기를 원했고.
‘의도치 않게 도움을 받는 것도 같고.’
오지랖이 분명했지만 서호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 착한 아들 같다.”
“뭐?”
테이블을 맴돌던 시선이 서호에게 닿았다. 서호가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사진기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처음 이거 만든 게 어머니가 본래 세상의 물건을 그리워하셔서라고 했지?”
서호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렇게 여기로 온 것도 어머니 때문이고. 그런데 지금 이 모든 게 네 생각만 한 거라니.”
서호가 윤을 똑바로 마주 보며 타박하듯 이야기했다.
“나는 이렇게 들리는데? 어머니의 행복이 곧 네 행복이 됐다고. 대단하다, 윤아.”
“…그런,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윤이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정했지만 서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뭐, 나는 그렇게 들었어. 그렇게 받아들였고. 내 해석이야.”
반론은 받지 않겠다고 말을 덧붙이자 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그게.”
당혹스러워 보이는 그 얼굴을 보면서도 서호는 뻔뻔하게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서호에게 조언을 할 때 아리스가 왜 이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 어머니도 네 행복이 자기 행복이시겠지? 네가 이렇게 자란 걸 보면.”
흔들리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알겠다.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 답을 알면서도 흔들리고 있는 상대에게는 확신을 주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랬으면 좋겠네.”
이 확신이 상대에게 옮겨가 조금이라도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게, 울 듯 웃는 그 얼굴을 보며 서호가 생긋 미소 지었다.
***
안겔은 손안에 들어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고 손안의 편지가 우그러졌지만 안겔은 힘을 풀지 못했다.
‘쓸모없긴.’
편지에는 핑계만 한가득 적혀 있었다. 가진 인맥을 활용해 몰래 황궁으로 들여온 보람이 전혀 없었다.
이 편지로 안겔이 확인할 수 있는 건 후궁의 옆에는 늘 사용인이 함께하며 그녀가 깨어난 모습을 본 적 없다는 것뿐이었다.
안겔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차분하게 다시 편지 내용을 되짚어 봤다. 별것 아닌 이야기에서 다른 무언가를 찾아낼 수도 있었으니.
‘깨어난 모습을 본 적 없다?’
바깥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후궁. 꽤 긴 시간 방을 드나들었지만 언제나 잠들어 있다는 그녀.
‘깨어나지 못하는 건가?’
하지만 맡은 일은 잘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이가 일을 대신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그러고 보니 왕자도 후궁에게 남은 시간은 1년뿐이라고 했었지.’
그때 그 말이 진실이었다면….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인가?
‘편지가 그저 궁에 머물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잖아.’
안겔이 이번 편지로 얻은 건 왕자가 다른 무언가를 위해 이곳에 왔다는 짐작이 확신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안겔은 남은 편지를 쳐다봤다. 후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왕국 전체에 도는 루미너스에 대한 이야기를 모았을 편지였다.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왕국으로 보낸 두 명의 신관 중 한 명에게는 그레이스에 대한 조사를, 다른 한 명에게는 루미너스에 대한 조사를 맡겼다. 대단한 무언가를 알아낼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시도를 해보는 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적은 편이니까.’
혀를 찬 안겔은 남은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번 역시 그리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진 않았다.
후궁 그레이스와는 굉장히 친밀한 모자 관계였고 왕세자가 루미너스 왕자를 많이 신경 쓰며 왕자는 왕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
‘암암리에 머지않아 왕국에서 제일 강력한 마법사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가장 마지막 줄을 눈으로 훑으며 안겔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위 계승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으니 왕세자와 왕과의 관계에 끼어드는 건 불필요해. 괜히 일을 더 크게 만들 필요는 없지.’
결국 여기서도 쓸 만한 정보는 왕자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라는 것뿐이었다. 안겔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그간 얻은 정보들을 떠올렸다.
‘하등 쓸모없는 이야기들뿐이지.’
지난 며칠간 궁을 돌아다니면서 얻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황제궁의 사용인들이라 그런 걸까? 그들은 황제와 서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루미너스는 사용인들 앞에서도 철저하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신관이라고 알려진 왕자였기에 신녀인 자신에게 말을 아끼는 걸 수도 있지만 실제로 왕자에 대한 평은 대체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며 모시기 어렵지 않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결국 왕자에게 직접적으로 정보를 얻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안겔에게는 왕자와 교환할 만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았다.
‘끌려다닐 수는 없는데.’
어떻게든 무슨 방법을 찾아야 했다.
‘쓸모없는 정보처럼 보여도 중요한 정보일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돼.’
여러 정보가 복잡하게 머리를 맴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찡, 울리는 머리에 안겔은 잠시 머리를 비우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꽉 닫힌 창문 밖에는 푸른 나무 사이로 쨍쨍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옅게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별생각 없이 바라보는데 창문틀에 파르르 날개를 떠는 벌레가 보였다. 순간 가볍게 넘겼던 말이 떠올랐다.
사용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소소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던 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던 이야기.
더운 바깥 날씨와는 달리 궁 안은 마법으로 인해 시원하며 벌레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마법이 오래돼서 그런지 요새 벌레가 종종 보이는 것 같아요. 정원의 생명체들은 궁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는데. 혹 신녀님 방에도 벌레가 들어오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