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4화 (94/155)

#94

이 모든 불편함은 로제타가 옆에 없기에 시작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걸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그렇군요.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데,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죠.”

아리스가 지체 없이 질문을 이어 나갔다.

“며칠 지나면 익숙해질 것 같으세요?”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로제타와 따로 지내는 지금 상황도 일상이 될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긴 하겠죠.”

“하지만 지금 상황이 익숙해질 만큼 떨어져 있을 생각은 없으시잖아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서호님은 일단 폐하를 좋아하시니까요.”

서호가 아리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며 눈꼬리를 접었다.

“그렇죠.”

푸티에게 말했듯 서호는 최대한 빨리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로제타가 오랜 시간 답을 기다리게 할 생각이 없었다.

‘마음고생 할 게 뻔한데.’

답을 제대로 해주지 않고 희망 고문을 할수록 로제타는 더욱 힘들어질 게 뻔했다.

‘뭐, 내 예상과 달리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지만.’

서호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트는데 아리스가 말했다.

“그럼 빨리 결론을 내려야겠네요.”

서호는 다시 이기적이고 유치한 생각을 지워내려 애쓰며 이야기했다.

“네, 그럼 이제 가르침을 내려주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주도적인 학습을 지지하는 편입니다. 조금 더 고민해 보세요.”

“빨리 돌아가길 바라는 거 아니에요?”

계속 조언해 주기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굉장히 여유로워 보였다. 의아함 가득한 서호의 물음에 아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건 중요한 문제니까요. 하나 더 조언해드리자면 서호님도 평소처럼 생활하시는 게 어떨까요?”

“네?”

“폐하께서 그러시는 것처럼 서호님도 평소처럼 생활해 보세요.”

“…평소처럼이라고 해도 전 별로 하던 게 없는걸요?”

아리스와 수업을 하거나 푸티와 이야기를 나누고 종종 윤을 만나는 걸 제외하면 서호는 대부분 로제타와 시간을 보냈다.

로제타는 함께 아침을 먹고 오전 9시쯤 나가서 5시나 6시 사이에는 돌아오곤 했으니까.

‘종종 점심을 함께 먹자고 돌아오기도 했고.’

그가 없는 동안 공부한 걸 복습하거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갔었다.

‘음, 왜 푸티나 아리스가 걱정했는지 알겠네.’

남들이 볼 때는 정말 잔잔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삶이지 않은가.

‘나는 나쁘지 않았는데.’

서호가 쓰게 웃으며 아리스를 쳐다봤다.

“내가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아리스도 알잖아요?”

“하긴 요새 같이 지내기는 했었죠.”

“평소처럼 하라고 해도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서호가 말끝을 흐리는데 아리스가 그의 말을 정정했다.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뭐요?”

“왕자 전하를 만나는 거요.”

서호가 황당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윤을 만나라고요?”

아리스가 태연하게 펜을 놀리며 답했다.

“뭐, 어떻습니까? 전날 제대로 대화를 하지도 못하셨잖습니까?”

“아.”

로제타와의 일에 정신이 팔려서 그와의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었다.

“오늘은 서호님이 먼저 편지를 보내 보는 것도 좋겠죠.”

이어진 아리스의 말에 서호가 망설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불편해할 것 같은데.”

“누가요?”

당연히 로제타가…. 하지만 로제타는 오늘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

서호가 침묵하자 아리스가 꼭 놀리는 것처럼 방금 그가 깨달은 사실을 다시 짚어줬다.

“폐하께서는 평소처럼 지내고 계신다니까요? 함께 사진을 찍으시다 보면 기분 전환이 되지 않겠습니까?”

노려보듯 아리스를 바라보던 서호가 눈에 힘을 풀며 물었다.

“나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네.”

깔끔하게 뚝 떨어진 답에 서호가 괜스레 그의 말을 부정했다.

“아닌데요?”

“억양부터 다르십니다.”

기분이 이상한 건 맞았다. 평소보다 조금 툴툴거리는 것도 같았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리스에게 끌려다니는 것 같아서 조금 짜증 나는데 그래도 이왕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한 김에 한 번 더 그 말을 들어 보자 싶었다.

“로제타에게 보고는 할 거죠?”

“네.”

“…알았어요. 편지를 보내 볼게요. 윤이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윤도 개인적인 일정이 있을 테니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줄 거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서호의 말에 아리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글쎄요.”

***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고 눈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서호는 편지를 보내고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윤을 만나고 있었다.

로제타에게 사전에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방에 초대받아 사진기를 만져 볼 수는 있었다.

서호는 그의 뒤에 서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 있을 아리스를 무시하려 애쓰며 윤에게 사과했다.

“너무 갑작스러웠지?”

“아니야. 나도 오늘 특별히 할 일은 없었어.”

윤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서호는 꼭 핑계를 대는 사람처럼 말을 덧붙였다.

“음, 오늘 시간이 남아서.”

그러자 윤이 생긋 웃더니 떠보듯 물었다.

“그래? 어제 뭔가 고민하던 것 때문은 아니고?”

확실히 전날의 모습이 많이 이상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서호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해결을 보는 중이야.”

“그래? 좋은 쪽으로 마무리됐으면 좋겠네.”

서호도 원하는 바였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윤이 건넨 차를 마시던 서호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윤의 눈가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티 나? 그냥 오늘 좀 잘 잤어.”

“그래?”

윤이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응. 요 며칠 꿈을 꿨었거든.”

“꿈?”

“응. 악몽이라 그런지 계속 깨더라.”

서호는 잠을 못 자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눈 밑을 살폈다.

“피곤했겠다. 잠 못 자는 건 괴롭잖아.”

그러자 윤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건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지.”

자연스레 감기는 눈꺼풀 너머로 윤의 금안이 낮게 가라앉는 것 같았으나 눈을 깜빡인 후 다시 본 윤의 눈동자는 평소처럼 맑았다.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서호가 질문을 하기 전 윤이 운을 뗐다.

“이왕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나 궁금한 게 있어.”

“응?”

“그 꿈 말이야.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

윤이 지금 말하는 건 흰 손이 나오는 그 꿈일 테다.

‘하긴 윤이 짐작할 만한 내 고민거리는 그것뿐이겠지.’

신력이 있는 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걸 윤에게 말해줄 수는 없으니 특별히 이야기할 게 없었다.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그러는 사이 윤의 말은 계속됐다.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어. 앞으로 꿈은 계속 찾아올 텐데 따로 무슨 방도를 생각해 둔 게 있어?”

왜 이런 게 궁금하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서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를 향한 염려만이 가득했다.

‘항상 나에게 호의를 보이긴 했지.’

서호는 얼른 적당한 핑곗거리를 주워 삼켰다.

“…마법사 아리스가 내 선생님이야.”

실제로 아리스에게 마법은 아니지만 글자를 배우고는 있긴 했으니 선생님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서호가 뒤에 있는 아리스를 슬쩍 돌아보며 말하자 윤이 되물었다.

“마법을 배우니?”

한번 시도를 해보긴 했다. 진짜 씨앗을 찾을 때. 물론 알고 보니 그건 신력 활용을 연습했던 거였지만.

“뭐, 시도는 해보고 있어. 로제타도 여러 방면으로 살펴보고 있고.”

하지만 그런 서호의 답에도 윤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렇구나. 그, 이런 질문은 조금 무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본래 세상이 그립지는 않고? 편지에서 너는….”

망설이는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조급하게 질문을 던지던 윤이 두서없이 말을 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역시.’

로제타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생략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서호가 괜찮다는 의미로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너도 읽어 봤을 거라는 건 짐작했어.”

“서호, 나는….”

“괜찮다니까.”

이쪽도 그레이스의 편지를 로제타와 공유했기에 서호는 윤을 타박하는 대신 전날 그레이스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나쁜 이야기는 쏙 빼놓고 좋은 이야기만 써 놓은 편지.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이야기만을 썼기에, 그 편지 속 서호는 그림자 따위는 없는, 화목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사람이었다.

‘편지에 모든 걸 적진 않았으니까 더욱 상관없고.’

서호가 매끈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물론 그때도 나쁘진 않았지만 나는 지금이 좋아. 그곳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듯이 여기서도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고.”

“미안해.”

고개를 숙이며 건네지는 사과에 서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윤은 그런 서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이로 인해 편지가 끊길까 걱정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사실인 것 같으니까.’

서호와 윤을 연결해준 고리는 그의 어머니인 그레이스였고 따라서 둘의 대화에는 종종 그레이스가 튀어나오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서호는 미처 숨기지 못한 그녀를 향한 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서호가 손안에 들린 사진기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는데 사과의 의미인지 윤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마법을 배운다면 나도 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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