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3화 (93/155)

#93

“그러니까 지금 잘 모르겠다는 소리예요?”

“네.”

당당한 그 모습에 뭐라고 할 의지를 잃은 서호가 입만 뻐끔거리는데 아리스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며 턱을 치켜올렸다.

“저는 늘 숙제를 하다 보면 홀로 답이 구해지곤 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스승에게 교육을 받은 서호님은 답을 찾을 수 있으실 겁니다.”

장난스러운 태도였지만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도움이 되네요.”

“다행입니다.”

돌덩이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쯤 뚫린 것도 같았다.

“이제 돌아가요. 그리고 퇴근해요.”

“퇴근이라고 말을 붙여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푸티가 서호님의 옆방을 줬거든요.”

서호가 슬쩍 아리스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피곤하겠네요.”

“아니요. 서호님의 방과 비슷한 방이라서요. 제가 써 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방이라 좋습니다.”

서호가 또 한 번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리스는 사람 마음을 가볍게 하는 데 꽤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웃긴다니까.”

하지만 덕분에 밤 산책 후 서호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텅 빈 옆자리를 느낀 서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으.”

본래도 로제타는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기에 옆에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비어 있는 옆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그리고 집무실을 나설 때 건네던 다정한 인사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는 서호가 인사를 건네기도 전 잘 잤냐고 물어오던 목소리가 사라져서?

침구는 여전히 보들보들하고 푹신했는데 이상하게 포근한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잤음에도 서호는 개운하지 않았다.

멍하니 아무런 무늬가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는데 노크와 함께 익숙한 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서호님….”

방으로 들어오다 서호와 눈이 마주친 푸티가 전날보다는 편안해진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일어나셨어요?”

전날의 당혹스럽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던 모습과는 다른,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서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답했다.

“웬일이에요?”

“지금쯤 일어나셨을 것 같아서 도와드리려고요. 본래 제 도움을 받지는 않으시지만 새로운 방이니 물건이 어디 있는지 알려드려야죠.”

“로제타는요?”

로제타는 어쩌고 이곳에 와서 자신을 도와주느냐는 물음이었다. 찰떡같이 말을 알아들은 푸티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서며 답했다.

“폐하께서는 벌써 일을 시작하신걸요. 원래 폐하께서는 하루를 일찍 시작하시잖아요?”

서호는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걸어가며 물었다.

“로제타가 보냈어요?”

푸티가 욕조에 물을 받으며 답했다.

“제가 제일 편하시잖아요.”

서호가 푸티 외에 다른 사용인에게 낯을 가리는 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푸티는 로제타의 직속 시종이었다.

서호가 머뭇거리는데 푸티가 숙였던 등을 펴며 답했다.

“그리고 저도 서호님이 괜찮으신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고요.”

“로제타는 어때요?”

푸티가 샤워용품을 하나하나 점검하며 답했다.

“평소와 크게 다르신 건 없으세요. 눈의 붓기도 다 가라앉았고요.”

서호와 눈을 맞춰오는 푸티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다행히 자신이 떠나고 눈물범벅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서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미소를 지은 푸티가 샤워 후 서호가 입을 가운을 정리하며 물었다.

“오늘은 뭘 하실 생각이세요? 읽던 책을 가져다드릴까요?”

“금방 돌아갈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런가요?”

기뻐하는 푸티의 얼굴을 보며 서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는 이 고민을 길게 끌어갈 생각이 없었다.

‘도와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전날의 일을 떠올린 서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리스 덕에 생각보다 일찍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푸티가 불러준 거죠?”

“…네.”

서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푸티에 서둘러 말을 더했다.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고맙다는 소리예요. 덕분에 잘 잤거든요.”

“다행이네요.”

“아리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요.”

“서호님께 오기 전에 뵙고 왔는데 괜찮으셨어요.”

하긴 바로 옆방이니 푸티가 확인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서호가 다행이라 말하자 푸티가 욕실의 물 온도를 확인하다가 물었다.

“아리스님을 불러드릴까요? 아리스님도 깨어나셨거든요. 방금 도와드리고 왔어요.”

서호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할지 모르니까 점심 식사가 끝나고 난 뒤에 만나는 게 좋겠어요.”

푸티가 수건에 손을 닦아내며 욕실을 쭉 살피더니 서호에게 다가왔다.

“네, 편하신 대로 하세요. 씻고 나오시면 바로 식사하실 수 있게 준비할게요.”

“고마워요.”

푸티가 고개를 숙이더니 서호를 지나쳐 욕실을 나섰다. 서호는 그대로 문을 나서는 푸티를 조심스레 불렀다.

“푸티?”

푸티가 부드럽게 몸을 돌려 서호를 돌아봤다.

“네, 서호님.”

서호는 가만히 푸티의 얼굴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푸티가 의아하다는 듯 갸웃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다시 홀로 남은 서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욕실 문을 닫고 욕조로 다가갔다.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그자 평소와 똑같은 온도가 서호를 반겼다.

“평소와 똑같다.”

로제타가 없는 것을 빼면 정말 평소와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했다. 분명 이전에도 잠들기 전 그를 보지 못했는데 일어나서도 그를 보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왜 지금은 이렇게 텅 빈 느낌인 걸까?

서호는 물에 깊게 몸을 담그며 푸티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찬가지로 평범해 보였지.”

별다른 일이 없어 보이는 순한 얼굴.

로제타의 상태가 엉망이라면 푸티가 그렇게 평온할 리가 없었다. 푸티는 로제타를 매우 아꼈으니까.

눈의 부기가 가라앉았다는 말은 다행히 로제타가 그 뒤에 더 울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며 푸티의 말대로라면 그는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그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그의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로제타가 식음을 전폐했다거나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지만 거슬렸다.

‘왜?’

나는 그가 없는 게, 그가 없는 일상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데. 잠들기 전에도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그의 생각만 하고 있는데 왜 로제타는 멀쩡할까?

“이기적이야.”

그가 괜찮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괜찮지 않길 바라는 스스로의 모순적인 모습에 기가 찼다. 아직 자기 마음에 확신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로제타가 예상대로 전전긍긍하지 않는 것이 기꺼우면서도 동시에 신경 쓰이는 것이다.

“못됐어.”

자신이 이렇게 못된 사람인 줄 몰랐다. 스스로에게 실망한 서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욕조에 얼굴을 묻었다.

***

책을 가져오지도, 그렇다고 공부할 거리를 가져오지도 않았기에 서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없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실 겁니까?”

그리고 지금 서호가 하는 건 무언가를 종이 위에 줄줄 쓰는 아리스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서호가 태연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리스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부담스러운데요.”

서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렇게 봐서는 뭐라고 쓰는지 안 보이는걸요.”

그러자 아리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죠?”

멍청이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정말 시간이 안 갔다. 서호가 아리스가 전날 그랬듯 당당하게 답했다.

“하지만 할 게 없는걸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은 아리스가 펜을 내려놓으며 제안했다.

“산책하러 가실래요?”

확실히 산책이라도 나가면 시간이 좀 지날지 모르겠지만 밤이 걱정됐다.

“밤을 위해서 아껴둘래요.”

아리스가 부러 눈을 커다랗게 뜨고 놀란 척 물었다.

“안 돌아가십니까?”

서호가 찌릿 아리스를 노려봤다.

“결론을 내지 못했으니까요.”

아리스가 실망했다고 중얼거리며 물었다.

“숙제를 마치지 않으신 겁니까?”

왠지 모르게 울컥한 서호가 따지듯 답했다.

“기한을 주지 않았잖아요.”

아리스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뽐내듯 이야기했다.

“저는 하루면 문제를 풀었습니다.”

“좋겠네요.”

서호가 코웃음을 치는데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름 천재라고 불렸으니까요.”

할 말이 없었다. 서호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아리스가 재밌다는 듯 웃다가 팔짱을 풀고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며 물었다.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눈을 가늘게 좁히던 서호는 일단 아리스의 장단에 맞추기로 했다.

“잠은 잘 잤죠.”

“그 외에는 다 별로였다는 소린가요?”

정확하게 의표를 찌르는 아리스에 서호가 멈칫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맞아요.”

“예를 들면요?”

그러니까 이건 전날 밤 산책에서와 동일한 패턴이었다. 하지만 서호는 이번에는 조언을 구한 적 없다 버티지 않았다.

전날 그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서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이번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든 게 평소와 똑같은 것 같은데 불편해요. 마음이 안 편하고.”

“왜 그런 것 같습니까?”

서호가 솔직하게 답했다.

“맨날 있던 사람이 옆에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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