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6장. 갈림길
밤이 늦은 시각.
차를 한잔 따라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서호는 그의 맞은편에 있던 이를 바라봤다.
“아리스.”
밝은 갈색 머리 위에 잔상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스쳐 지나갔다. 홀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건 대부분 로제타였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서호는 제국으로 오고 처음으로 로제타의 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잠자리를 마련한 참이었다. 서호는 몇 시간 전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를 봐주던 푸티를 떠올렸다.
이불을 정리해주는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당황했던 것도 같다.
‘밤에는 당연히 돌아가서 같이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필요해 방을 잠깐 나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예 각방을 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서호는 당황할지언정 푸티를 말리지는 않았다.
고백 후 도망을 가려던 로제타라면 자신이 조금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쩌면 이렇게 조금 떨어져 있는 게 머릿속을 정리하기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떨어져 있게 된 지 고작 반나절이 지났지만 불쑥불쑥 느껴지는 빈자리를 모른 척하며 서호가 아리스에게 물었다.
“아리스, 피곤해요?”
“아니요. 오늘은 딱히.”
서호가 창밖을 눈짓하며 물었다.
“잠깐 나갈까요?”
그러자 아리스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앉아 있어서 몸도 뻐근했는데 잘됐습니다.”
보란 듯이 기지개를 켠 아리스가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서호가 그를 따라가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리스가 따라붙으려는 사용인들을 물리고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로제타의 방 앞에 있던 정원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구조였다.
서호는 선선한 밤바람과 풀냄새를 즐기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따라오고 있는 아리스에게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푸티가 보냈을 게 뻔한 아리스의 등장에 서호는 군말 없이 그를 방으로 들였다. 혼자 있고 싶다고 했으나 그럼에도 혼자 두는 게 걱정이 될 푸티나 로제타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리스는 너무 조용히 방 한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생각에 잠기다 보면 종종 그가 옆에 있다는 걸 잊기도 했다.
‘푸티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을 텐데.’
별다른 말이 없는 그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서호가 아리스를 돌아보는데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요.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 깨닫는 거죠.”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능청스레 덧붙였다.
“뭐, 조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필요하시면요.”
그 가벼운 태도에 설핏 웃음이 흘러나왔다. 푸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은 심각하게 굳어 있던 푸티보다는 아리스가 옆에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았다.
“그래요. 필요하면 부탁할게요.”
다시 올려다본 구름조차 없는 하늘에 매달린 달은 정말 커다랬다. 금방이라도 이곳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은은하게 빛나는 달.
“밤하늘이 예쁘네요.”
“그런가요?”
두 눈으로 이만큼이나 커다란 달을 볼 수 있다니 신기했다.
“한 번도 이렇게 밤하늘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원래 10시만 돼도 잠들거든요.”
사실 오늘 이처럼 밤 산책을 하는 건 10시가 넘었는데도 말똥말똥한 정신 때문이었다.
이미 잠들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서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아리스가 그게 별거냐는 듯 대꾸했다.
“하루쯤 잠을 안 자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으니까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샜다.
“하긴 그랬죠. 시험 기간에는 종종 밤을 새우기도 했어요.”
서호의 답에 아리스가 장난스레 답했다.
“그때는 잠이 많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렇게 많이 자게 된 건 로제타의 영향이에요. 몇 달을 제대로 잠을 못 자니까….”
서호는 로제타의 이름에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아리스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처음 폐하를 보셨을 때는 어떠셨습니까?”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요?”
“아니요. 눈을 발견하셨을 때요.”
“무서웠어요.”
“무서우셨습니까?”
서호는 놀라 보이는 아리스에 더욱 놀랐다.
“안 무서웠겠어요? 갑자기 벽에 눈이 떡하니 나타났는데, 자리를 옮겨도 따라다니더라고요.”
소파에서 잠이 들어도 바뀐 장소에 새롭게 생기는 눈에 기겁했던 기억이 났다.
아리스가 의아한 얼굴로 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폐하께 호감을 가지게 되신 겁니까?”
무서워하던 로제타를 다르게 보게 된 이유는 하나였다.
“…울음소리가 슬펐거든요. 눈물도 계속 흘리고.”
특히 이곳으로 오기 전 마지막 한 주는 걱정의 연속이었다.
“일주일 내내 우는데 점점 목이 쉬어가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처음에는 귀신도 목이 쉬나 싶었다니까요?”
서호가 옅은 웃음을 흘리는데 아리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처음 서호님이 폐하께 느꼈던 감정은 안타까움입니까?”
순간 무언가 깨달은 서호가 헛웃음을 흘리며 아리스를 돌아봤다.
“아직 조언을 부탁하지는 않았는데요.”
아리스가 뻔뻔한 얼굴로 물었다.
“그만둘까요?”
담담한 그 얼굴을 마주 보던 서호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까움이 시작이었던 건 맞아요.”
그리고 로제타에게 느꼈던 감정을 하나씩 나열했다.
“그다음에는 동질감이었던 것 같고.”
내가 외로워서, 그래서 그저 자신이 좋을 대로 상황을 해석했던 것도 같았다.
“얼마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본 적도 없는 나한테 눈물을 보일까? 엄청 외로워하는 게 느껴져서 동질감이 들었죠.”
“느껴져서요?”
“감정이 얼핏 느껴졌거든요. 당시에 거울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했어요. 제국에 온 그날 이후로는 못 느끼지만요.”
“…그래서 더 쉽게 폐하께 마음을 연 거군요.”
그런 것도 같았다.
“맞아요. 로제타의 감정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거든요. 내가 처음 그를 제대로 마주 봤을 때의 환희와 기쁨. 행복.”
내 것이 아닌 다른 이의 감정을 그리 생생하게 느낀다는 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 가슴이 함께 떨릴 정도로 커다란 감정이었어요. 뭔가 복받쳐 오르는 느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가득 찼다.
“그때 느꼈어요. 아, 이렇게 내 존재를 반겨주는 사람이 있구나. 부모님 외에도….”
“서호님은 많이 외로우셨군요.”
괜찮아졌다고, 처음에 비해 나아졌다고 하지만 서호는 지독히도 외로웠다.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 공허했던 서호에게 그 커다란 감정은 깊게 각인됐다.
“맞아요. 그래서 그 커다란 애정이 좋았어요. 텅 빈 곳을 채워주는 느낌이었거든요. 아마 예전의 저였다면 부담스러워했을 텐데.”
서호가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한때 이곳에 손을 올리면 꼭 손이 가슴 안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구멍 나지 않은 평범한 가슴.
“채워지는 데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구멍이 사라져서 놀랐죠.”
외로움과 공허함이 만들어낸 커다란 구멍을 로제타의 감정으로 채웠다. 그런데 그렇게 구멍을 채우고도 로제타의 감정은 넘쳐나서 자신의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서호가 부러 장난스레 덧붙였다.
“스며들었다고 할까요?”
하지만 장난스러움은 잠깐이었다.
“그래서 로제타가 없는 삶은 상상이 안 돼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감정이 너무 커서.”
로제타의 마음이 기쁘면서도 버거웠다. 당신을 잃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당신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때 서호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리스가 물었다.
“서호님의 마음이 폐하만큼은 아닌 것 같다는 건가요?”
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로제타의 감정을 느꼈잖아요. 근데 전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자신도 물론 로제타를 좋아했다. 하지만 로제타만큼의 감정을 돌려줄 정도로 크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냥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같이 있으면 좋고 옆에 없으면 빈자리가 느껴지지만 그래도 로제타만큼은 아니에요.”
이 감정이 성애적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그를 향해 보내는 감정의 총량 자체가 달랐다.
사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간은 아예 그런 쪽으로 로제타를 인식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조금만 방향을 틀면 자신은 금방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딱히 싫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으니까.’
그의 키스에 얼굴을 붉게 물들일 때도 서호는 부끄러움을 느꼈을지언정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의 스킨십이 없던 며칠이 어색했고 오늘에서야 다시 닿은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던 걸 보면 더더욱.
아리스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폐하를 쉽게 받아들이게 했던 그 느낌이 이제 서호님의 발목을 붙잡는군요.”
“맞아요.”
“흠. 복잡하네요.”
그 말을 끝으로 아리스가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서호는 아리스를 잠시 기다려 주다가 조급한 마음에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조언은요?”
아리스가 말끔한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저도 조금 생각을 해보고 조언을 해드리겠습니다.”
“바로 안 해주고요?”
“서호님도 생각을 해보셔야죠. 숙제입니다.”
“네?”
황당해하는 서호를 보면서도 아리스는 태연했다. 서호가 허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데 아리스가 시선을 느꼈는지 피식 웃었다.
“저한테 마법을 가르쳐줬던 스승님은 자기가 잘 모르는 문제를 학생이 물어올 때는 숙제를 내주더군요.”
서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서호가 황당함을 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