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1화 (91/155)

#91

‘설령 그대의 말들이 전부 진실이라고 해도 만약 언젠가 그대가 마음을 바꾸기만 한다면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잠든 서호를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자 커다란 충동이 그를 뒤덮었다. 그의 신력만큼이나 시커멓고 어두운 욕망이었다.

지금 이대로 너를 붙잡고 네게 나를 각인시키듯 너를 탐하고 싶었다. 도망갈 수 없게 내 것이라는 낙인을 찍고 싶었다.

‘내 운명.’

사내치고 얇은 손목이 빨갛게 변하도록 붙잡고 턱을 틀어쥔 채 색색거리며 숨을 뱉어내는 그 입술을 탐하고 싶었다.

놀라 잠에서 깬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너를 가지고 싶었다. 네 모든 것이 나에게만 향했으면 좋겠다. 듣기 좋은 미성의 목소리, 다정한 눈빛, 부드러운 손길, 맑은 웃음까지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상상이 깊어질수록, 원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머리가 혼탁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네 얼굴이 코에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달콤한 숨결이 섞이고 조금만 고개를 틀면 입술이 닿을 것만 같았다.

‘잠깐 입을 맞추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때 투명하면서도 깨끗한 빛무리가 시야를 가렸다.

저도 모르게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자신에게 붙잡힌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신력이 보였다.

자신에게서 서호를 지키듯, 강하게 움켜쥔 손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따뜻한 빛. 로제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떼어냈다.

신력이, 신이 자신이 서호를 다치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살짝 붉어졌던 서호의 손목으로 모이는 하얀 빛. 그리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붉은 자국.

‘서호를 다치게 할 뻔했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래서 로제타는 그날 이후 의도적으로 서호와의 스킨십을 피했다. 혹여 또 손이라도 닿았다가는 그때처럼 신력이 그를 막아설까 봐.

한번 고삐가 풀렸었는데 또 손을 댔다가 간신히 부여잡은 이성을 또 잃게 될까 봐.

서호가 떠날까 봐 그 옆을 떠나지는 못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나쁜 짓을 할까 봐 거리를 두고 싶었다.

서호가 웃는 모습을 보면 행복했지만 동시에 이런 사람을 다치게 할 뻔한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어떻게 너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런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흘렀을까.

로제타는 여전히 뜨거운 입술을 더듬더듬 매만졌다. 이 입술이 서호의 입술에 닿았다. 그의 숨결을 빼앗고 속에 숨겨진 수줍어하는 붉음을 탐했다. 그리고 서호에게 고백을 했다.

여전히 스스로가 싫었지만 그래도 서호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를 보내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고 답을 듣지 않으려 했다.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았으니까.

너는 너무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니까 내 고백을 듣고 난 뒤에 나를 두고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오히려 이 고백이 부담스러워서 나를 떠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다시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이 이상은 안 돼.’

로제타는 서호의 손을 붙들고 그에게 매달리기 전에, 다시 그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기 전에 방을 떠나려 몸을 돌렸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며, 차가워지는 몸을 느끼며 숨을 멈추는데 손끝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손 전체를 감싼 따뜻한 손.

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흔들림을 전부 지워낸 네가 보였다. 도망치던 자신과 달리 똑바로 서 그를 마주하는 사람. 그리고 방을 떠나기 전 하던 말.

‘도망가지 말아요.’

또 한 번 그 말이 귓가에 맴돌자 로제타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토록 멋있을까? 왜 이렇게 예쁜 사람이 내 운명이 됐을까? 정말 신에게 사랑을 받아서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나에게 온 걸까?

서호가 더 좋아졌다. 정말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숨이 부족해 달뜬 호흡을 내뱉던 입술이 떠오르고 맑게 빛나던 눈이 떠오르고 단호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망가지 말아요.’

그래, 도망가면 안 됐다.

이번에는 확실히 답도 들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한 떠나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정말 그를 가지고 싶다면,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서호의 답을 정면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설령 서호가 자신을 거절한다고 해도.

“서호님이 거절하셔도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가진 것을 떠올리시는 겁니다.”

로제타는 고개를 들어 어떻게든 자신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푸티를 바라봤다.

“폐하가 가진 이 엄청난 얼굴을 떠올리세요. 폐하는 잘생기셨고 몸도 좋고 대제국의 황제이지 않습니까?”

푸티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만큼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계속 좋다고 매달리면 언젠가는 폐하께 마음을 열 겁니다. 이미 한번 폐하를 의식하기 시작했으니 더욱 좋죠.”

로제타는 푸티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빼냈다. 그러자 푸티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불렀다.

“폐하?”

로제타는 차가운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물었다.

“서호는?”

차가운 게 닿으니 눈이 얼마나 뜨거워져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서호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손수건으로 눈만이 아닌 얼굴 전체를 꾹꾹 누르는데 푸티에게서 조금 늦은 답이 돌아왔다.

“…아리스님에게 잠시 부탁드렸습니다. 서호님이 폐하가 걱정된다고 하셔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속절없이 감정이 흘러나왔다.

“…너무 좋아.”

정말 너무 좋았다. 끝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서호가 너무, 너무 좋았다.

입술이 떨릴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네가 좋았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로제타는 뒤로 몸을 던지며 다시 뜨거워진 얼굴을 수건 아래로 숨겼다. 또다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열기 때문인지 수건은 금방 미지근해졌다.

로제타가 소리 없이 손을 옆으로 쭉 내밀자 푸티가 얼른 수건을 다시 받아 들더니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쪼르륵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로제타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네가 너무 좋은데. 그래도 네가 날 거절하면….’

그래도 오늘처럼 강제로 네게 키스를 하진 않을 것이다. 강제로 내 마음을 받아들이라고 하지도 않을 테다.

네가 너무 좋으니까. 너를 내 옆에 두고 싶지만 억지로 너를 내 옆에 둬서 네가 불행하다면 그건….

‘싫어.’

그러니까 푸티의 말처럼 서호가 자신을 거절하면 다시 고백하면 됐다.

강요는 하지 않되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몇 번이고 그에게 다가가면 된다. 로제타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길게 숨을 내뱉는데 푸티가 로제타의 손에 다시 차가워진 수건을 쥐여 줬다.

로제타는 다시 손수건을 얼굴 위에 올렸다.

‘그래도 눈물 정도는 흘려도 되겠지.’

서호의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눈물은 로제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이었다.

서호가 자신을 거절하면 정말 오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울어버릴 게 뻔했다. 서호가 자신을 거절하는 상상을 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지고 있지 않은가.

로제타는 숨을 헐떡이며 다시 뜨거워지는 눈가를 거칠게 수건으로 비볐다.

“폐하! 피부가 상하십니다!”

옆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푸티의 말을 무시한 로제타는 조심스레 물었다.

“서호는 어디 있지? 자세한 장소는 말하지 말고.”

마음만 먹으면 서호가 어디 있는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알아버리면 달려가 버릴 자신을 알았다.

“이 방과는 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손님방에서도 매우 머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왕자와 안겔이 스쳐 지나갔으나 로제타는 그들이 그렇게 흘러가게 두었다.

지금은 서호와 자신의 관계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

그 둘과 관련된 것들은 밑의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잠시 그들을 잊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로제타는 다시 푸티에게 물었다.

“서호는 어때 보여?”

“서호님께서는….”

답을 기다리던 로제타는 불쑥 손을 들어 올려 푸티의 말을 막았다.

“아니, 말하지 마. 그냥 불편하지 않게 잘 보필해.”

“네, 그러겠습니다.”

서호가 곤란해한다거나 싫어하는 티를 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간신히 정리된 감정이 다시 들끓을 테니 안 됐다. 로제타는 미지근해진 수건을 들어 올리며 푸티에게 물었다.

“눈은 어떻지?”

“그….”

아직 부기가 가득한 모양이었다. 로제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명령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가져와. 여기서 처리하지.”

푸티의 보고에 일을 다 마무리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으니 마저 봐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푸티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일을 하시려고요?”

로제타가 말이 없자 푸티가 잽싸게 덧붙였다.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방을 떠나는 푸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제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다가갔다.

눈이 붓지 않았어도 로제타는 이 방을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가지 말라는 게 이 방에서 나가지 말라는 말이 아님을 알지만 서호가 돌아왔을 때 이곳에 있고 싶었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가 나도 모르게 그를 찾아가면 안 되니까.’

의자에 앉아 둘러본 방은 오늘따라 넓어 보였다. 로제타는 방을 외면하듯 눈을 내리감았다.

여전히 입술은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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