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90화 (90/155)

#90

‘우스워.’

루미너스에게 들어 이 신관들이 왕국의 상황을 신녀 안겔에게 전달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레이스 궁의 사람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 궁에서 일한 자들이고 다들 입이 무거운 편이었으니 별다른 걱정은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같잖게 정보를 캐내려고 하는 것은 거슬렸다.

“그레이스님께서 직접 감사 인사를 하지 못하시는 걸 늘 미안해하고 계십니다. 체력이 좋지 않으셔서 이 시간에는 늘 낮잠을 주무시니까요.”

몸이 안 좋아진 뒤로 잠이 많아졌다는 말은 첫 만남 때 이미 했기에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오수 이후에는 정무를 봐야 하기에 긴 시간을 뺄 수 없다는 게 이쪽의 주장이었으니 신관들도 말을 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단 겉으로는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입장이었으니 그레이스가 무리하게 하는 건 옳지 않았고. 예상대로 신관들이 뒤로 물러났다.

“얼른 쾌차하시길 빕니다.”

“네, 그래야죠.”

“그럼.”

“살펴 가세요.”

다이앤은 저들이 궁 이곳저곳을 살필 수 없도록 물러나 있던 사용인들을 신관들에게 붙였다.

떠밀리듯 궁을 떠나는 신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다이앤은 몸을 돌려 다시 그레이스가 잠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왕이 매일 아침 선물로 보내오는 여러 종류의 꽃.

짙은 꽃향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내쉰 다이앤이 캐노피 너머 미동조차 없는 몸을 흘끗 바라보고 신관들이 머문 자리를 빠르게 정리했다.

왕은 그레이스의 공간이 평소와 다르면 경을 쳤기 때문에 언제나 방은 똑같은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서둘러 방을 치운 다이앤은 어느새 차갑게 식은 대야 속 물을 내버리고 그 안에 다시 따뜻한 물을 담았다.

그리고 대야와 물수건을 챙겨 침대로 조용히 다가가 캐노피를 조심스레 걷고 잠들어 있는 그레이스를 내려다봤다.

곱게 감겨 있는 눈과 살짝 올라간 입매. 피부가 조금 창백하지만 그럼에도 표정이 좋았다.

“좋은 꿈을 꾸고 계신가요?”

답이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건네며 어디 불편한 곳이 없나 이곳저곳 그레이스를 살피던 다이앤은 물수건을 적셔 그녀의 손을 닦기 시작했다.

깊은 잠에 빠진 걸 알지만 혹여나 그녀를 깨울까 싶어 다이앤은 조심조심 손을 놀렸다. 차가웠던 손이 다시 따뜻해질 때쯤, 신관이 잠시 붙들었던 손을 깔끔하게 닦아낸 다이앤은 손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평안한 안식이 함께하시길.”

침대보를 정돈하고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정리한 다이앤이 캐노피를 내리고 다시 방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아.”

방 안 구석, 조그만 장식장에서 작게 빛이 새어 나왔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다이앤이 들고 있던 짐들을 내려놓고 장식장 앞으로 다가갔다.

방 안에 있는 화려한 물건들과 엇비슷해 보이는 평범한 장식장이었지만 이건 왕자가 직접 만들어준 것으로, 안에는 편지를 제외하면 아무런 물건도 들어 있지 않았다.

사실 이 편지도 지금 온 것이었고.

다이앤은 도착한 편지를 소중히 챙겨 들었지만 편지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읽을 수 없는 편지였다.

‘다이앤, 그대만 믿어.’

애정을 듬뿍 받고 자라 웃음이 많고 어린애답게 고집이 세던 어린 왕자님은 어느새 건조하고 메마른,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사랑스럽고 생기 넘치던 왕자님.

‘다이앤!’

유모라고 부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이름을 부르던 볼이 통통한 어린아이.

어미 외에 다른 존재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싫다는 듯 유모가 되었던 다이앤에게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손을 붙잡으면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레이스가 변한 이후 그 손을 붙잡아줄 이가 자신밖에 없어서 안타까웠던 아이. 그리고 지금은 아비도 어미도 믿지 못하는 어른이 된 자신의 아이.

소중한 왕자님.

‘편지는 그대가 관리해 줘. 다른 이에게는 들키지 말고. 그대가 일하는 시간에 보낼 테니까.’

다이앤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매만지며 그레이스의 침대 옆, 협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협탁에 파인 홈에 반지를 끼웠다.

그러자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랍이 열렸다. 장식장과 마찬가지로 루미너스가 만든 협탁이었으며 안에는 그레이스가 아끼는 물건들이 들어가 있었다. 편지 몇 장과 선명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그만 그림 몇 점 같은 것들.

안에 든 물건들을 눈으로 훑던 다이앤은 한때 루미너스가 그레이스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내려다봤다. 협탁 안에 있는 물건 중 그레이스가 제일 아끼던 것이기도 했다.

둘만의 글자로 편지를 주고받는 건 그레이스와 루미너스의 공통된 놀이이자 습관이었다.

‘또 편지를 보냈네?’

그레이스는 잠이 오지 않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침대에 누워 루미너스의 편지를 읽고 또 읽는 버릇이 있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다이앤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일어났을 때 언제라도 살필 수 있도록 루미너스가 새로 보낸 편지를 제일 위쪽에 올려두고 방을 나섰다.

다이앤과 교대해 그레이스를 보필하러 온 사용인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조금 늦으셨네요?”

다이앤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피곤한 낯을 숨기지 않았다.

“신관이 그레이스님의 손을 만졌거든.”

그러자 맞은편의 사용인이 잔뜩 질린 얼굴을 하고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 보고해야 할까요?”

여기서 말하는 전하는 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레이스에게 지독히 집착하는 그 사내는 다른 이가 그레이스에게 손을 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가 견뎌줄 수 있는 건 몇몇 사용인들과 루미너스뿐이었고.

지난 기도와는 달리 오늘은 기어코 캐노피 너머로 손을 뻗어 그레이스의 손을 붙들었던 신관을 떠올린 다이앤이 불안해 보이는 사용인에게 말했다.

“내가 하마.”

그러자 사용인이 크게 안도했다.

“아, 감사합니다.”

아무리 숙련된 사용인이라도 왕의 분노는 무서운 법이었다. 그나마 다이앤은 왕자의 유모로서 작위가 있는 귀족이었고 그레이스가 아끼는 사용인이었으니 큰 화를 당할 리는 없었다.

“그래. 그레이스님을 부탁하마.”

“네.”

다이앤은 미안한 얼굴로 깊게 고개를 숙이는 사용인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궁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부터 오후 4시가 되는 지금까지 홀로 그레이스를 돌보고 신관들의 동태를 살피며 왕까지 상대하는 일은 나이가 든 다이앤에게는 조금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다이앤은 그녀에게 서둘러 다가오는 사용인을 보며 다시 부드러운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무슨 일이니?”

“부인, 왕세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다이앤은 한숨을 삼켰다. 다이앤이 신경 써야 할 또 다른 인물.

루미너스의 대단한 마법 실력을 견제하고 왕의 총애를 받는 그레이스를 견제하는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왕의 총애를 받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

그 대단한 마법 실력을 오로지 어머니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자신의 동생을 모르는 이.

유일하게 이 궁에서 때 묻지 않고 큰 이가 바로 그 왕세자였다.

물론 귀족으로서의 때는 어느 정도 묻어 있었지만 왕비와 외가의 힘 덕분에 오물이 잔뜩 들러붙은 가족들의 비밀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쓸데없이 루미너스를 신경 쓰는 거겠지.’

그동안 가진 능력을 전혀 알리지 않고 별다른 바깥 활동도 없던 루미너스가 갑자기 신전에 들르고 여행을 떠나겠다 하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이앤은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그래, 가자.”

루미너스가 오기 전까지 그레이스를 지킬 사람은 자신뿐이었으니 지쳐서는 안 됐다.

***

붉게 젖은 입술, 당황한 눈동자.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보다 강인한 사람.

서호는 자신보다 강했다.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봤다.

로제타는 서호가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를 하고 있는지 알았다.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서호에게 자신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족이 안 돼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그에게 고백했다.

반쯤은 충동적인 고백이었고 반쯤은 의도된 고백이었다.

‘나에게 의지하는 만큼 나를 아끼고 좋아하니까, 너를 좋아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외치는 나를 놔두고 너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서.’

그래서 고백을 했다.

서호는 꿈이 두렵지 않았고 자신이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꿈이 두렵지 않다고 했을 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없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서호는 몇 번이고 자신을 달래줬고 이곳에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계속 기억을 더듬고 서호의 말을 떠올려보려 애를 썼지만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건 다른 이의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손을 두려워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두려워하지 않으셨죠.’

그리 말하는 왕자의 목소리와 그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꿈이 본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라는 걸 알았기에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서호의 발목에 전과 다름없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붉은 실을 발견하고 안도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남은 것은 불안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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