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지.’
푸티는 계속 다른 곳으로 새는 생각을 단속하며 다급하게 아리스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리스, 저기 저 방에 서호님이 계세요.”
“응?”
푸티가 아리스를 부른 이유는 하나였다.
“서호님께서 저보고 폐하께 가 보라 하셨거든요. 그동안 서호님을 좀 돌봐 주실래요?”
서호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푸티가 여태껏 이 복도를 서성이고 있던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도 서호를 홀로 둘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면 로제타와 서호의 상황을 자신만큼이나 잘 아는 이가 서호와 함께 있어야 했다.
“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리스의 얼굴을 보며 푸티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고백하셨어요.”
“뭐?”
“폐하가 고백하셨다고요. 거기다가….”
찰싹. 푸티가 흥분에 못 이겨 스스로의 입술을 짝 내리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아리스가 푸티를 따라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
“무슨…!”
푸티는 혹시 이 웃음소리가 서호의 방까지 들릴까 급하게 아리스의 입을 막았다.
“그리 크게 웃으시면 어떡해요?”
푸티가 휙 고개를 돌려 방을 살피는데 아리스가 그의 입을 막은 푸티의 손을 떼어내며 푸슬푸슬 웃었다.
“미안. 그래서 지금 이곳에 계시는 거야?”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웃음소리가 더는 흘러나오지 않아 안도한 푸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혼자 생각할 공간이 필요하시다고 하세요.”
한숨을 내쉬자 아리스가 자못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상황이 안 좋아?”
푸티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폐하께 가 보라고 하신 걸 보면 그렇게까지 상황이 최악은 아닌 것 같아서요.”
“하긴 단칼에 거절하지 않으셨다면 최악은 아닌 거겠지.”
“그렇겠죠?”
푸티가 희망에 찬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는데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상황을 다 본 거야?”
“아니요, 그냥 밖까지 이야기가 들렸어요.”
“목소리가 컸어?”
푸티가 다시 한번 기억을 되짚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싸운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가 그리 커지진 않았어요. 그냥 제가 문 앞에 서 있어서 그랬나 봐요.”
로제타를 데리고 방에 왔을 때, 서호는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원망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때문에 푸티는 저도 모르게 복도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방 앞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 눈빛에 서호가 이상했던 것이 사실 황제와 관련된 것이지 않을까 짐작했고, 혹 목소리가 커져 싸움이 일어날 것 같으면 얼른 로제타를 다시 밖으로 불러낼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면 손해를 보는 건 폐하니까.’
일이 커지기 전 로제타를 빼내 사전에 싸움을 방지하려던 게 푸티의 계획이었다. 상황은 푸티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 버렸지만.
푸티의 말에 아리스가 안도한 듯 웃었다.
“싸우거나 목소리가 커진 게 아니라면 그리 걱정할 필요 없지 않아?”
그건 그랬다. 하지만 푸티는 한 가지가 너무 신경 쓰였다. 로제타가 고백을 할 때 울거나 서호에게 입을 맞추는 건 솔직히 조금쯤 예상을 했었다.
그런데 서호가 고백을 받고도 이렇게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귀 끝이 붉어진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으시다니.’
로제타의 키스에 혼란스러워하던 그를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티가 다시 한번 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서호님이 생각보다 굉장히 차분하셔요.”
“서호님이?”
아리스 역시 꽤 놀란 것 같았다.
“네. 생각과는 다르죠?”
“그러네.”
푸티는 서호가 있는 방을 바라보는 아리스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안전 문제도 있지만 서호님도 혼자 둬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방으로 들어가실 필요는 없고 그냥 앞만 지켜주셔도 괜찮아요.”
“그래, 서호님은 내가 맡을게.”
아리스의 허락에 푸티가 손뼉을 쳤다.
“감사해요!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지켜봐 주세요.”
푸티는 부탁을 하면서도 오늘 왕자와 서호의 만남에 함께해 피곤했을 사람을 불렀다는 게 미안했다.
“죄송해요. 오늘도 힘드셨을 텐데. 당장 생각나는 사람이 아리스뿐이었어요.”
아리스가 푸티를 내려다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말했다.
“흠, 그래. 대신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주기.”
“네. 그럴게요.”
푸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돌아보는데, 아리스가 손을 휘저었다.
“바쁜 것 같은데 얼른 가 봐.”
서호와 함께 방을 나선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사실 서호도 서호지만 푸티는 로제타도 걱정이 많이 됐다.
푸티가 사양하지 않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네. 폐하가 진정되신 것 같으면 저도 바로 이곳으로 올게요.”
옅게 웃어주는 아리스를 뒤로하고 푸티가 서둘러 복도를 가로질렀다. 방으로 향하는 도중 몇몇 이들이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푸티는 눈을 부릅뜨며 그 말들을 잘라냈다.
그리고 잠시 뒤 도착한 방 앞에서 푸티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폐하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이해하자.’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고 있어도,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어도,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전자의 경우가 가장 긍정적인 상황이었으나 그 외의 경우는 푸티가 나서야 했다. 시종의 본분 중 하나는 언제나 주인이 최상의 모습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상태여도 달래드릴 수 있어야 해.’
과거와 달리 로제타의 최상의 상태는 무심한 얼굴이 아니라 잔잔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푸티가 손을 들어 올려 두 볼을 탁탁 두드리고는 문을 두드렸다.
“폐하, 푸티입니다.”
“…들어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푸티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었다.
***
윤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이 뻔히 보이는 서호와 몇 번 더 대화를 주고받다가 결국 이르게 그와 헤어졌다.
사실 이쪽도 멀쩡한 척하고 있었지만 표정을 숨기는 게 힘들었다.
한동안 멈췄던 꿈은 한번 시작되자 계속해서 윤을 찾아왔다. 당연히 윤은 그날 이후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서호와 만난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가 걱정되어서 만남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직접 본 서호는 그날과 달리 고민이 있어 보였다.
그날만 해도 황제와 달리 서호는 꽤 태연해 보였었다. 하지만 그건 급작스러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보였던 여유였던 걸까?
‘그곳에는 마법이나 신이 없으니 이런 일이 비현실적일지도 모르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 수도 있었다.
‘다 짐작일 뿐이지만.’
안겔에게 서호와 로제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가 이곳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그에게는 익숙지 않은 곳이었다.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야.’
본래 사람은 자신이 잃은 것에 더 큰 아쉬움이 남는 법이었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지낸다 해도 두고 온 것을 계속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처럼.’
윤은 방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환청처럼 들려오는 사내의 광기 어린 웃음을 털어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요 며칠 꿈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피곤해.’
윤은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에 힘을 주며 서호가 건네준 편지 봉투를 뜯어냈다. 뭐라도 하고 있으면 꿈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이 편지가 어머니에게 보내지는 편지라고 해도.
저번 날 편지의 끝에 적었던, 이곳에 오기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말 때문인지 편지에는 서호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리 자세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그의 일상을 상상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네.’
편지를 보며 작게 입꼬리를 올리던 윤은 몇 번 더 편지를 살피다가 내용을 외울 수 있을 때쯤, 편지를 잘 갈무리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마법진을 이용해 편지를 왕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왠지 오늘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았다.
***
이아코스 왕국.
후궁 그레이스가 머무는 궁은 언제나 그렇듯 고요했고 사람의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숙련된 사용인들 몇몇만이 소리 없이 돌아다니는 궁은 화려하진 않아도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그레이스는 왕비의 죽음 이후, 왕의 유일한 부인으로서 왕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궁에는 이렇다 할 손님이 없어 늘 조용했다.
그레이스가 조용하고 내성적이라 손님들을 불편해하는 것도 있지만 그녀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레이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있는 다이앤은 루미너스의 수행원과 함께 왕국으로 들어와 그레이스를 위해 기도를 하는 신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늘 감사드립니다.”
다이앤과 함께 방을 나선 신관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요.”
옆에 있던 또 다른 신관이 안타깝다는 듯 그레이스의 건강을 걱정했다. 기도를 위해 그레이스의 방에 들어왔을 때마다 그녀가 잠들어 있었다는 점이 염려스럽다고 말하는 신관을 보며 다이앤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다이앤의 입꼬리는 살짝 비틀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