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아까와는 다른 간질간질한 느낌에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아쉽다는 듯 입안을 조금씩 침범하며 다시 들어갈 틈을 노리는 혀에 입술을 굳게 다물고 싶었지만 밭은 숨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하아, 하아.”
하지만 로제타의 혀가 다시 서호의 입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몇 번이나 서호의 입술을 쪼아대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쪼옥-.
듣기 민망한 소리가 들려 다시 한번 얼굴이 타올랐다.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이 앞으로 내려오더니 이내 서호의 얼굴을 붙들었다. 로제타의 시선은 그와의 키스로 반질반질하게 윤을 내는 서호의 입술을 향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입술을 탐할 것 같은 집요한 시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붙들었던 손이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오더니 입술을 떼기 전 마지막으로 깨물려 얼얼한 아랫입술을 두드렸다. 진득하게 입술을 누른 엄지가 입가에 묻은 타액을 닦아내더니 다시 떨어져 나갔다.
서호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자 로제타에게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호….”
지금 그런 소리를 내야 할 쪽은 자신이 아니었나? 서호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는데 로제타가 중얼거렸다.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
이게 참은 거라고.
혀가 얼얼했고 입안 전체가 뜨겁고 입술 역시 평소와 느낌이 달랐다. 몸 전체가 이상했다.
‘그런데 참았다고?’
이렇게 뜨거우면서 어떻게 여태껏 그렇게 포근하고 다정한 손길만 건넬 수 있었던 걸까?
서호가 멀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허리를 감싸고 자신을 끌어안듯 서 있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보통 끝나고 나서 하지 않아요?”
도대체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로제타에게서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붉어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매끄럽게 위로 올라가고 웃음을 만들어냈다.
요염한 웃음이었다.
‘평소라면 저 웃음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했을 텐데.’
멍하니 생각하던 서호는 허리에 둘려진 손이 풀리는 느낌에 잡생각을 지웠다.
“로제타?”
로제타는 서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서호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도 힘을 빼며 한 발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로제타의 손이 떨어져 나갔음에도 여전히 그의 얼굴에 머물고 있었던 서호의 손 역시 툭,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래로 떨어진 손을 따라 시선을 내리던 서호는 잘게 떨리는 로제타의 손끝을 발견했다. 그리고 서둘러 고개를 들자마자 로제타의 입이 열렸다.
“내가 그대를 좋아해.”
입을 맞춘 순간 예상했던 말이었음에도 그걸 귀로 직접 듣자 느낌이 달랐다.
“그대와는 다른 의미라는 걸 알아. 그래서 여태껏 참고 있었어.”
서호는 문뜩 로제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까 마지막이 어쩌고 그러지 않았나?’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밝히게 될 줄 몰랐지만 그래도 후련하기도 하고.”
후련하다는 사람이 저렇게 울 것같이 웃나? 파르르 떨리는 로제타의 눈가에 절로 시선이 갔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돼. 뭐라고 말할지 알겠으니까.”
끝에 가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로제타가 말했다.
“그냥, 피하진 마.”
그리고는 천천히 돌아서는 몸. 등을 보이며 멀어지는 로제타의 뒷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한 발짝.
오늘 로제타는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두 발짝.
‘왜 계속 자기 혼자 결론을 내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세 발짝.
서호는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로제타의 손을 잡아끌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로제타가 서호의 손에 붙잡혀 몸을 돌렸다.
서호는 그새 또 눈물을 흘렸는지 젖어있는 예쁜 눈을 보며 따지듯 물었다.
“나도 모르는 답을 로제타가 어떻게 알아요?”
서호는 눈을 동그랗게 뜬 로제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키스도 맘대로 하더니 자기 멋대로 내 답까지 정하는 거예요?”
로제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러고 방을 나가면 뭐 어쩌려고요. 방에서 나가서 혼자 울려고요?”
로제타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거짓말일 게 뻔했다. 거센 고갯짓에 서호에게 눈물이 몇 방울 튀었다.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서호는 간신히 참아냈다. 그리고 로제타를 붙잡은 손을 작게 흔들며 이야기했다.
“그냥 여기 있어요. 내가 나갈게요. 이 얼굴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줄 순 없잖아요.”
로제타가 얼른 입을 열려고 했으나 서호가 단호하게 말을 더했다.
“피하는 거 아니고 잠깐 생각을 정리해 보려는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답을 모르겠어서.”
서호는 여전히 눈물이 방울방울 흐르는 로제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손으로 닦아주고는 당부했다.
“지금 완전히 못난 얼굴이니까 방에만 있는 거예요. 알았죠? 사람들이 울보라는 걸 알면 부끄러울 테니까.”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퉁퉁 부은 눈매나 물기 가득한 푸른 눈, 눈물 때문에 지저분해진 볼. 그리고 조금 전 키스로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은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못났을 것이 자명했다.
문제는 서호에게 저 얼굴이 못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서호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고 옅게 웃으며 속삭였다.
“도망가지 말아요.”
서호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로제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방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푸티와 눈이 마주쳤다.
“푸티?”
“네, 네!”
푸티가 정신없이 서호의 얼굴을 훑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애당초 푸티는 로제타의 마음을 전부 알고 있었을 테니 숨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서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다.
“로제타는 여기 두고 잠깐 나갈까요?”
푸티가 불안한 눈으로 서호와 방을 번갈아 바라보며 답했다.
“…네!”
서호는 푸티보다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던 푸티가 이내 서호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서호가 푸티에게 물었다.
“내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네! 그럼요.”
“안내해 줄래요?”
“네!”
푸티가 서둘러 앞서 걸음을 옮겼다. 서호는 방 안에 얌전히 서 있는 로제타의 기운을 느끼며 빠르게 방에서 멀어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서호 역시 로제타만큼이나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도대체 어느 누가 조금 전 일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서호가 뜨거운 귀를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
푸티는 복도 끝에 보이는 방을 힐끗 바라보며 복도를 서성였다. 저 방 안에 서호가 홀로 있었다.
푸티는 조금 전 서호에게 적당한 방을 안내한 뒤 쫓겨났다. 제대로 말하면 방에서 쫓겨났다기보다는 로제타에게 보내졌다고 해야 하는 게 맞았다.
‘나보다는 로제타와 함께 있어 주는 게 좋겠어요.’
말이 들어갈 틈이 하나도 없던 딱딱한 서호의 얼굴을 떠올리던 푸티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서호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자마자 그는 언제나 그렇듯 황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황제가 방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푸티의 예민한 귀는 황제의 울음소리와 그 외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방음이 엉망이야.’
미래를 위해서라도 방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니, 미래가 있나?’
푸티는 평소보다 붉어져 있던 서호의 입술과 방에서 들렸던 울음소리를 번갈아 떠올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면 서호가 자신을 로제타에게 보낼 리가 없었다.
‘그런 것치고는 방을 나왔는데?’
혼자 생각할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말 그대로의 의미인가? 폐하의 고백을 고민하는 거지.’
사실 서호는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그렇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전 서호에게 쫓겨났을 때 본 모습도 붉어진 귀만 아니라면 평소와 똑같아 보였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하셨던 건가?’
잘 모르겠다. 푸티는 매우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시종이지만 그간 모시는 주인의 연애 사정에 깊게 관여해 본 적이 없었다.
애당초 모셔 본 주인이 로제타뿐이었으니 푸티는 이런 쪽으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나도 딱히 연애는….’
출세를 위해서는 일 외에 다른 것들은 뒤로 미뤄둬야 했다.
‘그럼. 난 연애를 못 하는 게 아니야.’
그저 연애할 시간이 없었던 것뿐이다. 잠자는 몇 시간을 빼고 하루의 전부를 로제타를 위해 헌납하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서호와 로제타의 일을 잊은 푸티가 파국으로 치닫던 몇 번의 실패를 떠올렸다. 연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끝을 고하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푸티를 불렀다.
“푸티?”
“…오셨군요!”
푸티가 장난스레 웃고 있는 아리스를 기쁘게 반겼다.
“아리스.”
“갑자기 왜 불렀어? 더군다나 여기는….”
이곳은 로제타의 방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호가 혼자 생각할 만한 곳이 있냐 물었을 때 푸티는 짧은 고민 끝에 손님들의 방과도 거리가 있으면서 로제타의 방과도 조금 떨어진 이 방을 골랐다.
당연히 손님들 방보다는 로제타의 방과 더 가까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