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그걸 깨닫는 순간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는 걸 그만뒀다니.
‘왜?’
서호가 눈매를 찌푸리며 답했다.
“모르겠어요? 맨날 내 몸이 자기 소유인 양, 의식 못 하는 사람처럼 주물럭거리다가 손만 스쳐도 화들짝 놀라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로제타는 자기가 변한 걸 알아봐 달라고 하는 사람처럼 너무 대놓고 티를 내고 있었다.
서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답은요? 왜 그런 건데요?”
물에 젖어 있는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풍랑이 이는 푸른 눈을 숨겼다가 다시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로제타의 감정 역시 빠르게 변모했다.
‘당황, 슬픔, 분노?’
동시에 서호의 손이 닿아 있던 로제타의 턱에 힘이 들어가고 천천히 입이 열렸다.
“그대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나를 미워하는 건 싫으니까….”
싫어하다니? 뭘? 미간을 좁히던 서호는 몇 번의 대화를 떠올렸다.
“허락받고 만지라고 했던 거 말하는 거예요?”
“그대는 착하니까 정말 싫었던 걸 수도 있고, 최대한 그대가 싫어하는 행동은 안 하려고….”
억울함과 서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물론 말을 하던 당시에 진심이 섞여 있긴 했다.
볼에 키스하거나 눈가에 입을 맞추는 건 서호의 입장에서는 연인 사이에서나 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스킨십은 괜찮았다. 서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가 그때 말한 건, 그러니까 허락받으라고 한 건 키스를 말한 건데요?”
“…알아.”
“안다고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서호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는데 왜 아예 안 만져요?”
그 말에 로제타의 얼굴에 다시 한번 서러움이 담겼다. 서러움이라니? 여기서? 서호는 로제타가 다시 눈물을 흘리기 전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이야기해 주지 않아도….”
“한번 만지면 더 닿고 싶으니까.”
서호는 그의 말을 끊고 던져진 로제타의 말에 다시 한번 귀를 의심했으나 손을 강하게 붙들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 간절한 얼굴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날이 떠올랐다. 안겔과 친해지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투정을 부리던 로제타.
서호는 아직도 황제라는 위치가 가진 정확한 힘이나 위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황제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다.
대륙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이자 가장 강력한 군주.
그런 이가 서호에게만은 솔직하게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와는 친해지는 게 싫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만큼 외로웠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운명으로 엮인 자신에게만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게 맞나?’
로제타는 안겔만이 아닌 자신과 윤의 관계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니까 이번 역시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많이 외로운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자신과 제일 친한 이가 다른 이와 가까워지는 게 싫은 거라고.’
이곳에서 가장 친한 건 로제타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앞으로 다른 누구와 친해져도 설령 연인이 생기더라도 로제타와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을 거라 이야기해 줘도 좋을 테다.
로제타는 자신에게 큰 의미를 가진 존재였고 이 세계에서 만든 자신의 울타리였다.
‘비겁해.’
서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로제타는 이곳과 저곳을 통틀어 조건 없이 자신을 좋아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렇기에 그의 감정을 이런 식으로 무시해서는 안 됐다. 로제타가 표현하는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도대체 왜 여태 단 한 번도 이런 쪽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그날의 키스로 의심을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푸티의 말에 금방 의심을 접었던 것은 아마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그런 생각. 운명이라는 이야기에도 자연스레 우정을 생각한 건 그런 이유였다.
‘아니면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서 직접적으로 표현을 하고 말해주기 전까지 의식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서호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속에는 아직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한숨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들은 로제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서호에게서 힘이 빠지자 손 하나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지만 오른손은 여전히 로제타의 얼굴 위를 덮고 있었다.
서호의 손 위를 덮은 로제타의 손 때문이었다. 서호는 굳이 그 손을 떨쳐내려 하지 않고 물었다.
“일단 확실히 하기 위해서 물을게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맞아요?”
머뭇거리던 로제타가 답했다.
“…맞아.”
“여기서는 스킨십이 흔한 거라고 했던 건 거짓말인 거죠?”
그러자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던 로제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호가 꾹 다물린 분홍빛 입술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로제타는 나를….”
하지만 로제타가 그런 서호의 말을 잘라냈다.
“나는 그대를 강제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 감정이고…. 그대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초조함이 대놓고 보이는 게 딱 봐도 거짓말이었다. 신경 쓰지 말라면서 울먹거리는데 저 말이 진짜라고 믿을 멍청이가 있을까?
용기를 내놓고 이제 와서 도망을 가려는 로제타를 그냥 두면 두 사람은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나를 아끼는 사람이고, 가족 같은 사이라고.’
하지만 이미 그게 아님을 둘 다 알아버렸다. 서호는 아프게 그의 손을 붙드는 로제타의 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로제타를 아끼니까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넘어갈 수 없다고?”
“네. 그러니까 제대로 이야기를….”
“그러면, 이게 마지막이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 덕에 충동적으로 한 고백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좀 끝까지 들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서호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불쑥 손이 다가오고 목덜미가 붙잡혔다. 목을 전부 감싸는 뜨거운 손을 느끼기 무섭게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서로의 목을, 얼굴을 부여잡고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서호는 로제타의 눈 속 일렁이는 검은 빛을 발견했다.
그 기이한 불꽃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눈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로제타가 고개를 틀어 얼굴을 붙여오며 속삭였다.
“미안해.”
사과와 동시에 입술이 삼켜졌다. 뜨거운 숨이 입술에 닿고 벌어진 틈으로 물컹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읍!”
입안으로 들이닥친 낯선 움직임에 바짝 언 서호는 로제타를 밀어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안을 거칠게 헤집던 것이 서호의 혀를 툭툭 건드리더니 혀를 옭아맸다. 저도 모르게 흡, 숨을 들이쉬며 뒤로 고개를 물렸으나 로제타의 손이 단단하게 서호의 목을 받치고 있었기에 도망갈 수는 없었다.
오히려 로제타는 조금 더 깊게 고개를 틀며 서호에게 몸을 붙여왔다.
“으음.”
조금 더 깊어진 결합에 작게 질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짝씩 긁히는 입천장에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 것도 같았다.
그걸 깨닫자 얼굴 전체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서호와 로제타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가벼운 키스도 아니고, 아주 진한 키스를.
잡아먹힌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서호는 여전히 로제타의 얼굴에 올라가 있는 손을 빼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로제타는 서호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 위로 깍지를 껴왔다. 뜨거운 숨이 입가에서 새어 나왔고 바짝 맞닿은 몸으로 로제타의 열기가 느껴졌다.
숨이 막혔다. 서호가 숨을 헐떡이며 다시 한번 로제타를 밀어냈다. 그러자 로제타가 살짝 고개를 뒤로 물렸다.
서호가 부족한 숨을 거칠게 들이쉬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미처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로제타가 다시 입을 붙여왔다. 눈을 꼭 감고 있던 조금 전과 달리 새파란 눈이 서호를 그대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여유로운 키스가 이어졌다. 물론 여유로워졌다고 해도 서호에게는 조금 벅찬 키스였다.
입술 위를 스치는 축축한 혀, 질척이는 타액과 불어넣어지는 숨. 그리고 예쁜 저 눈.
자기가 멋대로 입을 맞춘 주제에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그 눈에서 툭, 떨어진 눈물이 뺨 위를 감싸듯 쥐고 있는 서호의 손 틈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서호가 저도 모르게 엄지를 살짝 움직여 그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자 느슨해졌던 결합이 다시 깊어졌다.
“음.”
목이 한껏 위로 들리고 서호의 손을 붙들고 있던 손이 허리를 감싸왔다. 비벼지는 혀의 움직임이 적나라했다. 두툼한 혀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서호의 혀를 감쌌다.
완전히 붙은 상체 너머로 쿵쿵 뛰는 로제타의 심장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 빠른 박동에 서호마저 숨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숨이 가빴던가?
“후우.”
숨을 쉬라는 듯 입안에서 물러난 로제타의 혀가 서호의 입술 위를 조심스레 맴돌았다. 서호가 숨을 고르는 사이 로제타는 서호의 입술을 쪽 빨아들이거나 깨물고 자잘하게 입을 맞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