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물 젖은 벽-86화 (86/155)

#86

그러자 푸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얼굴에 꽂히는 의구심 가득한 시선에 결국 서호는 처음으로 푸티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더 의심스러운 행동을 해 버렸어.”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하던 서호가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푸티를 내보낸 건 이미 일어난 일이니 그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대비하는 게 나았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게 나을까?’

요즘 왜 나를 만지지 않냐고. 혹시 무슨 문제가 있냐고.

로제타를 만나 질문을 던지는 스스로를 상상해 본 서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갛게 변했다. 서호가 다시 한번 손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상하잖아….”

의자에 앉아 몇 번이나 발버둥을 치던 서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물어보지 말까.”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있다면 풀어내고 싶었다. 자신이 로제타에게 기대는 것처럼 로제타가 자신에게 기댔으면 좋겠다. 완벽한 수평은 아니더라도 자신도 로제타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

“일방적인 관계는 싫은데….”

로제타는 서호가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아니, 그냥 서호가 이곳에 온 이유가 로제타였고 가장 믿고 의지하는 이가 로제타이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라고 여길 수 있을 사람. 그러니 문제가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 그냥 물어보자.”

서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려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로제타가 방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뭘?”

서호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로제타를 바라봤다.

“로제타? 왜 벌써 왔어요?”

아직 로제타가 돌아올 시간이 아니었다. 로제타가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며 답했다.

“일이 빨리 끝났어. 그래서 누구에게 뭘 물어보려고?”

서호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로제타의 몸을 훑었다. 숨 하나 흐트러진 곳 없이 평온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로제타의 옷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막 나타나 활짝 열린 문을 닫아주는 푸티를 발견한 서호는 그가 로제타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는 걸 깨달았다.

‘푸티.’

물론 자신이 평소와 다르긴 했지만 그걸 바로 로제타에게 고하다니. 황당함도 잠시, 자신이 평소와 다르다는 말에 급하게 이곳으로 뛰어왔을 로제타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래, 조금 부끄러운 질문을 했다고 나를 밀어낼 사람은 아니니까.’

로제타가 서호를 걱정하는 것처럼 서호 역시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서호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그의 앞에 멈춰 선 로제타의 사뭇 심각해 보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데, 그가 먼저 날카롭게 물었다.

“왕자 때문인가?”

생뚱맞은 물음에 서호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되물었다.

“윤이요? 윤이 여기서 왜 나와요?”

“평소보다 이르게 돌아왔으니 당연한 추론이야.”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서호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윤과 관련된 일은 아니고요.”

“지금 그자를 감싸주려는 건가?”

서호가 황당함을 숨기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윤을 왜 감싸줘요?”

로제타가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

“그와 친해졌으니 그와 일어난 문제를 숨기려고 하는 것 아니야?”

윤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어째서 무조건 서호와 윤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확신하는 걸까.

서호는 윤에게 불똥이 튀기 전 강조했다.

“아니에요. 이건 윤과 내 문제가 아니라 로제타와 내 문제예요.”

순간 냉랭하던 푸른 눈에 금이 갔다.

“…나와의 문제라고?”

서호가 로제타의 눈을 보지 못하고 그의 입 언저리로 시선을 내리며 말을 골랐다.

“로제타,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요. 내가 물어볼 게….”

“떠나려고?”

서호가 그의 귀를 의심하며 로제타를 올려다봤다.

“네?”

그리고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는 눈을 그제야 발견했다.

“꿈을 꾸고 나니까 떠나고 싶어? 나를 두고? 나는, 나는….”

끝에 가서는 발음이 거의 뭉개졌다. 그리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마주한 서호가 저도 모르게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정말 꿈과 연관이 있는 게 맞았나? 아니, 이건 스킨십과 다른 문제인가?’

그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됐던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엉망으로 흔들리던 사람인데 고작 하룻밤 자고 일어났다고 멀쩡해질 리가 없었다.

‘멀쩡하지도 않았어.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잖아.’

분명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본인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보여서 너무 안일하게 군 것일지도 몰랐다.

로제타는 괜찮아진 것이 아니라 괜찮아진 척을 했던 거였다.

‘멍청하긴.’

서호가 자책하는 사이 로제타는 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똑똑 떨어지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서호가 자책을 멈추고 서둘러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왜 떠나요?”

그러자 로제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답했다.

“…꿈을, 꿈을 무서워하지 않잖아. 그건 돌아가고 싶어서….”

꿈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과 떠나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꿈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가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라고요?”

로제타는 답을 하지 않았지만 더 굵어지는 눈물방울을 보아하니, 지금 자신이 제대로 해석한 게 맞는 것 같았다.

“로제타,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내가 꿈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 이 힘과 당신 덕분이에요.”

“하지만….”

헐떡이는 숨소리가 로제타의 입에서 샜다. 그 서러움 가득한 숨소리에 서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분명 그날 제대로 이야기했다. 새벽이 있는 한 두렵지 않다고. 하지만 그 말은 로제타에게 전혀 닿지 않았던 것 같았다.

서호가 손을 들어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 내렸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한 번만 더 말할게요. 나는 외로운 게 싫어요.”

서호는 조금 더 분명하게 내가 왜 당신의 손을 잡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지를 밝히기로 했다.

“돌아간다고 해도 당신만큼 나를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거기서 나는 외톨이거든요.”

서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처럼 날 필요로 하는 한, 내가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할 일은 없을 거예요.”

말하고 나니 부끄러웠다. 침묵이 오기 전 서호는 로제타의 눈이 아닌 코를 바라보며 재빨리 본래 묻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이왕 부끄러워진 거 한 번에 부끄러움을 견뎌내기로 한 것이다.

“음, 그래서 말인데… 사실 요 며칠 당신 행동이 좀 이상했잖아요. 그건 꿈 때문인 거예요?”

질문이 좀 모호했나 싶어서 서호가 다시 물어보기 위해 머뭇거리는데 로제타의 손이 그의 얼굴을 감싸던 서호의 손을 붙잡아왔다.

손 전체를 감싼 커다란 손. 그 안에 완전히 가려진 자신의 손.

따뜻한 체온이 손등에 닿자 곤란함이나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간절하다는 듯 자신의 손을 붙잡고 얼굴을 비비는 로제타.

‘일주일 만인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였다. 그 온기에 취한 사람처럼 서호는 멍하니 자신의 손에 닿은 로제타의 얼굴과 손을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로제타의 눈가가 붉게 물들다 못해,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가는 걸 발견한 서호는 자신이 오랜 시간 넋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울고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짓이야?’

서호가 재빨리 반대 손으로 로제타의 얼굴을 마저 감싸며 입을 열었다.

“정말 계속 울 거예요? 지금에 와서는 쓸모없는 질문인 것 같긴 하지만 사실 묻고 싶은 건 다른 거였는데….”

서호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름 심각했던 고민이 쓸모가 없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호는 질문을 이어 갔다.

“로제타. 왜 요새 나를 안 만졌어요?”

몸 안의 수분을 다 빼낼 것처럼 처연하게 울던 로제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뿌옇게 흐려졌던 눈이 거짓말처럼 선명해졌다.

“…흡, 뭐?”

여전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고 숨은 거칠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진정은 된 것 같았다.

‘아니, 놀란 건가.’

서호가 한숨을 내쉬며 로제타의 얼굴을 감싸던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말했다.

“이렇게 나한테 손댄 거 며칠 만이라고 생각해요?”

두 볼을 붙잡은 손에 힘을 잔뜩 줬는데도 로제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볼살이 별로 없어서 그런 걸까?

두 볼에 물길이 잔뜩 나 엉망이 되었음에도 처연함만을 주는 이.

퉁퉁 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로제타는 심히 당혹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서호는 두 볼을 움켜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서호는 얼른 답하라는 듯 로제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할 뿐이었다.

“로제타?”

서호의 부름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던 로제타가 얕은 숨을 뱉어내며 되물었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냐는 소리는 본인도 자기가 평소보다 자신을 덜 만진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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