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꿈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건가?’
안겔은 한숨을 삼켰다. 뭔가 더 있다면 또 어쩌겠는가. 왕자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 지금 당장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는데.
‘사용인들이나 신전에 다른 정보가 없냐고 물어봤지만….’
황제와 푸티가 왕자에게 신경을 쏟을 때 주변에 손을 뻗었지만 아직까지 눈에 띄는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그에 반해 왕자는 서호와 말을 놓던데.’
분명 먼젓번의 만남에서는 서로 말을 높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둘은 꽤 친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윤이라는 이름은 또 뭐지?’
분명 왕자의 가명은 ‘솔’이었는데 서호는 그를 ‘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가까워졌어.’
그 둘 사이의 거리에 머리가 아파왔다.
‘한 번 더 사용인들을 건드려 봐야겠어.’
최근 그랬듯 궁을 돌아다니며 사소한 이야기나마 얻어 봐야 했다.
‘왕국에서 제대로 된 소식을 보내야 할 텐데.’
슬슬 무슨 정보라도 보내올 때가 되었다. 안겔은 제발 그들이 쓸 만한 정보를 가져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
서호가 책을 정리하고 로제타에게 다가갔다.
“로제타.”
“복습은 끝났어?”
고개를 들어 서호를 바라보는 로제타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렇듯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호는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확히 어디가 다르다고 짚기는 어렵지만.’
꿈을 다시 꾼 날로부터 고작 사흘이 지났으니 그의 웃음이 어색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웃음 외에도 뭔가 변한 것이 있었다.
잠시 로제타의 얼굴을 살피던 서호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로제타가 읽고 있는 것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얼마 전 자신이 괜찮게 읽었던 책이었다. 추천했던 책이 로제타에게도 재미있을까 살짝 걱정됐다.
‘나는 재밌게 읽었는데, 상대는 별로라고 하면 좀 그렇지.’
로제타가 반쯤 읽은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답했다.
“나쁘지 않아.”
책을 읽는 속도를 보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래요?”
서호가 기뻐하며 책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책에 손이 닿은 순간 로제타의 손이 거의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흡사 서호와 손이 닿을세라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훅 뒤로 물러난 로제타의 고운 손을 바라보던 서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웃고 있는 로제타를 발견했다.
방금 그 이상 행동이 아무것도 아닌 양.
그제야 서호는 또 다른 변화를 알아차렸다.
‘스킨십이 없어.’
평소 치댄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호에게 달라붙던 로제타가 서호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자기에게 달린 몸의 일부인 양 자연스레 붙들고 다니던 서호의 손은 자유로웠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주물럭거려 늘 못나게 쭈그러지던 얼굴도 요 며칠 팽팽한 상태를 유지했다.
‘꿈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꿈을 꾼 당일에는 자신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었다.
‘다음 날은 달랐지만.’
다른 모든 건 평소와 똑같았다.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보였다. 하지만 딱 하나, 자신을 만지는 일은 없었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서호?”
길게 생각을 이어가던 서호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생각해?”
여기서 요새 당신이 나를 만지지 않는 것이 이상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빨리 읽었네요?”
“술술 넘어가더군.”
“그래요? 다행이다.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은 빨간 구두를 신은 여자가 범인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모자를 쓴 남자가 범인인 것 같은데 말이야.”
“떠봐도 안 가르쳐줄 거예요. 직접 확인해 봐야죠.”
“그런가?”
이야기를 이어 가다 보니 점점 자연스럽게 말이 나갔다. 하지만 그런 겉모습과 달리 속에는 계속해서 의문이 쌓여갔다.
꿈과 스킨십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꿈 때문이 아니라면 갑자기 스킨십이 사라진 이유는 뭘까?
그리고 왜 자신을 만지지 않는 로제타가 신경 쓰이는 걸까?
‘그야 사람이 변하면 당연히 신경 쓰이니까. 그날 로제타가 많이 힘들어했고.’
정말 그게 다인가? 뭔가 다른….
또다시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서호는 로제타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재빨리 머리를 털어냈다.
‘나중에 혼자서 생각해 보자.’
서호는 찝찝함을 지우고 로제타를 향해 웃음 지었다.
***
하지만 아무리 혼자 생각을 계속해 봐도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내가 로제타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으니까.’
아무리 서호가 로제타를 잘 읽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서호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는데 맞은편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서호?”
“아, 윤.”
서호가 윤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사실 서호는 로제타가 손을 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내내 이런 상태였다.
그날 아침의 만남 이후 일주일이나 지나 처음으로 함께하는 자리인데 그에게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호의 거절로 오늘은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음에도 계속 다른 곳에 정신이 나가 있는 서호에 윤은 이미 몇 번이나 괜찮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꿈 때문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
서호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닌 게 아닌데. 고민이 있으면 털어놔도 좋아.”
윤의 말처럼 다른 이의 조언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었다. 때로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서호는 지금 여기서 함께 대화를 나눠야 할 사람이 윤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건 로제타와 해야 할 이야기지.’
사실 제일 간단하고 정확한 방법은 로제타에게 직접 변화의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문제는 본인에게 직접 요즘 손을 대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민망하다 못해 부끄럽지.’
서호가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아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는 거라서.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할 뿐이야.”
서호의 답에 윤이 되물었다.
“마음의 준비?”
서호가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답을 삼켰다. 그리고 괜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됐고, 편지에도 적었지만 그레이스에게 답장이 조금 늦어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서호는 오늘 만나자마자 건네줬던 편지를 언급했다. 윤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서호는 그레이스에게 보낼 편지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전날 윤이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여전히 까먹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윤에게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니까 이상하다.”
이곳에서는 나이 차가 나도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라던 아리스의 가르침을 떠올려 정한 호칭이었으나 한국에서 생활할 당시 서호는 보통 친구의 어머니는 어머님이나 이모라고 부르는 편이었다. 그런 호칭이 보편적이기도 했고.
무례였을까 싶어 서호가 재빨리 물었다.
“아, 그럼 어머님이라고 부를까?”
윤이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원래 쓰시던 이름이 있거든. 지금 그 이름은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이고.”
하긴 해외로 가면 그쪽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새로 이름을 만드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래? 그때 스물한 살 때 이곳에 오셨다고 했지? 이제는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더 편하시겠네.”
그러니 서호에게 그레이스라는 이름을 알려줬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본 이름을 가르쳐줄 정도로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고작해야 편지를 몇 번 주고받은 사이니까.’
윤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겠지. 답장은 오는 대로 보낼게.”
“기대하고 있어. 글씨가 예쁘시더라.”
서호의 어머니나 아버지 연배에서는 보지 못했던, 동갑 친구들에게서나 볼 수 있던 글씨체이긴 했으나 보기 좋은 글씨는 맞았다. 서호의 말에 윤이 크게 기뻐했다.
“그래? 어머니에게 전해드릴게.”
그때 갑자기 생뚱맞은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글씨를 보여줬을 때 제국어가 조금 복잡해서 여기저기 삐죽거리던 자신의 글씨를 보며 귀엽다고 웃음 짓던 로제타.
‘아.’
역시 오늘 그에게 부끄러운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았다.
부끄러움보다는 그에 대한 애정이나 걱정이 더 컸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빨리 해결하는 게 좋았다.
***
윤과의 자리를 어영부영 정리한 뒤 평소보다 이르게 방으로 돌아온 서호는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푸티에게 어색하게 웃어줬다.
“오늘은 조금 일찍 헤어지셨네요?”
로제타에게도 제대로 하지 못할 질문을 다른 이에게라고 마음 편하게 상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무리 별꼴을 다 본 푸티라도.
서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아직 꿈이 걱정되세요?”
질문을 하면서도 문제가 있나 황급히 그의 몸을 훑는 푸티에 서호가 재빨리 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일주일이나 지났는걸요. 그냥 혼자서 조금만 생각해 볼 게 있어서요.”
“정말요?”
미심쩍어 보이는 그 얼굴에 대고 서호가 단호하게 답했다.
“정말요.”